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알란 세쿨라의 <피쉬 스토리>(1995)를 분석한다. 포토 북 형식의 <피쉬 스토리>는 바다와 관련된 국제 항구도시, 해양노동자 등을 약 100여장의 사진과 방대한 양의 텍스트를 통해 담아내고 있다. 세쿨라는 이 작품을 통해 1990년대 무렵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대두된 세계화, 혹은 세계자본주의 확산과 노동의 소외에 주목한다. 필자는 본고에서 세쿨라의 사진에 내재된 ‘비판적 리얼리즘’을 읽어내는 몇 가지 코드를 분석하고, 이후 <피쉬 스토리>에서 주목하는 세계화, 혹은 세계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입장을 살펴본다. 다음으로 필자는 <피쉬 스토리>에서 비판적 리얼리즘을 보다 강력하게 실천 하도록 하는 포토 북의 형식과 상호텍스트성에 대해 논의한 후, 그가 독자로 하여금 세계화를 작동시키는 비가시적 권력, 혹은 이러한 권력 체계에서 소외된 노동자들을 재가시화 하도록 유도하는 전략 을 살펴본다.
본 연구는 조양규가 일제 강점기, 해방, 도일(渡日), 한국 전쟁 그리고 북송이라는 역사적 굴곡 속에서, 그의 회화에 대한 추구점이 무엇이었고, 스스로가 리얼리즘으로 삼았던 ‘정치와 회화의 일치’가 작품에서 얼마나 성취되었는지를 기존의 ‘틀’에서 벗겨내어 평가해 보고자 한다. 당시 세련된 추상양식에 치중하여 작업을 하였던 유학생 작가들과 달리, 조양규는 삶에서 몸소 겪은 사회적 문제를 파고들어 구상적이지만 추상적이고, 추상적이지만 더 현실감 있는 그림의 형식으로의 독자적인 회화 기법을 개발하였다는 점이 특별하다. 또한 모국과 일본에서 영향을 받았던 조력자들에 주목해보며 그의 회화 적 연원과 북송 이후의 행적을 추적하였고, 이는 한국 회화사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로서 의의가 있을 것이다.
본 논문은 피터 브뢰헐의 <이카로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1560년대)에 나타난 ‘노동’의 의미를 16 세기 네덜란드의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해석하고자 한 것이다. 본 작품의 주제는 ‘구원에 이르는 현 세 삶의 방식’으로 ‘행동적 삶’과 ‘관상적 삶’이 본보기로 제시되었다. 또한 ‘교만’을 경계하고 도덕적 삶 을 실천하면 구원받을 것이라는 윤리지침이 제시되었다. 주목할 점은 ‘행동적 삶’이 ‘노동’으로 표현되 며 강조된 점, 가장 위협적인 악덕으로 ‘교만’이 묘사된 점, 그리고 이러한 삶의 방식이 ‘구원’과 연결된 다는 점이다. 본고에서는 본 작품의 주제를 당대 안트베르펀의 경제·종교적 상황과 도시민 문화의 틀 에서 고찰하였고, 16세기 네덜란드인들의 노동관과 현세 중심적인 삶의 태도가 반영된 것으로 분석하 였다.
본 연구는 마르셀 뒤샹의 사후에 출판된 엥프라멩스 노트를 연구 대상으로 하여 그가 천착했던 엥프라멩스의 개념을 분석하고 노트에 제시된 예를 통해 그 구체적인 양상을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엥프라멩스는 1934/1935년경부터 1945년까지 뒤샹이 파편적인 메모 형식으로 남긴 단상의 주제로, ‘극도로 얇은’ 막이나 간격 혹은 그러한 간격에 의한 분리라는 일차적인 의미 외에 그것을 넘어서는 흐름이나 이행이라는 확장된 뜻을 내포하고 있다. 본고는 엥프라멩스 노트의 46개 메모에 담긴 명시적 의미와 내포된 함의를 헤아려, 논의의 내용을 (1) 가능태, (2) 분리와 간격, (3) 망각의 알레고리, (4) 감각의 혼융(混融)과 차이 그 자체, (5) 차원 이동과 에로스 등 다섯 층위로 나누어 그 의미를 해석 한다. 이를 통해 엥프라멩스가 비결정성과 탈정체성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예술에 중요한 기반이었음을 강조한다.
