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일랜드의 현대사 중 가장 비극적인 사건인 블러디 선데이는 시, 소설, 영화 그리고 팝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을 통해 재현되어 왔다. 블러디 선데이 사건의 발생 배경에는 북아일랜드 공동체를 둘러싼 영국과 아일랜드 가톨릭의 대립적인 정치적 입장과 당시 국제 정세와 분위기 등이 반영되어 있다. 본 글에서는 1972년 1월 30일 당시 사건의 장면들이 토착민들과 공동체에 어떤 기억을 남겼으며, 이 사건을 다룬 시들에서는 이를 어떻게 재현하고 있는가를 분석하고 있다. 아울러 당시 사건의 목격자들의 증언들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블러디 선데이』를 통해 공동체의 파편적인 트라우마 기억이 어떻게 하나의 내러티브로 만들어지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동서독은 분단 25년만인 1970년부터 독일통일을 이룬 1990년까지 총 7차례의 공식 정상회담을 개최하였다. 6차례 비공식 정상접촉도 있었다. 동서독은 지난 1990년 차가운 이성과 따뜻한 감성이 융합된 지속적인 대화와 교류협력을 바탕으로 평화적인 통일을 이룩해냈다. 통일과정에서 동서독 정상회담이 보여준 ①장기적 안목에 기초한 지속적인 대화의 추진, ②서로 양보하는 대화의 정신, ③실현불가능하고 민감한 문제를 뒤로 미루고 실현 가능한 문제를 우산시하는 현명함, ④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풀어가는 자세, ⑤서독의 동독포용 및 통일역량의 강화노력 등은 통독 30주년이 된 지금에 있어서도 남북한정상회담과 관련해서 많은 교훈 과 시사점을 주고 있다. 우리도 독일통일을 교훈삼아 ①지속적인 남북대 화와 교류협력, ②한반도 통일이해관계국에 대한 평화통일외교의 전개 및 국제사회와의 신뢰구축 강화, ③한국의 평화통일 역량강화를 모색·추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독일 통일과정에서의 동·서독 주민의 역할을 고찰하였다. 독일정치는 경제적 발전과 사회이익을 위한 동서독 통일, 즉 게젤 샤프트(Gesellschaft)를 추구하였으나, 동서독 주민은 이를 위한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 복원을 위해 노력해 왔다. 본고에서는 40여 년간의 분단 이후 독일통일은 외적으로 동독에 대한 서독의 흡수통일 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내적으로 동·서독 주민의 게마인샤프트 복원의 과정을 거치고 있음을 강조한다. 본고에서는 분단 시기 동서독 간 이주 및 교류 상황을 고찰하고, 포스트 통일 시기 동독 주민의 정체성 형성을 통한 독일의 게마인샤프트 복원 과정을 분석하였다.
이 연구의 목적은 독일 통일에 있어 동서 베를린 분단의 종료, 특히 베를린 장벽 붕괴에 영향을 끼친 인과관계에 대해 규명하는 것이다. 여기서 논의될 핵심 요소는 베를린 장벽 붕괴가 독일 통일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과정은 '동독과 서독의 분단→ 동베를린의 분단→ 베를린 장벽 건설→ 베를린 장벽 붕괴→ 동독과 서독의 통일'의 순서로 전개되었다. 여하튼 베를린 장벽 붕괴 이전에 동서독은 정상회담을 수차례 가져왔지만 베를린 장벽 붕괴 전에는 날카로운 대립만이 팽배해 있었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이후에는 일사천리로 정상회담이 진척된 것만 보아도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동서독 통일에 중차대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동서독 주민들, 특히 동독주민들의 통일 여망은 베를린 장벽을 붕괴시키는데 제일 큰 공헌을 한 셈이었다. 결국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분단 독일과 분할 베를린 영토에 펼쳐진 장막과 철조망을 뚫고 하나된 독일을 발원시키는 단초가 되었다. 즉 독일 통일은 독일이 민족적으로 밑으로부터의 통일 과정이 뭉쳐서 정상적인 통일 독일과 독일인으로 합쳐짐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기원 전후 패자시대 전쟁 발발 전략전술에서 지역적 지리적 계책을 포함한 그 주지적 특징을 갖춘 인물들은 사해와 중원을 지시하는 남북 可合可用의 원칙적 지략을 운용함으로서 그 후속 세계의 정치문화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특히 唐代太宗(626-649) 李世民(598-649)은 三省六部制에 의한 貞觀之治를 통 하여 그 정치, 경제, 문화 부흥에 일조를 한 역사적 사실에서 ‘自古之政’, 그 지역문화와 지리환경의 정책적 향방을 결정짓는다. 그 전거의 일면은 태종 이 세민의 奇正兵法활용도를 통한 전쟁 성패의 가능성 판단력으로서, 『李衛公 問對』에 적시되어 있는 바와 같다.
