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유학자들은 자신의 학문을 이루기 위해 외국에 유학갈 수가 없었으며, 자신의 연구업적을 외국 학자들에게 알리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삼국시대에는 중국이나 인도의 승려들이 삼국에 들어와 불교를 전파하였고, 신라의 승려들도 중국이나 인도까지 유학하였다. 고려 때에도 원나라에서 주자학을 받아들였으며, 고려 학자들이 북경 만권당에서 원나라 학자들과 학문을 토론하였다. 그러나 명나라가 건국되면서 쇄국정책을 실시하여 학자들의 교류가 거의 없었다. 진암(眞菴) 이병헌(李炳憲, 1870-1940)은 시대가 바뀌면 학문도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강유위(康有爲)에게서 공자교(孔子敎)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학문을 외국에 알리기 위해 다섯 차례나 중국을 드나들었다. 조선왕조와 청나라가 모두 망한 20세기초에 주로 활동한 학자이기에 쇄국시대인 조선후기 학자들과 같은 선상에서 비교할 수는 없지만, 교통과 통신이 발전한 20세기초에도 이병헌만큼 열심히 국제화에 앞장선 학자는 많지 않았다.
이병헌의 아들 이재교(李在敎)도 아버지 이병헌의 학문을 외국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케임브리지대학 동아시아도서관에 소장된 한국 고서 가운데 ‘Wade collection 5종’, ‘Aston collection 17종’, ‘선교사들이 기증한 초기(1890-1901) 성경 collection 62종’ 외에 수집 경로가 분명한 책은 이재교가 1959년에 영어 편지와 함께 기증한 『역경금문고통론(易經今文考通論)』 1종 뿐이다.
이 책 안에는 이재교가 도서관에 보내는 편지 이외에, 이재교가 지은 「경고유교연구동지(敬告儒敎硏究同志)」라는 글도 들어 있었다. 이병헌이 「읍고조선십삼도유림동포(泣告朝鮮十三道儒林同胞)」와 「경고역내동포유림(警告域內同胞儒林)」이라는 글을 써서 자신의 학문을 조선 유림들에게 널리 알렸는데, 이재교도 같은 방식으로 외국 학자들에게까지 편지를 보내어 공자금문경학(孔子今文經學)을 국제적으로 널리 알리려고 애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