본고는 18세기 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신고전주의, 그리고 낭만주의로의 진행에 근거하여 당시에 나타났던 사조들 중 하나인 네오르네상스란 개념이 원래는 건축적, 회화적으로 독일에서 먼저 사용되었으며 이후 이탈리아가 동일한 진행을 따르고 있음을 밝힌다. 나아가 19세기 유럽 예술계에서 다소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던 이탈리아의 19세기 대표 화가로 프란체스코 아예즈를 주목하고 이 화가의 작품을 통해 당시 이탈리아의 낭만주의 미술이 고전에 상당히 근거하고 있으나 전유럽 공통의 낭만주의적 경향을 동시에 띄고 있음을 밝히는데 의의를 둔다. 또한 아예즈의 회화가, 니체가 구분한 세 종류의 역사 중에서 가장 건강하고 발전적인 성향인 ‘비판적 역사’의 방향을 따르고 있음에 주목한다
본 연구는 프레드릭 스티버트가 1905년 피렌체 시에 기증한 스티버트 박물관(Stibbert Museum) 의 컬렉션과 전시를 통해 컬렉터의 문화적 의도를 분석한다. 하우스 뮤지엄으로 컬렉터가 직접 수집하고 기획한 전시 공간은 만국박람회의 구조를 차용해서 의상과 갑옷을 중심으로 유럽 귀족의 역사를 강조하고 있다. 이를 통해 그는 산업혁명과 이탈리아 통일운동의 격변기 속에서 자신이 속한 사회 계급인 귀족에 대한 관점을 전시를 통해 시각화했고, 박물관에서 가장 중요한 ‘병기고의 방’에서 전시 기준을 구성하는 <성 게오르기우스>의 도상학적 역사에 대한 분석은 그가 이탈리아의 통일에 대한 역사적 근거를 강조하며 동시에 영국인이자 이탈리아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투영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연구는 17세기 초의 북부 네덜란드 화가 헨드릭 테르브루헨의 작품 <의심하는 토마스>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 연구는 우선, 테르브루헨의 <의심하는 토마스>를 카라바조의 <의심하는 토마스>와 비교해 구도가 일치하지 않음을 강조했다. 다음으로, 이 연구는 테르브루헨의 작품을 감상했던 감상자들 이 작품 앞에서 서로 대화를 나누었음을 전제했다. 마지막으로, 이 연구는 감상자들이 테르브루헨의 작품 앞에서 성경원문과 그림전통의 차이에 대해 대화했음을 증명하려 했다. 이 연구의 목적은 테르브 루헨의 작품을 둘러싼 수용활동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유교국가였던 조선은 중국의 개량형이라 할 만큼 중국의 문화를 수용하는데 적극적이였다. 그러나 그것은 수용의 단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창의적으로 계승 발전시킨 점에 주목해 해석한 의미이다. 중국과 한국이 대륙과 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와 한자문화권의 영향으로 한·중간의 외교와 문물왕래를 통한 문화교류가 학문과 예술사조 전반에서 나타난다. 원나라때 성리학의 계승이나 송대 목조건축에 의한 우리 목조건축의 발달, 당대 남종화풍의 영향은 우리 미술사에서도 발견된다. 과거 중국의 유교사상으로 인해 문인들은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매우 중시했기 때문에 원림의 소재가 되는 꽃과 나무의 경우도 중국의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했다. 본 연구에서는 조선시대 발달한 백과사전류에서 나타나는 꽃과 나무에 대한 출전분석을 통해 중국의 것을 인용한 사례에 주목하여 그 현상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나름대로 독자성을 추구했던 농서분야의 경우에도 농사 직설은 중국의 풍토와 다른 우리나라에 실정에 맞게 편찬된 농서였으나 우리나라 역시 지역의 풍토가 다르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 양반사회 의 전유물이다시피 했던 꽃과 나무들에 대한 내용들을 포함 한 백과사전류에서는 어떠한 특성을 보이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홍만선의 산림경제에서는 꽃을 다룰 때 대부분 송대의 화훼서가 인용의 주를 이루고 있는데 중국 송대는 당대에 등장한 화훼서의 영향으로 민간인들에게도 화훼가 가장 유행했던 시기이다. 