Nakai Yozaburo`s organization and operation of the "Jukdo fishery and Sea lion joint-stock company" and "Jukdo fishing association"
나카이 요자부로(中井養三郞)를 비롯한 일본인 4명은 1905년 6월 3일 ‘죽도어렵해려 합자회사’(竹島漁獵海驢合資會社) 정관을 작성하였다. 그런데 나카이는 회사에 참여한 사원 중 자본금 등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아 독도 어업 활동이 실패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죽도어렵해려합자회사’에 참여한 사원들을 비난하면서 독도 어업의 실패가 자신이 아닌 동료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나카이는 오사카와 홋카이도로 강치 판매의 활로까지 준비하였다. 나카이(中井養三郞)는 창업 이후 회사의 이익이 희생당했다고 주장하였다. 나카이는 정박 관련 시설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선착장 건설이 최대의 급선무라고 파악하였다. 그는 물의 채취 방안에 고민하였다. 그는 강치 포획을 위해서 섬의 한복판을 뚫을 계획까지 만들어서, 강치어업을 위해서 독도의 자연을 심하게 훼손할 계획을 세웠다. 나카이는 ‘죽 도’의 이익 원천을 영구히 보전하려 한다면 반드시 강치의 포획 및 수산물 채취를 절제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독도 어업권의 독점을 추구하였다.
1906년 6월 죽도경영에 관한 진정서와 계획서를 제출한 나카이 요자부로(中井養三郞) 등은 ‘죽도어업조합’(竹島漁業組合)을 창립하였다. 그 후 나카이는 1907년 오키도청을 통해서 사할린의 강치(海馬) 현황을 파악할 수 있었는데, 강치의 홋카이도 판로를 확보하는 한편 사할린의 강치(海馬) 포획을 준비할 수 있었다. 나카이(中井養三郞)는 독도에 거주하지 않았고, 어업 활동을 한정된 시기만 전개하였다. 나카이의 ‘죽도어업조합’은 독도에 거주와 주소지가 없기 때문에 일본의 어업조합규칙을 위반하였다.
‘죽도어렵해려합자회사’는 시마네현의 특혜에 따른 나카이의 독점적 영업활동이 진행 되면서 함께 참여한 조합원의 반발과 탈퇴라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더구나 나카이는 강치의 번식과 보호를 위해서 노력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 나카이는 경제적 이익을 올리기 위해서 강치를 남획하였다. 나카이는 독도에 거주하지 않으면서 일본 어업법까지 어겨가 면서 ‘죽도어렵해려합자회사’와 ‘죽도어업조합’을 조직하였고, 만 마리 이상이 생존했던 독도의 강치를 불법적으로 남획하여 독도의 생태환경까지 파괴하였다.
In 1904, Nakai Yozaburo worked with the Japanese army to build a watchtower on Dokdo Island. Nakai linked his patriotism with the imperialism of extending the territory equally, expressing his desire to monopolize the Dokdo fishery while urging Japan to join the Dokdo territory. Basically, Nakai set the Dokdo as 'Uninhabited' and recognized the procedural problems of Dokdo incorporation.
Four Japanese, including Nakai Yozaburo, wrote the "Jukdo fishery and Sea lion joint-stock company" on June 3, 1905. However, Nakai insisted that Dokdo's fishing activities failed because he did not fulfill the promise of capital etc. among the employees who participated in the company. He criticized the employees who participated in the "Jukdo fishery and Sea lion joint-stock company" and insisted that the failure of Dokdo fishing was due to his colleagues, not himself. Nakai prepared the laceration of lacquer sales in Osaka and Hokkaido.
In June 1906, Nakai Yozaburo, who submitted a letter of complaint and plan for the management of the Jukdo Company, established the "Jukdo fishing association". After that, Nakai was able to grasp the status of Sakhalin's sea lions through the Oki City Office in 1907, and was able to secure the sea lion of Hokkaido and prepare Sakhalin's sea lions. Nakai did not reside in Dokdo, and developed fishing activities for limited periods. Nakai's "Jukdo fishing association" violates Japanese fishery association rules because there is no residence or address in Dokdo.
The "Jukdo fishery and Sea lion joint-stock company" faced the situation of opposition and withdrawal of the members who participated together as Nakai's monopolistic business activities were carried out according to the preference of Shimane Prefecture. Moreover, Nakai insisted that he tried to breed and protect sea lions, but Nakai actually overcooked the sea lions in order to gain economic benefits. Nakai organized a "Jukdo fishery and Sea lion joint-stock company" and a "Jukdo fishing association" without violating the Japanese Fishery Act without residing in Dokdo, and overthrew Dokdo's sea lions, which had survived more than 10,000 people, and destroyed Dokdo's ecological environ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