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지역의 烽燧에 대한 기록은『朝鮮王朝實錄』과 『世宗實錄地理志』 이후의 각종 지리지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운영되는 과정에서 그 명칭이나 위치 이동, 봉수 수에서 별다른 변동없이 이어져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강원도 해안지역의 봉수는 동해안에서 間烽인 통천의 金幱城烽燧에 서 제 1거 直烽인 회양의 所山烽燧와 2거인 영덕 大所山烽燧에서 안동의 烽枝山 烽燧로 연결되는 총 38개 정도의 間烽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제 1거에 연결될 수도 있고, 2거에 연결될 수도 있는 間烽으로 볼 수 있으며, 그 형태와 기능면에 서 연변봉수로 볼 수 있다. 신라대에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제 유물이나 유적으로 확인 할 수는 없으므로 조선 건국 초에 왜구와 여진족을 막기 위해 전국적으로 봉수제를 정비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봉수의 폐지 시기는 임진왜란 이후 이 지역에 왜구의 피해가 거의 없었고, 북변에 있는 여진족[만주족]이 이 지역까지 침입하지는 않았다는 사실과 『척주선생안』에 기록된 三陟府使 柳時會의 재임 중인 丙寅年(1626)에 영동지방의 烽臺를 폐지하였다는 기록, 그리고 『여지도서』에 삼척의 봉수는 폐지되었다고 한 기록 등을 종합해보면 인조 丙寅年(1626)에서 『輿地圖書』가 편찬된 18세기 중엽 사이에 폐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삼척지역의 봉수에 대한 현지 조사 결과 해발 100m 내외의 바다가 바라보이는 산봉우리나 곶에 위치하였고, 연소실이 하나인 단봉이었다. 연소실은 가곡산봉수에서만 방형의 연소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연대 형태는 양야산봉수가 방형이고, 나머지는 원형으로서 축조 재료는 석축이 주조를 이루었고, 임원산봉수만 토-석 혼축이었다. 연대의 평면 형태에서 초곡산봉수와 가곡산봉수는 연대형이고, 양야산봉수와 임원산봉수는 연대 방호벽형, 광진산봉수는 연대 호형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건물지 배치 형식에서 광진산봉수와 초곡산봉수는 연대 단독형이고, 양야산봉수·임원산봉수·가곡산봉수는 창고지나 추정 창고지가 있기에 일곽형으로 볼 수 있었다. 규모로 보았을 때 삼척지역의 봉수는 다른 지역과 비교하여 연대 크기는 보통이나 방호벽이나 호는 작은 편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광진산봉수의 호가 반원형이라는 점, 임원산봉수에서 창고지가 발견되었는데, 건물 축대가 6단 정도로 잘 남아 있다는 점과 반원형인 연대 방호벽형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 그리고 가곡산봉수에서 비치물품 중의 하나였던 수마석이 발견되고, 건물지로 추정되는 곳이 있다는 점과 전체적으로 초곡산봉수를 제외하고 그 형태가 비교적 잘 남 아 있다는 점에서 삼척지역의 봉수는 동해안 지역의 연변봉수를 연구하고 분석하는데 있어서 많은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다. 그리고 후망의 설치는 봉수제도를 보완하기 위하여 설치하였을 수 있고, 백성들 의 부담을 줄여주거나, 봉수제 폐지 이후 해안 경계를 위한 후속 조처로서 설치하였을 수도 있음을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