대나무 심는 법을 자세히 기록한 월암종 죽법에 보면 “도랑을 깊고 넓게 파고 말린 마분과 고운 진흙 을 고루 섞어 높이 1자 정도로 메운다. 마분이 없으면 간겨를 대용해도 된다. 여름철에는 성글게, 겨울에는 빽빽이 채운 다음에 대나무를 심는다.” 고 기술되어 있는데 이러한 자세한 재식방법의 서술은 조선시대 양반들이 따라할 만한 비법으로까지 통했다. 또 양반의 서화취미와 관련되어 꽃과 나무의 격을 품평하는데 있어 해당 종의 생육조건을 아는 것은 형태와 그 의미를 발굴하는 기초적 소양이 되었다.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예원지편에는 명나라 왕상진의 군 방보, 박주목단사, 낙양목단기 등이 가장 많이 인용되었다. 낙양에서 유명한 모란의 인기는 조선시대에도 유행하였다. 특히 임원경제지에는 금화경독기의 인용도 많이 등장하는데 이 책은 중국의 것이 아닌 서유구의 저작으로 중국 것과 비교하여 우리 풍토에 맞도록 새롭게 적용한 것이다. 과실수와 조경수목을 다룬 임원경제지 만학지에는 역대 중국 약학서를 집대성한 명나라 이시진의 본초강목, 명나라 왕상진의 군방보, 당나라 곽탁타의 종수서, 양안 상순의 화 한삼재도회, 명나라 광번의 편민도찬, 명나라 서광계의 감 저소 등이 주요 인용서로 제시되었다. 백과사전류의 집필유 행에 의해 해당분야 지식기반이 풍부해지자 당시 관련 중국 책자와의 비교를 통한 현지적용이 발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꽤 오래전 부터 있었던 사실이다. 일찍이 15 세기에 화훼류를 집성한 작은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강 희안의 양화소록에는 원나라 거가필용사류전집이 다수 인용되었다. 강희안의 양화소록은 중국의 출전을 그대로 인용하는데 그치지 않고 오랫동안 관찰한 우리나라 환경을 적용해 자세히 그 차이점을 일러주고 있다. 동생인 강희맹도 같은 경향을 띤다. 그들은 식물에 대해 설명할 때 먼저 폭넓게 수집한 전거들을 인용했다. 이는 당시 학문의 성향이 출전에 의해 그 근거를 대는 것을 기본교양으로 삼았기 때문에 보여지는 현상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 화목을 가꾸는 것과 감상하는 것은 인간의 심성을 도야하는데 필요한 수단이였으며 유학의 격물치지와 그 맥을 함께 한다. 당시 중국의 꽃과 나무에 대한 책자들의 인용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먼저 지식인층이 중국에서 유행한 문화와 그 본보기로 책자들을 수용한 후, 이를 탐독하여 현지풍토에 맞춘 창의적 개량을 한 것을 세상에 백과사전류의 편찬을 통해 내놓는 수순을 밟은 것이다. 임원경제지와 같은 시기에 유희의 물명고와 같은 사전형 식에도 초와 목이 소재로 등장한다. 백과사전류의 편찬유행에 영향을 준 것은 이용후생의 실 학적 사상의 영향을 들 수 있다. 당시 조선은 공법과 도량형이 표준화되지 않았고 모든 행위와 공정에 체계가 없는 상태 였고 재료에 대한 지식 또한 없었던 점은 중국의 것을 적극 수용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가 되었다. 중국에서 먼저 유행 한 문물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이러한 지식을 조선에 먼저 전하려 한 선구자적 입장도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중국문물을 전문으로 수입하는 상인세력과 함께 발달하게 된다. 실학파의 입장에서는 실사구시의 형태로 본격화 되면서 꽃과 나무의 이름 붙이기와 품종의 구별, 의미를 따지는 품 평이외에도 파종이나 접붙이는 법, 재배나 재식 등과 관리 도 총망라되는 실용적 전문서 경향도 보이게 된다. 조선시대 꽃과 나무를 다룬 백과사전류들은 중국책에서 얻은 견문을 활용하고 당대의 관련 정보를 집대성하면서 이를 통해 우리환경에 맞춘 독특한 식생이나 전통지식을 덧붙이는 도구로 사용되어 그 편찬과정을 반복하면서 당시 정원경영과 원예유행의 지식기반으로 작용되기도 했다.
