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9세기 전반 경상우도 지역에서 활동한 河範運이 三山九曲詩를 창작한 것에 주목하여 그 내용과 의미를 분석한 것이다.하범운은 河溍의 6대손으로 19세기 전반 진주에서 활동한 남인계 학자이다. 그는 남명학과 퇴계학을 겸취하여 극도로 침체된 지역의 학풍과 기강을 부지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그의 학문성향은 讀書明理와 閑邪謹獨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의리를 종자로 삼고 그 의리를 일상에서 실천하는 삶을 지향하였다. 이러한 점은 「自省箴」과 「山中懷古」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경상우도 지역은 경상좌도 지역에 비해 구곡문화가 발달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지형적으로 화강암 지대가 적어 구곡이 형성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이 지역 학자들이 구곡문화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남명을 제향한 덕천서원 인근은 지형적으로 구곡을 설정한 만한데도 덕산구곡을 설정하지 못하였다. 그러다 19세기 전반 하범운이 처음으로 덕산구곡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덕산구곡시를 창작하였다.하범운은 1823년 안동으로 李野淳을 방문하였을 때, 이야순이 陶山九曲 詩와 玉山九曲詩를 보여주며 차운을 청하여, 집으로 돌아와 차운시를 지어 보내면서 덕산구곡시를 추가하였다. 그리하여 晦齋·退溪·南冥을 제향하는 서원이 있는 곳을 ‘三山’으로 칭하고, 이 삼산에 구곡이 있는 것은 도학의 원류가 영남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여 ‘三山九曲詩’라고 명명하였다. 이는 安德文이 세 선생을 추숭하여 三山書院의 명칭과 위상을 정립한 것과 같은 맥락에 있다. 이 점이 그가 삼산구곡시를 지어 덕산구곡을 도산구곡·옥산구곡과 나란히 드러내려 한 창작 배경이다.하범운이 지은 삼산구곡시의 덕산구곡시는 앞 시대 鄭栻이 덕천서원 뒤 산골짜기에 경영한 武夷九曲에 나아가 제목을 德山九曲으로 개정하고 曲名을 일부 바꾸어 노래한 것이다. 그런데 하범운의 덕산구곡시와 정식의 무이구곡시를 비교해 보면 내용이 판이하게 다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정식은 주자의 「무이도가」의 정신을 그대로 본받으려 한 반면, 하범운은 남명의 精神과 氣節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하범운의 덕산구곡시는 남명의 학문과 정신을 회고하고 추앙하며 자기 시대의 쇠미해진 도를 탄식하는 내용이다.하범운이 삼산구곡시의 하나로 덕산구곡시를 추가한 것은, 安德文이 三山書院의 명칭과 위상을 정립한 정신을 계승하여 남명의 덕산을 옥산·도산과 하나로 합해 도학의 연원과 학문의 본질이 같다는 점을 드러내려 한 것이다. 여기에 그가 지은 삼산구곡시의 의미가 있다. 하범운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덕천서원이 있는 덕산에는 남명의 유적을 중심으로 덕산구곡이 설정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조선 후기 이 지역 인사들의 구곡문화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퇴계 후손들이 도산구곡을 적극적으로 설정한 것처럼 남명 후손들은 덕산구곡을 설정하는 데 적극적이지 못하였던 것이 덕산구곡이 설정되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