唐代太宗(626-649) 李世民(598-649)은 李靖(571-649)과의 대화체에서 諸葛亮 (181-234)의 七擒孟獲전략전술을 당시의 최대 관심사였던 대고구려 정벌에 관한 淵蓋蘇文(603-666)의 사회적 지위와 그 평가에 대입하여 신라와의 교섭 및 고구려와의 대치 국면을 논한다. 그것의 전략적 근거는 奇正虛實에 관한 형세에 두고 있다. 또한 상권, 중권, 하권으로 분류한 대화문답의 형식적 기술 내용에서는 기원 전후 전쟁사와 정치사에서 주목한 주요 인물들과 그 관련 사건사고를 통한 그 역사적 전거 진위를 밝힌다. 이는 물론 전쟁 발발 전후 상황에서의 전략전술, 인재상, 군신관, 외교정책, 군사기밀 등에 관한 내용이며 그 사실적 전거의 역사적 고증 해석 방법에서의 모순적 의미와 그 차이점을 추출할 수 있다.
이처럼 『武經七書』를 집대성한 시기 전후 『李衛公問對』에서는, 그 역사적 정치적 군사적 인물들과 당대 시대사조 경향 및 그 사실사건에서의 논쟁적 변론, 그리고 그 주지적 견해는 실제의 실재로서의 사실 상황 평가의 기준으로서 그 전거의 역사적 이론적 심미적 의미 및 그 의의를 담고 있다.
독일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과 패전국이었으나 1989년 10 월 9일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1990년 10월 3일 공식적으로 통일국가가 되었다. 독일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개국으로부터 서독과 동독이 강제로 분단되고 관리되었다. 독일통일 전 서독은 서구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시장경제를 도입하여 세계 선진국으로 발전하였으나. 동독은 소련식 사회주의 체제와 계획경제를 도입한 결과 국력면에서 서독에 비해 비교가 안될 정도로 많은 격차 를 보였다. 독일통일은 서독이 동독을 흡수한 전형적인 흡수통일방식이었다. 독일통일의 국내외적 환경요인은 국내적으로 동서독이 분단 상황 하에서도 정부와 민간부문차원에서 꾸준한 인적교류와 물적교류를 진행한 것이다. 국제적 요인으로는 첫째, 국제정세가 당시 소련과 동구 사회 주의권 국가들의 붕괴와 미소 냉전체제가 종식된 점, 둘째, 미국이 적극적으로 주도한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동서독이 포함된 ‘2+4체제’ 시스템 가동의 성과이다. 셋째, 독일통일은 당시 유럽지역의 나토(NATO) 와 유럽연합(EU) 등 정치적, 군사안보적, 경제적 이해관계와 전략적 목표가 일치되었다는 점을 제시할 수 있다. 독일은 통일 후 동서독인 간 사회적·경제적·심리적 갈등이 내재돼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내적 갈등요소들은 하나씩 완화돼 갔다. 이러한 독일통일 갈등요소들은 분 단체제인 한반도와 중국 양안의 통일과정에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중요한 사례이기도 하다.
