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석성에서 토성으로 개축 시 양상을 설명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며, 행주산성을 대 상으로 하였다. 이 산성은 삼국시대에 테뫼식 석축산성-석성 1-으로 축조된 이후 다양한 부 속시설이 설치되었다. 고려시대에는 토성-토성 1-으로 개축되었으며, 이후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석성-석성 3-으로 개축되었음이 밝혀졌다. 행주산성의 석성 1은 덕양산과 서쪽 사면의 8~9부 능선을 두르는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축성되었다. 외벽에는 1~2차례의 수축이 이루어졌으나 적극적인 생활면의 변화는 확인되 지 않는다. 이후 북서벽에 치 1이 가축되었다. 서벽 북쪽의 트렌치 토층을 분석하면 석성 1 외부를 단상으로 굴착한 부분과 외황이 매몰되고 일정 부분 대지가 조성되었다. 보축성벽과 치 2가 가축되면서 북동쪽 성우과 서벽 외부에는 비교적 넓은 평탄지가 조성 된다. 성 내부는 구지표를 절개한 후 1열의 내벽이 축조되었다. 이와 연동하여 생활면은 2차 례 정도 높아졌고, 각각의 상면에는 기와와 점토를 혼합하여 다졌다. 이후 남서벽에 석성 2 와 치 3이 축조되었으나 성 내부의 생활면 변화는 알 수 없다. 석성이 폐기된 이후 서쪽과 남쪽으로 확장된 포곡식의 토성이 축조되었다. 북동쪽 성우 의 성벽은 석성 1의 붕괴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마감된다. 이 부분의 남쪽은 토성벽이 보이지 않다가 동벽에서 토성 1이 확인되는데, 토성으로 개축된 이후에도 석성을 활용하였 음을 알 수 있다. 일정 기간이 지난 후 북동쪽 성우와 남동벽에 치가 가축된다. 기저부의 양 상으로 보아 토성 1과 공정상의 차이로 보기 어렵고, 당연히 생활면의 변화가 감지된다. 토 성 2가 축조되는 시점에는 생활면이 상당히 높아졌으며, 성 외부의 지형은 굴곡을 이루고 있었다. 이후에는 토성이 폐기된 이후 퇴적층 상부에 석성 3이 축조됨으로써 생활면의 변화 를 유추할 수 있다. 따라서 행주산성은 테뫼식 석성으로 축조된 이후 포곡식 토성, 마지막으로 석성으로 개 축되었다. 이에 연동하여 생활면은 지속해서 높아짐을 알 수 있다. 한편, 토성에 대한 기왕의 연구는 성벽을 축조한 이후 유지가 어려우므로 내ㆍ외피 토루 를 설치해야만 붕괴를 방지할 수 있다고 알려져 왔다. 하지만 토성 1의 성벽은 초축 당시 최 소 300㎝ 이상이었다. 내ㆍ외피 토루 없이 유지되었음이 밝혀졌으므로 토성에 대한 개념을 재검토해야 하는 자료를 확보하였다. 이 글의 대상인 행주산성 성벽의 구조와 구지표의 변 화는 다른 성곽 조사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성곽에 대한 조사를 진행할 경 우 성벽의 구조와 더불어 경관의 변천(성벽의 수·개축과 구지표의 변화 등)을 파악하는데,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