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침탈로 동북아 지역이 급변했던 시기 진암 이병헌(1871~1940)은 주변국의 형세를 살피면서 의기소침해있던 당시 시대분위기를 진작시키려고 하였다.
이 시기 중국에서는 유학이 폐기되어 더 이상 설자리가 없게 되었고 조선의 상황도 매우 흡사하게 전개 되었다. 진암은 금문경학을 근거로 공교를 부활시켜, 이 땅을 유교의 중심지로 건설하려고 하였다. 본고에서는 공교에 대한 연구를 진전시키지 않았지만, 진암의 고토의식과 민족의식을 중심으로 그의 또 다른 세계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진암은 옛 영토에 대하여 조선 후기 학자들과 유사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진암은 한반도의 기원을 중국 북방지역의 민족과 연관지어 웅비했던 고대사를 설명하려고 하였다. 그의 논리는 해방이후 학자들에게 실증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진암이 고문헌 기록을 살펴 민족의 기원을 고증하려 했던 점은 독창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문헌 기록이 희박한 시대의 상황을 고문헌을 통하여 설명하려고 했다는 점은 민족이 암흑기에 처해 있던 당시 사람들을 진작시켰다는 관점에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진암은 조국이 長夜로 접어들자 임진왜란 때의 인물인 김덕령과 이순신, 곽재우를 떠올리며 그 당시 당색에 가려 인재가 등요하지 못한 것을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1920년 상해를 방문해서는 그곳 청년들에게 친일 문제로 심문을 받았고 일본관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글로 남기기도 했다. 이때 김구를 만났고, 나중에 이시영이나 김택영 같은 분들과 교류를 가지게 된다. 특히 김택영은 진암을 뜻이 커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선비로 본 것은 이시기 진암의 모습을 잘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