근대 국민국가의 성장은 원료공급과 시장개척을 위해 세력확장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앞선 공업국가와 후발 공업국가 간에는 원료공급과 시장개척을 위한 경쟁이 불가피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은 세계적인 경제공황으로 세계경제가 붕괴되는 상황에서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자본주의체제가 성숙하지 못했던 독일, 일본, 이탈리아에 의해서 발발하였다. 본 연구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과정에서 독일이 분할점령이 되었는데, 이에 독일분단의 기원에 대한 논의는 그 당시 전개되었던 국제회담을 통해 분석하였다. 독일의 분단은 강한 독일이 주는 위협요인을 해소하고자 소련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를 위한 얄타회담 전후인 테헤란회담, 포츠담회담을 통해 확정되었다. 독일분단의 원인은 강한 독일에 대한 위협요인을 제거하려는 연합국들의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되었으나, 전후처리과정에서 강대국들의 패권안정화가 더욱 크게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유교주의 봉건국가’인 조선·명·청은 소설을 배척했던 통치이념과 이를 성문화한 ‘明律’의 ‘造祅書祅言’과 ‘禁止師巫邪術’ 조항이라는 법률적 근거를 공유했다. 그러나 이러한 공통분모 에도 불구하고 이들 3왕조는 각기 다른 형태의 소설규제정책을 시행하였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본 연구는 우선 ‘금지소설’1)의 법적 근원인 ‘挾書律’과 ‘唐律’의 계승관계를 살펴보았다. 다음으로는 ‘唐律’의 ‘造祅書祅言’ 조항이 어떻게 ‘明律’과 ‘淸律’의 ‘造祅書祅言’과 ‘禁止師巫邪術’ 조항으로 계승되었는지, 또 어떤 형태로 조선에 수용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끝으로 전문적인 소설규제법을 제정한 청대 ‘법제화’의 특성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고 찰 결과 유가적 통치이념을 공유하였지만 ‘淫’에 주목하지 않았던 명과 ‘淫’에 주목했던 청, 그리고 ‘稗’에 주목하였던 조선의 문화적 정서적 차이가 각기 다른 양상의 소설규제라는 정치 적 결과를 야기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이밖에도 한중소설 비교연구에 법전과 실록이 공통성 과 객관성을 담보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본 논문의 목적은 제4차 산업혁명의 구성요소에 대한 일반대중의 관심이 지속 또는 증가하는가, 그리고 그 관심의 분포에 국제성이 있는가를 실 증적으로 검증하는 것이다. 연구방법으로는 2018년 5월 기준 전 세계 검색량의 90%를 차지하고 있는 검색 포털사이트인 구글이 제공하는 구글트렌드를 활용한 빅데이터 툴을 활용하였다. 이와 관련 기존의 실증적 연구의 대상이 제4차 산업혁명 또는 그 유사개념에 대한 일반 대중의 관심에 있었다면, 본 논문은 그 검증 대상을 제4차 산업혁명을 뒷받침하는 실질적 핵심기술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구체화하였다. 문헌고찰을 통해 제4차 산업혁명 핵심기술 키워드로서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 사물인터넷(Internet of Things, IoT), 빅데이터(Big Data), 클라우드컴퓨팅(Cloud Computing), 모바일(Mobile), 블록체인(Block Chain), 3D프린팅(Three Dimensional Printing), 로봇(Robot), 가상・증강현실(Virtual・Augment Reality), 사이버물리시스템(Cyber-physical System, CPS), 스마트팩토리 (Smart Factory)의 11개 키워드를, 제4차 산업혁명으로 창출된 패러다임으로서 O2O(Online to Offline), 공유경제(Sharing Economy), 플랫폼경제 (Platform Economy), 온디맨드경제(On-Demand Economy), 크라우드소싱 (Crowd Sourcing)의 5개 키워드를 각각 선정하였다. 16개 키워드에 대한 분석 결과, 2004년 1월부터 2020년 8월 현재까지 제4차 산업혁명의 구성 요소 핵심기술 11개 키워드에 대한 일반 대중의 관심은 새로운 패러다임 5개 키워드에 대한 관심과 달리 지속적으로 증가하였고, 그 관심도는 3D 프린팅을 제외하고는 모두 전 세계적으로 어느 정도 분포되어 있는 국제성을 획득하였음을 실증적으로 확인하였다.