본 연구는 자연치유로서의 예술 활용 가능성에 관해 고찰하고자 하였다. 특히 예술치 료에서 가장 빈번히 활용되어지며 효과가 입증되어진 미술치료의 개념과 특성 및 효과 에 대해 살펴보았다. 예술은 표현의 힘과 관계의 효능을 지니며, 예술 활동을 통해 욕망 과 즐거움을 추구하게 만든다. 또한,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표현은 억압된 정서를 분출시 켜 정신적으로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 요인으로 작동함으로써 치유에 효과적이다. 최근 예술치료가 심리치료에 효과적임을 밝히는 연구가 많이 보고되고 있으며 미술치료가 가 지는 심리적 특성으로 인해 심리치료현장에서 많이 활용되어지고 있다. 미술치료는 미술 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환자 내면의 정서와 갈등을 안전하게 표출하고 수용하며 승화시 킴으로써 건강한 자아로 성장시킨다. 이에, 미술치료는 인위적이고 물리적 도구사용 없 이 스스로 자기치유과정을 가지게 함으로 자연치유로서의 충분히 활용 가능함을 알 수 있다.
길림성 집안시의 장천1호분 예불도는 5세기 후반 고구려의 예불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이다. 단순히 불상 앞에서 절을 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것에 그치지 않고, 불교에서의 절하는 방법은 이마를 땅에 닿게 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묘사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이 논문에서는 인도에서조차 잘 표현되지 않았던 이러한 예불방식이 고구려 벽화에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결론적으로 이 절하는 모티프는 간다라미술에 자주 표현된 연등불수기본생도에서 수메다가 헌신적으로 진흙바닥에 머리카락을 펼치며 몸을 눕혔던 것을 묘사한 장면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해 보았다. 동아시아에서는 이러한 행위를 특정한 설화 속의 장면을 넘어 보편적인 예불의 행위로 간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절하는 방법에 익숙했던 동아시아인들은 자연스럽게 미술 속의 수메다의 행위를 부처에 대한 배례라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나아가 장천1호분 예불도의 불상 좌우측에 배치된 예불자들의 움직임을 통해서는 우요의 방식으로 예불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자 의도했던 것으로 해석해 보았다. 이 시기 예불방식에서 우요가 중요했을 것임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그것을 실증할만한 자료는 많지 않다. 그런 가운데 이 예불도는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지 100여 년 안에 이러한 예불방식이 정착했음을 보여준다.
