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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러시아 니꼴라이 1세(НиколайⅠ)는 1852년 청국과 일본과의 개항을 추진하기 위해서 러시아 제독 뿌쨔찐(Е.В. Путятин)을 특사로 임명하였다. 팔라다호는 1852년 10월 7일 끄론쉬따트(Кронштат)를 출항했고, 1853년 8월 10일 일본의 나가사키(長崎)에 도착하였다. 전함 팔라다호(Фрегат Паллада)는 1853년 8월 9일과 10일 사이 나가사키(長崎) 항구에 정박하여 일본을 1차로 방문하였다. 팔라다호는 일본정부와의 수교협상이 지연되자, 1853년 11월 5일 식료품을 보충하기 위해서 상하이로 떠날 것을 결정하고 11월 11일 출발하였다. 그 후 팔라다호는 상하이 근처 새들 군도(Saddle Islands)를 출발하여 1853년 12월 24일 나카사키에 정박하여 일본을 2차로 방문하였다. 팔라다호는 1854년 2월 27일 마닐라를 출발해서, 5월 22일 시베리아 해안에 진출하였다. 그 사이 팔라다호는 1854년 4월 2일부터 4월 7일까지 거문도에 정박했고, 1854년 4월 9일 나가사키 항구에 정박하여 일본을 3차로 방문하였다. 팔라다호는 조선의 지도 보완 등을 이유로 거문도와 동해안을 방문하고 조사하였는데, 4월 20일부터 5월 11일까지 조선의 동해안 전역을 실측하였다. 곤차로프는 중국, 일본, 조선 등의 과거와 현재를 세밀하게 관찰하였다. 곤차로프는 계층 사회로 이뤄진 일본의 관료주의, 일본인의 권력에 대한 공포심 등을 비판하였다. 곤차로프는 개인주의로 팽배한 중국이 뇌물로 부패하였고, 모든 것이 풍족하기 때문에 중국인이 더 이상 발전을 꿈꾸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중국이 단일성과 전체성을 상실하여 개인주의와 불합리성에 빠져들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곤차로프는 조선인이 중국인과 일본인 보다 빨리 서양을 수용하여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사물의 호기심’과 ‘변화의 욕망’이라고 파악하였다. 곤차로프는 중국, 일본, 유구(琉球), 조선 등의 민족을 하나의 가계라고 인식하였다. 곤차로프는 4개 민족 모두가 외모, 성격, 사고방식 등 공통되는 정신적 삶을 형성하고 있다고 파악하였다. 그런데 곤차로프는 ‘황폐한 문명’이라는 시각에서 4개 민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곤차로프는 기본적으로 조선, 중국, 일본이 인접성의 장점 때문에 유럽과 동북아의 상업적 미래가 희망적이라고 판단하였다. 일본과 조선이 가깝고, 두 나라는 상하이와 가깝다. 곤차로프는 삼국이 유럽의 무역과 항해를 위해 자유로운 공간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