오늘날 한국 정치의 키워드라고 하면 단연 ‘음모론’이란 언어이다. 어느 사건이나, 정치적인 이슈가 발현하게 되면 어김없이 언론, 뉴스, 개인 방송, SNS를 통해 ‘음모론’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천안함 음모론’, ‘총선 음모론’, ‘코로나 음모론’은 물론이거니와, ‘美 대선 음모론’, ‘9.11 음모론’ 등 자극적인 제목으로 대중들의 관심을 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음모론’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순간, ‘음모론’에 대한 합리적 의심도 하지 않은 체, 비합리적이고, 편집증적인 환자 취급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음모론’이 어떻게 발생하고, 정치적으로 어떠한 기능을 하고 있는지, ‘음모론’의 의미를 재해석하는 학문적인 연구도 필요하다. 본 연구는 음모와 관련되었던 역사적 사건들이나, 일상생활에 듣고 보는 정치적 비밀, 음모로 포장된 진실들을 음모론으로 포괄하여 살펴보았다. 음모론은 개인의 편협한 사고로 사회를 왜곡해서 보는 관점이지만, 음모론이 사회를 바라보는 비판적 의식을 가져온다는 긍정적인 특징을 7가지로 분석하였다. 반면 음모론은 검증은 가능하지만, 과학과 실험에 의해 반증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음모론의 한계가 있다고 칼 포퍼의 논의를 빌려 음모 론의 한계를 설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확실성의 시대를 해석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적 지식으로서의 음모론을 좀 더 체계적이고, 비판적인 이론으로서의 학문적 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본 연구는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의 <폴리-베르제르의 바 A Bar at the Folies-Bergère> (1882)에 나타나는 이원성들에 관한 연구이다. 마네가 죽기 일 년 전에 남긴 마지막 걸작인 <폴리-베르제르의 바>는 뒤틀린 원근법과 같은, 화면 구성 상의 문제에 있어 현재까지 수많은 수수께끼를 남기고 있는 작품이다. 본 연구는 그 수수께끼들을 풀기 위한 열쇠로써, 마네가 살았던 시대에 시대의 복잡한 상황에 초점을 맞추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프랑스의 1860-70년대는 왕정복고 시대의 잔재들과 새롭게 부상하는 신흥 부르주아의 개념들의 혼재로 인해 정치적인 갈등과 분열이 고조되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본 연구는 이러한 시대적 자화상이 마네의 작품들, 특히 <폴리-베르제르의 바>에 내재된 모순 점들에 영향을 줬으리라는 기대 하에 시작되었다. 첫째로, 본 연구는 <폴리-베르제르의 바>에 나타나는 여급 쉬종(Suzon)의 포드에 주목하였다. 정확한 대칭적 구도로 인하여 영원성을 상징하는 쉬종의 포즈는 ‘이 마고 피에타티스(imago pietatis)’를 의미하는 마네의 다른 작품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포즈와 동일하다. 이런 점에서 쉬종은 전통성(traditionality)을 의미한다. 이와 반대로, <폴리-베르제르의 바>의 거울 속 이미지로 나타나는 쉬종의 포즈는 거울 밖의 그녀의 포즈와 다르게 보인다. 거울 이미지의 그녀는 거울 밖의 당당한 모습과는 달리 손님에게 공손하게 허리를 굽힌 포즈를 하고 있으며, 또한 그녀의 이미지는 일시적이고 흔들리고 있다. 이러한 일시적인 것, 흔들리는 모습은 또한 근대성 (modernity)의 특징이기도 하다. 둘째로, 본 연구는 쉬종이 그 당시 사회에 만연했던 여성 이미지의 두 축인 처녀와 매춘부를 모두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거울 밖에서 꽃과 과일 그리고 술과 함께 있는 쉬종은 앵그르(Ingres)의 <성체와 함께 있는 마리아 Virgin with the Host>(1854)와 동일한 구성을 가지며, 그녀의 포즈는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 (Marcantonio Raimondi)의 판화들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성모마리아의 포즈를 재현한다. 그와 반대로, 거울 속의 쉬종은 검은색 정장을 입고 모자를 쓴 남성 앞에서 구부정하게 서있으며, 이는 그 시대에 만연했던 매춘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쉬종은 처녀와 매춘부라는 양극을 모두 상징한다. 이와 같이, 이원적인 전통성과 근대성, 그리고 처녀와 매춘부가 하나의 작품 안에 공존함으로써, 마네의 <폴리-베르제르의 바>는 하나의 해석으로 환원될 수 없는 미스테리한 작품이 되었다.