끝으로 장천1호분 예불도는 정황상 실내가 아닌 실외에서 일어나는 장면으로 추정된다. 이는 단순히 실내ㆍ외의 문제가 아니라 화면상에 등장하는 부처가 단순한 불상인지, 아니면 석가모니의 현현한 모습의 묘사인지의 차이이기도 하다. 실내, 즉 법당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그러한 구별을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야외에서 벌어지고 있는 설법 장면이라면 조각상이 아니라 실제 석가모니를 묘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배경에 등장하는 하얀 연꽃 봉오리는 법화경에 등장하는 백련의 꽃비를 연상시킨다. 물론 예불도가 그려진 공간이 무덤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아미타불, 그리고 극락세계에서의 연화화생 등을 묘사한 것으로 해석하거나, 혹은 내세에 미륵삼회설법에 참여하게 된 것을 상상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는 법화경에서 석가모니의 ‘무량삼매’에 의해 부처가 타방세계에 출현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처럼 석가모니가 고구려에 현현한 것을 묘사한 것으로도 해석해 볼 수 있음을 제시해 보았다.
개항 이후 조선은 일본 및 미국, 유럽을 통해 전기, 철도 등의 기반 산업뿐만 아니라 복식, 음식, 서양식 건물 등 실생활과 밀접한 문화체계 들을 받아들였으며, 조선의 전통 건축 및 기물들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 던 새로운 양식의 수입기물들로 대체되었다.
대한제국기 궁궐의 전통 생활가구들은 서양가구들로 대체되었으며, 온돌식 주거문화에 따라 유지되었던 좌식 생활은 입식 생활로 변화하였다. 창덕궁과 덕수궁 석조전의 서양가구들은 18세기 유럽의 로코코 양 식(Rococo Style)을 따른 것에서부터 대한제국기 황실문장인 이화문(李花文)을 넣어 제작한 것 그리고 영국의 메이플사(Messrs Maple & Co) 에서 제작된 가구들이었다. 창덕궁에서는 장식성이 돋보이는 로코코 양식의 가구를 사용했으며, 석조전의 가구들은 신고전주의 건물 외관에 어울리는 소박하고 간결한 퀸앤 양식(Queen Ann style)의 가구가 주를 이루었다. 전통적인 좌식 가구에서 탈피한 서양식 입식 가구의 등장은 개항 이후 궁궐에서 이루어진 연회 문화와 관련이 있었으며, 서양식 연회에 어울리는 도자기와 공예품들도 각국에서 수입되었다. 연회에 사용 되었던 양식기들은 프랑스의 삘리뷔(Pillivuyt), 영국의 존슨 브라더스 (Johnson Brothers), 일본의 노리다케(Noritake) 등에서 제작했던 산업 자기였다. 서양식 만찬에 어울렸던 양식기 외에도 궁궐의 실내 장식을 위해 일본산 도자기와 공예품들이 유행하였다.
대한제국기의 수입기물들은 이후 일제의 간섭과 급변하는 나라 정세로 인하여 우리만의 독자적인 특징을 발현하여 양식적인 발전을 이루지 는 못하였다. 그러나 수입기물들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생활방 식으로의 변화를 이끌었고, 합리성을 추구한 점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대한제국기의 사회⋅문화적인 면모를 다각적으로 조명 하는데 기여하였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본 논문은 15-16세기 베트남 청화백자를 제작한 가마의 형태분석과 여성이 도자 제작에 참여했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도자를 분석하여 베트 남 청화백자의 특징을 알아보고자 한다. 기존 논문에서는 중국 청화백자와의 유사성에 초점이 맞춰져 이 부분이 미비하였다. 이 부분을 보강 하기 위해 현지조사를 통해 얻은 자료와 현지 학자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베트남 청화백자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청화백자는 생활용품이자 고가의 무역품이었다. 15-16세기에 베트남은 국내 도자 제작 수준의 발전과 명 해금정책의 배경으로 청화백자를 동남아시아, 류큐, 터키, 이슬람 지역권 등으로 수출하였다. 