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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한인독립운동의 대모 이혜련의 삶과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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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이혜련여사(이후 존칭 생략)는 도산 안창호의 부인으로 미국식으로 안 혜련, 혹은 헬렌 안(Helen Ahn)이라 불리운다. 도산의 유품과 관련 자료들이 유족들에 의해 독립기념관 추진위원회에 기증된 때는 1985년 3월 11일이다. 독립기념관이 개관을 준비하면서 유족들과 미주 한인사회의 도움을 받아 유족 소장의 자료들을 기증받게 된 것이다. 한국에 오게 된 도산 자료는 도산 연구는 물론 한국근현대사 연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남편인 도산 안창호의 유품과 자료를 오랜 세월 동안 소중히 보존해 서 후세에 유산으로 전달한 이혜련, 그녀는 역사학자 이상의 역사의식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남편을 존경하며 이들 자료가 후대에 그 어떤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인가를 자식들에게도 가르친 이혜련은 한 가족의 어머니요, 재미 한인사회의 대모로서 큰 삶을 살았다. 이혜련의 삶은 정치 결사에 참여해 투사적으로 살지는 않았으나 민족 수난기에 남편인 도산 안창호가 大義에 헌신할 수 있도록 희생적인 뒷바라지를 하며 자신이 가장이 되어 가족의 생계와 자식 교육을 책임진 위대한 어머니이며 강철과 같은 여성이었다. 당시 한국의, 아니 재미 한인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을 한인사회를 안정시키는 절대적 존재들이다. 생활을 책임지고 자식의 교육을 책임지며 많은 여성들이 남성을 대신하여 가장이 되었다. 그럼에도 이혜련의 삶이 범상치 않음은 가장이었지만 가족주의에만 매몰되지 않았던 점에 있다. 이혜련은 독립운동계의 지도자 안창호의 아내에서 머물지 않고 한인공동체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큰 삶을 살았다. 또한 모든 면에서 솔선수범 하며 행동 자체가 교훈이 됨으로써 아버지의 부재에도 자녀들을 훌륭하게 성장시킨 그녀에게 재미 한인사회는 큰 존경을 표하였다. 도산 안창호와 결혼식을 올린 이튿날 유학길에 동반한 이혜련은 다른 미주 이민자들과 다름없이 문화적 차이와 인종차별, 그리고 언어장벽으로 고통받고 경제적 여력이 없는 불안한 생활 속에서 고통받았다. 한인 여성들은 전세계에서 가장 민주주의가 발달하고 여권이 신장된 곳이라 할 수 있는 미국에서 살고 있었지만 여권 신장 문제로 고민하거나 갈등하지 않았다. 아니 관심 밖의 일이었다. 자신들이 성장한 고향을 떠나 낯선 이국의 땅에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던 이혜련의 내면에도 이질적 갈등 요소들이 자리잡을 여력이 없었다. 재미 한인여성들의 제일의 관심은 내 나라를 다시 찾아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일이었으나 자신의 이름보다 누구의 어머니, 누구의 부인으로서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으며 이에 대해 개의치 않았다. 그녀들의 자아는 자신들의 문제보다는 내 자식을 독립된 국가의 훌륭한 인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일이었다. 이혜련이 미주에 이주한 때는 1902년으로, 재미한인사회로 보면 이주 초창기에 해당한다. 초창기 이혜련의 사회적 활동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다. 공립협회를 결성하고 국권회복운동에 뛰어들어 바빠진 남편을 뒷바라지 하면서 동시에 자식의 성장과 교육을 도맡아하고 무엇보다도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가장으로서의 삶을 살기에 여력이 없었다. 어머니로서 생활인으로서의 고단한 삶 가운데에서 혜련의 꿈과 목표 역시 남편인 안창호와 마찬가지로 조국 독립이었으며 이민 1세대로서 혜련은 동포사회에 그 꿈을 공유하고 전파하였다. 이혜련 삶의 궤적은 독립기념관 소장의 안창호자료 중에 남편과 가족, 그리고 주변의 인물들과 주고받은 편지들과 대한여자애국단 관련 기록,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에서 간행한 『안창호전집』,『미주 국민회 자료 집』과 《新韓民報》, 그리고 딸 안수산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었다. 본 논문은 안창호의 부인으로서가 아닌 인간 이혜련의 삶에 주목하고 재미 한인사회 여성운동사측면에서 한국근대사를 살펴볼 생각이다.

저자
  • 이명화(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