이 글은 디지털 환경 속에서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게 된 우리들의 예상되는 미래를 언택트 디지털 인디펜던트Untact Digital Independent로 가늠해 보고, 콘택트 아날로그 인터디펜던트Contact Analog Interdependent 적인 한국춤의 미래적 대안으로서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에 주목하여 살펴보았다. 그 결과는 첫째, 한국춤은 한국이라는 지역적 공간 안에서 시간적인 확보를 가지고 끝없는 수용과 변용의 지속적인 전승으로 이어 온 예술적 진화의 가능성을 지닌 우리의 소중한 자산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둘째, 그 예술적 진화가 가능했던 것은 시대별 핵심적인 매체가 있었기 때문이며, 한국춤의 미래적 매체로서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을 적용해보았다. 이를 통해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이란 우리가 예상하는 미래의 시대에 유기적으로 대응이 가능한 미디어 플랫폼으로 지속적인 참여와 협력적인 창조까지 가능한 오픈형 융합 미디어 모듈 시스템이라는 주제적 개념을 이끌어냈다. 셋째,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으로 본 한국춤의 구조는 논리적·표층적·서사적·심층적 등으로 나눌 수 있고, 각종 미디어를 통해서 서사성, 분절성, 연속성 복합성, 확장성, 총체성의 방식으로 춤을 이야기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천을 들고 추는 춤’을 예시로 들었으며, 이러한 시도는 디지털 문화콘텐츠 및 미디어 문화 원형으로서의 한국춤의 새로운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 논문은 예이츠의 문화적 상상력에서 북아일랜드가 어떤 지위를 담보 하는가를 논의한다. 아일랜드와 시인 자신의 매개체로서 문화적 민족주의를 끊임없이 재구성하는 데 천착했던 예이츠의 방대한 저술 속에서 놀랍게도 북아일랜드에 관한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논의를 찾기 어렵다. 이 논문은 일기, 일화, 소수의 “전쟁시”와 상원 연설문 등 부분적이고 파편적으로 산재한 자료들을 발굴 및 수집하고 이들을 연계해서 예이츠와 북아일랜드의 관계에 관한 응집된 서사를 구축하는 데 그 목적을 둔다. 논문은 특히 유년시절 슬라이고에서 겫었던 얼스터 통합주의의 경험, 얼스터문예 극장에 관련된 일화, 「1916 부활절」, 「내전기의 명상」 및 「1919년」과 같은 정치시, 그 리고 그의 상원 연설문들을 중점적으로 분석하고 논의한다. 궁극적으로 얼스터/북아일 랜드가 예이츠의 문화적 상상력에서 생략된 원인을 추적하고 또 상징이자 실체로서 얼스터/북아일랜드의 부재가 예이츠의 문화민족주의에 미치는 영향을 가늠해본다.
러시아가 한국에 가졌던 관심 분야중 하나는 가린의 접경 지역 여행기와 「國譯 韓國誌」를 통해 나타난 것처럼 안정적인 식량자원 공급지로서 가치이다. 러시아는 동해안 탐사의 결과 200여개의 해안지형과 해양 지물에 지명을 남겼을 정도로 큰 영향력을 미쳤다. 대부분은 사라졌지만, 일부는 남아 프리모르스키 주 인근 바다의 해양 지명으로 Bukhta Reyd Pallada, Zaliv Posiet 등으로 구글 어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해안지역 조사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부분이 내륙에 대한 조사이며 러시아 정부가 한국에 관한 가진 관심의 방향이 표현된 것이 한국지(KOPEИ)로 생각된다. 전체 14장으로 편집된 「국역 한국지」의 내용 가운데 한국사와 한국의 언어, 행정 및 정치제도에 관한 내용을 제외한다면 19세기까지 서구 열강에 한국과 관련되어 알려진 한국의 영역에 관한 것을 포함한 자연지리학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경제와 통상 관련된 내용도 풍부하여서 이에 관한 지리학적 연구는 충분히 가치가 있다.