각국으로 수출된 청화백자는 베트남 북부 지역에 있는 가마에서 주로 생산되었으 며, 북부 지역의 가마가 중국의 가마 형태를 모방하였다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대표적인 청화백자 생산지인 쭈더우(Chu Đậu) 지역의 가마 형 태를 조사한 결과로는 중국의 용요와 만두요와는 다른 특징을 보여 베 트남 지형에 맞게 재해석하여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명이나 조선에서는 여성이 도자 제작에는 참여할 수 없는 것이 일반적 이었다. 하지만 베트남에서는 톱카피 사라이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청화백자모란문천구병>이나 16세기 쭈더우 지역과 근접한 곳에 거주한 도공의 아내인 응우옌 티 딘(Nguyễn Thị Đỉnh)이 도자를 제작했다는 흔 적이 남아있어 여성이 도자 제작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완성된 청화백자는 시간이 흐르면서 베트남적인 특징을 보이게 된다. 수많은 동물 기형을 만들고 정병(켄디)라는 특수 기형을 제작하였다. 베트남 청화백자는 중국처럼 용이나 봉황과 같이 상상 속의 동물을 사용 하기도 하였지만 베트남의 자연환경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현실적인 동물인 코끼리, 앵무새, 복어, 물소 등을 기형이나 문양에 활용한 독 특함을 선보였다. 특수 기형인 정병(켄디)도 동아시아에서 주로 생산되 던 형태와 다르게 주구가 보다 길며 손잡이가 없고 높이가 낮은 형태로 상당수 생산되었다.
이를 통해 베트남 청화백자가 중국 도자를 모방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선택적으로 중국의 양식을 수용하면서 점차 베트남 특유의 미감을 담아낸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도자 수출, 제작법, 도자 형식 등을 통 해 베트남 청화백자만의 의의도 함께 찾을 수 있을 것이다
法華寺十一面觀音菩薩像은 높이 100cm의 입상으로 한그루 의 비자나무(榧)로 된 9세기 檀像풍의 일목조상으로 알려져 있다. 본 상에서 특징적인 것은 얇은 동판을 잘라서 鬢髮과 垂髮이 바람에 나부끼는 것같이 표현된 점인데, 마치 이와 대 응하는 것처럼 바람에 펄럭이며 뒤집힌 천의의 끝단 표현도 훌륭한 조각 기법으로 완성되어 주목된다. 이와 같은 이른바 風動表現에 관해서는 중국 당대 화가 吳道玄의 화풍을 답습 한 결과라고 한 井上正의 견해가 정착되었다. 그런데 본 상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光明皇后연고인 東大 寺아미타당에 안치된 檀像十一面觀音像(현존하지 않음), 혹 은 紫微中臺十一面悔過所의 畵像本尊(현존하지 않음)의 模刻 이라고 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원래 光明皇后의 십일면관음 신앙은 아미타신앙과 결합한 신앙으로, 8세기에 제작된 東大 寺아미타당상이나 紫微中臺畵像本尊도 황후의 아미타신앙 과 밀접하게 관련하고 있으며 陀羅尼集經에서 말하는 阿彌 陀佛輪印法과 같은 수행법인 同經에 게재된 掐數珠印제11을 수행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고 한다면 法華寺 像에서 보이는 吳道玄풍의 풍동표현이나 未開敷蓮華등을 조 형화 한 광배는, 아마타불의 극락정토에 서있는 십일면관음을 표현하기 위해 고안되었다고 생각되는데, 光明皇后에 얽힌 설 화에 물든 法華寺像도 황후의 십일면관음신앙의 계보를 잇는 상으로 원래는 法華寺아미타정토원 금당에 모셨다고 하는 선행연구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法華寺像의 풍동표현 이나 광배 장식은 光明皇后의 십일면관음신앙의 성격을 전해 주고 있다고 보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특수한 표현은 紫微中 臺畵像本尊등에서 이미 채용된 표현을 法華寺像이 답습한 결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예전부터 추정된 것처럼 法華寺像 은 여전히 光明皇后연고의 십일면관음상의 모각이었을 개연 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