浩亭 河崙은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에 걸쳐 仕宦한 고위관료이다. 조선 개국, 이방원의 등극, 조선의 제도와 典章의 확립 등 중요한 국가 대사를 맡아 주도하였다. 그의 고위관료로서의 자취 때문에 문학적인 면모는 소홀히 여겨져 지금까지는 연구한 바가 없어 밝혀지지 않았지 만, 그는 실로 최고의 문학가였다. 그는 조선 초기 최고의 성리학자이고 문장가였다. 慶會樓의 記文을 지었고, 圃隱 鄭夢周, 惕若齋 金九容 등 당시 최상급 문인들의 시집 서문을 썼다. 그리고 고려 말 대문호로 그의 스승인 牧隱 李穡의 神道碑 銘을 지었다. 과거를 통해 출사한 文臣들이 직책에 맞는 능력을 갖추지 못 한 것을 보고, 重試를 실시하여 능력을 보강하려는 제도를 만들었다. 호정은 4번 明나라를 다녀옴으로써 그 당시 문화 교류에 있어 가장 큰 공헌을 했다. 鄭道傳이 경솔히 지은 表文이 明 太祖의 비위를 거슬렀 을 때, 직접 명 태조를 만나 상세히 분명하게 전후사정을 간곡하게 진술하여 문제를 잘 해결하고 왔다. 또 建文帝와 永樂帝의 즉위식에 참석하 였다. 돌아와서 지어 太宗에게 바친 「覲天庭」, 「受明命」 두 악장은 나중 에 명나라 영락제에게도 알려져 외교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많은 시를 지었으나 대부분 없어지고 문집에 실려 있는 시는 조선후기에 와서 수집한 시이다. 그 가운데 「漢江詩」는 漢陽 천도를 송축하는 시인데, 그 속에 임금님을 諷諫하는 교훈이 들어 있다. 「嶺南樓」시는 절경 속의 嶺南樓가 名勝임을 부각시키고, 영남루에 대한 애정을 담았다. 곧 성리학자들의 天人合一 사상이 배어 있다. 「慶會樓記」는 경회루의 중복과정을 서술하고 중건과정에서 君民一 體가 되는 조선 초기 건전한 국가적 氣運을 느낄 수 있고, 또 경회루의 건물 구조 하나하나에 治道의 의미를 부여한 독특한 문장이다. 「矗石樓記」도 촉석루에 올라 풍경을 보면서 牧民官이 백성을 위해 해야 할 일을 연상하도록 하여 단순한 물리적 건물로서의 촉석루가 아니고, 목민관이 백성을 다스릴 방안을 창출해 내는 정신적 생산 공간 으로서 의미를 부여했다. 浩亭의 시나 문장은 단순한 문예적인 시문에 그친 것이 아니고, 經世 濟民의 의미를 담은 전통 유학자의 충실한 문학이다.
이 글은 河崙의 정치적 존재양태의 변화를 통해서 그의 삶을 구명하려고 한 것이다. 하륜은 經世와 가례에 밝았다. 太宗은 집권 전기에 하륜으로 하여금 庶 政을 관장하게 하면서 그를 ‘賓師’로서 대우하였다. 반면에 李居易와 朴誾 및 沈 溫 등은 하륜이 인사를 전횡한다고 크게 비난하였다. 심지어 閔霽는 하륜이 鄭 道傳처럼 患亂을 당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태종대 전기 하륜의 정치적 존 재양태는 극히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하륜은 朴子安 사건에 연루되어 숙청될 위기를 겪었다. 정도전 일파는 박자안 의 입을 빌려서 하륜을 숙청하고자 했다. 이는 태종과 하륜이 생사의 동맹을 맺 게 되는 가장 극적인 미시적 사건이었다. 박자안 사건은 태종과 하륜이 ‘相與之 際’를 맺게 한 단서였다. 하륜은 태종에게 盡心全力하여 충직하기가 비견할 사 람이 없는 빈사였고, 태종은 하륜에게 유가적 지식인으로서 삶을 후원·보호해 준 주군이었다. 이로써 둘은 ‘君臣相與之際’였다. 하륜은 閔無咎 형제의 옥사에 직접적인 관계는 없었다. 그러나 李之誠의 供辭 내용, 柳沂의 의심스러운 행동 등에서 보면 의문이 든다. 특히 하륜은 민무구 형제가 自願安置되자 ‘세자 제거가 아니라 宗支 제거이니 적합한 벌’이라고 하 여 태종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런데 태종은 그것조차 하륜의 해명을 통해서 충직한 행동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태종은 黃喜에게 하륜과 오고간 내용을 비밀로 하라고 명령하였다. 이후 하륜의 정치적 존재양태에 변화가 보인다. 하 륜은 태종의 자문에 응하여 武科 試員을 혁파할 것을 말하고, 나아가 임금이 직 접 考閱할 것과 이를 비밀리에 추진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처럼 하륜은 태종과 같이 朋黨을 크게 경계하였다. 이는 李叔蕃과 심온이 黨與를 개의치 않다가 죄 를 받았던 것과 비교된다. 이로써 태종대 중기 이후 하륜이 태종의 庶政 자문에 응하는 정치적 존재양태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