본 글은 조선 숙종 · 경종대에 무신으로 활약한 운암 장한상의 官歷과 주요 행적을 조사 · 검토한 것이다. 장한상은 21세 때인 1676년에 무과에 급제한 후 1678 년에 宣傳官에 임명됨으로써 비로소 관계에 입문하였다. 이후 장한상은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그 과정에서 그는 능력 있는 무신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장한상도 숙종 · 경종대의 換局政治 하에서 품계가 높아지고 그에 따라 정치적 의미가 있는 고위 관직에 진출하면서는 자신의 정치적 · 사회적 지위 보전과 상승을 위해 시기마다의 집권세력과 일정한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었다. 1689년 기사환국 이후에는 집권세력인 남인 측과 관계를 맺었고, 1694년 갑술환국 이후에는 정치권력을 장악한 노론 세력과 일정한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집권세력이 바뀌면 후임정권 세력에 의한 비판을 벗어날 수가 없어 자주 臺諫의 탄핵을 받았다. 이때마다 숙종과 경종은 장한상을 위해 변명 내지 옹호를 해주거나 처벌 수위를 낮추어 주었다. 또 停啟를 지시하기도 하였다. 이는 숙종과 경종이 무신으로서 장한상의 자질과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사실 장한상은 당시에 조정 안팎에서 유능한 무신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었다. 이러한 장한상의 주요 행적으로는 우선 1694년에 삼척첨사로 임명되어 울릉도를 수토하였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이 장한상의 울릉도 수토는 조선후기에 울릉도 수토제가 제도적으로 채택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그가 수토 중에 독도를 조망하 였다는 사실은 한 · 일간의 독도 영유권 논쟁에서 한국 사람들이 일찍부터 독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점을 입증해주는 귀중한 기록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장한상은 1682년에 일본 통신사 軍官으로 差定되어 일본에 갔다 왔고, 1711년에는 북한산성 축성에 都廳으로 참여하여 공사를 감독하였다. 또 1712년에 는 백두산 남쪽 지역을 직접 조사함으로써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국경선을 정하는 데에 사전 지식을 제공하였다. 이외에도 장한상은 北兵使로 있을 때 士卒 조련을 적극적으로 실시하였고 또 무기의 성능 개량에도 관심을 가졌다. 아울러 飢民의 진휼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지리적 위치를 차지한 싱가포르는 외교 정책을 바꾸어 대국 간 의 균형 을 유지 해 왔 고 무역 친중 정치 친미의 '대독 전략'을 채택해왔다. 2016년은 싱가포르 대중 국 정책을 조정 한해였고 중미 무역 충돌과 전염병 상황의 영향을 받아 싱가포르 대중국 정책도 새로운 도전에 직면 했다. 현재의 국제 환경에 빨리 적응하기 위해 싱가포르는 대중국 정책을 점차적으로 조정하고 대중국의 우호를 계속 증진 시킨다. 본고는 싱가포르가 향후 유행기에 중국 외교정책에 대한 변화 추세를 분석하는데 중심을 두고 있다.
