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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義縣의 학문전통과 瞻慕堂 林芸 家門의 형성과 전개 KCI 등재

  • 언어KOR
  • URLhttps://db.koreascholar.com/Article/Detail/332382
  • DOIhttps://doi.org/10.14381/NMH.2017.54.06.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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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학연구 (The Nammyonghak Study)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The Nammyong Studies Institute)
초록

瞻慕堂 林芸은 조선 중기 慶尙右道의 저명한 학자였다. 그는 부친 石泉 林得蕃과 형 葛川 林薰으로부터 家學을 계승한 바탕 위에서 退溪 李滉의 제자가 되어 학문을 더욱 심화시키고, 교유의 범위를 확대했다. 남명을 만나 영향을 받고 학문의 방향을 수정하였으니, 남명의 제자라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생애의 초반에는 초야에서 학문 연구와 심성 수양을 하고 있다가 學⾏이 알려져 추천을 받아, 1567년 51세 때부터 벼슬 길에 나아갔다. 크게 경륜을 펼칠 수 있는 자 리가 아닌 참봉직에 있으면서 조정에 장래 경륜을 펼칠 기반을 닦고 있었는데, 1572 년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치고 말아 그가 이룬 학문을 크게 펼쳐 보지 못 했고, 많 은 士友들이 아쉬워하였다.
첨모당 같은 유림에 비중 있는 인물이 나온 이후로, 그 후손들에 의해서 이 집안은 慶尙右道에서 학문이 있고 ⾏誼가 있는 대표적인 가문의 위상을 지속적으로 유지 하였다. 그 손자 林⾕ 林眞怤에 이르러 학문하는 家門으로서의 위상을 더욱 확실히 하였고, 그 林⾕의 후손들도 학문하는 가문의 위상을 계속 지켜 나갔다.
특히 石泉은 자식 교육에 전념하여 學⾏兼全의 교육을 몸소 실천하여 성공하였 다. 그 두 아들 葛川 林薰과 瞻慕堂 林芸이 나와 학문과 덕행으로 重望을 얻어 家聲을 높였다. 갈천은 退溪 南冥과 도의지교를 맺어 전국적인 인물이 되었고, 첨모당은 퇴계의 친밀한 제자가 되고, 또 남명에게 지도를 받음으로 해서 조선 학계의 양대 宗匠의 영향을 모두 받게 되었다. 퇴계와 남명의 학풍을 아우르는 이런 특징은 瞻慕 堂의 후손들에게 계속 이어져 조선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瞻慕堂은 51세 때 추천을 받아 출사했지만, 경륜을 펼칠 정도의 승진을 하지 못 한 채 일찍 세상을 떠나 영향을 크게 미치지 못 했다. 그 아들들도 대부분 일찍 세상 을 떠나는 바람에 학문적으로나 관직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 못 했다. 그 손자 林⾕ 林眞怤가 외조부 ⽴齋 盧欽, 蘆坡 李屹 등의 南冥學派 계통의 학문을 계승하 여, 퇴계학과 남명학을 아우르는 학문을 이루었다. 許眉叟 趙澗松 등과 교유를 통 해 학문의 폭을 넓히고 활동범위도 넓혔다. 특히 허미수와의 교유를 통해서 近畿南 人의 학자들의 학문 경향도 접하게 되었다.
瞻慕堂 가문은, 조선 전기 石泉 林得蕃에 의해서 家學이 형성된 이후 葛川 林薰, 瞻慕堂 林芸 형제를 거쳐 전국적인 學問名家의 위상에 올랐다. 그 이후 첨모당의 손자 林⾕ 林眞怤가 큰 학문을 이루었고, 그 아들 손자를 거쳐 조선말기까지 거의 학문이 끊어지지 않았고, 여러 종류의 문집을 남겼다. 특히 이 집안은 오랜 기간 대 대로 孝悌를 중심으로 실천 위주의 학문과 저서를 중시해 온 가문으로 江右地方의 대표적인 學者家門으로 손꼽을 수 있다.

저자
  • 許捲洙(경상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