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8세기 경상우도 의령에 살던 安德文이 三山書院이라는 명칭과 위상을 정립하고, 이를 통해 晦齋ᆞ退溪ᆞ南冥 세 선생을 나란히 追崇하고 表章한 것에 초점을 두고 살펴본 것이다.
안덕문은 심성수양을 중시하며 일상에서 이를 실천하는 학문성향을 견지하였는데, 이는 그가 살던 지역에 전승된 남명의 실천적 학풍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그는 어느 특정 스승에게 나아가 수학하지 않고 영남을 대표하는 세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사숙하여 융합하려 하였다. 그는 이를 실천하기 위해 畵工에게 명하여 세 선생을 제향하는 玉山書院ᆞ陶山書院ᆞ德山書院을 그려 오게 해서 三山書院圖를 병풍으로 만들어 中堂에 펼쳐놓고 늘 세 선생의 학덕을 흠모하였다.
그는 또 삼산서원을 직접 찾아가 세 선생의 학덕을 몸소 체험하려 하였는데, 그가 살던 지역의 덕산서원은 전에 찾아간 적이 있었으므로 가보지 못한 경상좌도의 옥산서원과 도산서원을 찾아가 배알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는 삼산서원도ᆞ三山圖銘 등을 준비해 가지고 옥산서원ᆞ도산서원을 찾아가 배알하였으며, 도중에 저명한 학자들을 방문하여 삼산서원도 등을 보여주며 논평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에 의해 경상좌도 퇴계학파 학자들도 삼산서원이라는 명칭과 위상에 대해 동의하였다. 그럼으로써 그가 살고 있던 경상우도의 덕산서원을 조선후기 영남학파의 본산으로 인식된 경상좌도의 도산서원ᆞ옥산서원과 동등한 지위에 올려놓는 성과를 이룩했으며, 덕산서원에 제향된 남명을 회재ᆞ퇴계와 같은 반열의 도학자로 재인식하게 했다.
안덕문의 이러한 노력을 통해 三山書院 및 세 선생의 학덕이 나란히 表章되었으며, 영남을 鄒魯之鄕으로 만든 이 세 선생을 함께 존모해야 한다는 인식을 제고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특정 문하의 師說만을 준수하는 학풍에서 벗어나 세 선생의 학문을 하나로 아울러 계승하고자 하는 새로운 융합의 학문을 제시하게 되었다. 특히 경상우도 학자들은 이런 융합의 학문을 지향해 그 다음 시대 당색과 학파에 구애되지 않고 활발히 학술교류를 하여 학문이 울흥하는 터전을 만들었다. 여기에서 안덕문이 삼산서원의 위상을 정립하고 세 선생을 나란히 추숭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