아시아에서 인구가 많고 영향력이 있는 두 국가인 중국과 인도의 관계는 지역 평화의 안정뿐만 아니라 세계적 국제정치차원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2019년말 COVID-19 전염병 시작한 후 전 세계는 펜데믹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이로 인해 인도의 경제도 역시 불안정해졌다. 인도의 국내 정치 및 경제도 크게 나빠졌으며, Narendra Modi 정부의 통치 기반도 크게 흔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도는 중국에 대한 태도를 바꿨다. 국내정치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일부 인도정치 단체는 중국을 그 표적으로 삼았다. 2020년 5-6월에 중국군과 인도군이 Galavan Valley 경계 지역에서 충돌하면서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이 사건으로 중국-인도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현재 중국과 인도는 잠시 Zero-Sum 게임에 빠졌지만, 전염병에 맞서기 위해 양국은 서로 협력이 필요한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 이 논문은 코로나 19 확산 이후 인도의 대중국 사고방식의 변화를 분석하고 중국-인도 관계 증진을 위해 몇 가지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연구는 2016년 브렉시트의 배경에서 시작하여 2019년 조기 총선 으로 브렉시트가 사실상 확정된 과정을 시간순으로 설명하고, 그 과정에 서 제기되었던 헌법적 쟁점을 살펴본다. 이를 통해 브렉시트의 전개 과 정에서 제기된 헌법적 쟁점을 민주적 헌법 질서를 가진 모든 국가에 보 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고자 한다. 영국 브렉시트는 유 럽연합이 가지고 있었던 근본적인 문제에서 시작하였다. 유럽 통합방향 은 초기의 이념을 잃어버리고 시장주의와 국가주의에 경도되었다. 또한, 주권 국가의 정체성이 급격하게 해체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유럽연합의 국가 정체성이 그 공백을 신속하게 대체하지 못하였다. 그 과정에서 유 럽과 개별 국가 수준에서 대의제 민주주의 흠결과 영국의 포퓰리즘은 재 정 문제나 난민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증폭하였다. 유럽연합에 대한 국민의 불만과 반감은 유럽연합에 주권적 권한을 이양한 자국 의회 와 제도 정치권을 향했다. 하지만, 제도권 정치는 국민의 의사를 수렴하 여 집단적으로 구속력 있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오히려 정치체계는 극단적인 견해로 대립하여 갈등하고 있는 사회의 부정적 커뮤니케이션에 기생하였다. 대외 정책은 국가 간의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본연의 기능을 상실하고 대내적 정치 동원의 수단이 되었다. 제도 정치 전반에 대한 혐오를 반의회주의로 귀결시키고 그 속에서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인물과 정당이 급부상하였다. 이렇게 보면 브렉시트는 비단 영국의 문제 가 아니라 이미 보편화한 세계적 문제이며, 유럽 통합과 영국이라는 특 수성을 제거하면 영국 브렉시트는 우리의 현실이자 미래이다.
『성경』은 가부장적 문화 담론을 드러내는 성(gender) 차별적 텍스트이다. 성경적 텍스트에서 남성 인물들은 의사 결정자로서 지배적인 담론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최근에 페미니스트 신학에서는 성경적 텍스트가 해석되고 있는 전통 적인 관점에 이의를 제기하고 새로운 읽기를 시도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성경적 텍스트에서 드러나는 여성의 억압에 대한 의문을 제기해 보았다. 주요 논점은 성경적 텍스트를 지배하고 있는 남성의 목소리를 해체하여 은폐되었던 여성의 목소리를 읽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사무엘서 (“The Books of Samuel”)를 중심으로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은폐된 미갈(Michal)의 이야기를 모아보면, 성경적 텍스트가 지닌 성차별적인 이야기가 드러난다. 미갈은 표면적으로 이스라엘의 사울(Saul) 왕과 다윗(David) 왕의 거대담론에 숨어있는 정치적 음모의 희생자이다. 그러나 텍스트의 하부 구조를 뒤집어보면, 억압된 미갈의 목소리는 독자에게 가부장제를 비판하고 폭로하는 전복적 읽기를 가능하게 해준다.
오순절/은사주의 운동의 디아코니아 실천은 이 운동의 광범위한 영향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 운동은 비사회적 그리고 배타적 운동이라 하여 그 영향력이 저평가 되었다. 이 연구의 목적은 오순절/은사주 의 운동에서 디아코니아적인 이해와 실천의 흔적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 아래, 초기 오순절주의자들이 디아코니아를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했는지를 살폈다. 또한 오순절/은사주의 운동에서 디아코니아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변화하는 지를 추적했다. 역사적으로 오순절/은사주의 운동 은 사회, 경제적, 정치적 변화로 인해 발생하는 다양한 사회문제들을 다루었 다. 오순절/은사주의 운동에는 사회 참여, 특정 디아코니아 실천 참여, 적극적인 진보적 사회 운동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기록이 존재한다. 오순절/ 은사주의 운동을 비사회적, 배타적 운동으로 평가하는 것은 이 운동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를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