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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임운(林芸, 1517-1572)의 표질 이칭(李偁)은 선조 28년(1595, 을미)에 임운의 행 장을 적어, 임운이 서울에서 역학을 논하자 기대승이 탄복한 일, 임운이 서울에서 퇴계 이황과 문난(問難)했을 뿐 아니라 퇴계가 도산(陶山)으로 퇴거하자 찾아가 뵙 고 하룻밤 묵으면서 문답한 일, 임운이 백씨 임훈, 남명 조식, 옥계 노진(盧禛)과 함 께 화림(花林)에 유람한 사실을 특별히 기록했다. 하지만 미수 허목(許穆, 1595- 1682)은 묘갈명을 지으면서, 임운과 기대승, 이황, 조식과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실제로 임운 자신이 남긴 시문에 나타난 학문 태도로 보면 반드시 퇴계와 남명의 맥을 이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임운은 퇴계와 남명의 학맥이 형성되 기 이전에 주자학을 연찬하여 독자적인 학풍을 형성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 다. 본고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임운의 생애를 살펴보고, 임운이 남긴 부 (賦), 책(策), 논(論) 등을 중심으로 그의 학술에 관해 개괄했다. 임운이 호일계(胡一桂)의 󰡔주역본의계몽익전(周易本義啓蒙翼傳)󰡕을 독파하여, 주희 역학 가운데 상수학을 중시하고 복서에서 의리를 추론하는 방법을 수립하고자 한 것은 퇴계의 학맥을 직접 이은 것이라기보다는 독조(獨造)의 경지가 드러나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2.
        2017.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瞻慕堂 林芸의 한시 가운데 脫俗的 詩世界를 고찰한 것이다. 이를 위해 첨모당 한시의 배경에 대해 우선 살펴보았다. 첨모당은 시를 매우 좋아 하였고, 자연의 景物을 만나면 흥이 일어 시를 읊었다. 이러한 시는 자신의 학문세 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있지만, 사물에 자신의 삶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회 포를 담아 노래한 것이 많다. 특히 그는 자신의 현실의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으며 이에 대한 생각을 시에 담아 내었고, 특히 속세를 벗어나 산수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읊었다. 첨모당 시의 커다란 특징은 탈속의 興趣를 읊은 것이라 하겠는 데, 이러한 탈속적 시세계는 대략 네 가지 층위로 말할 수 있다. 첫째는 世俗의 먼지를 떠나고자 하였다. 첨모당은 紅塵의 번잡함과 시끄러움을 피하여 산수 가운데 隱居하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성향에 대해 자신이 자연을 탐하는 것이 깊은 인연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세상을 떠나고자 하는 마음이 깊었다고 하였다. 두 번째는 山水에 대한 흥취가 병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자연을 좋아하여 가는 곳마다 좋은 경물을 찾아 유람하는 고상한 흥취가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하다 보니 산야에서의 흥취가 병이 되어 어쩔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산에 오르는 일은 좋고 나쁘고를 떠나 어찌할 수 없는 病癖이 되었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시와 술로 미친척하며 살아갔다고 하였다. 그는 속세를 떠나고 산수 자 연을 찾아 다녀도 이것으로 마음의 회한을 모두 풀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술을 좋아하였고, 술을 아무리 먹어도 실수를 하는 데에는 이르지 않았다고 했다. 네 번째는 人間世上에 절로 神仙世界가 있다고 했다. 몇 몇 유자들의 경우처럼 첨 모당도 신선에 대한 언급이 많은데 대부분 경치가 좋은 곳으로 자신이 있는 공간이 바로 신선세계라는 인식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네 가지는 모두 첨모당 시의 중심축을 이루면서 탈속적인 시세계의 구체 적 양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첨모당 한시의 특징을 개괄할 수 있는 내용이라 할 것 이다.
        3.
        2017.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瞻慕堂 林芸은 조선 중기 慶尙右道의 저명한 학자였다. 그는 부친 石泉 林得蕃과 형 葛川 林薰으로부터 家學을 계승한 바탕 위에서 退溪 李滉의 제자가 되어 학문을 더욱 심화시키고, 교유의 범위를 확대했다. 남명을 만나 영향을 받고 학문의 방향을 수정하였으니, 남명의 제자라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생애의 초반에는 초야에서 학문 연구와 심성 수양을 하고 있다가 學⾏이 알려져 추천을 받아, 1567년 51세 때부터 벼슬 길에 나아갔다. 크게 경륜을 펼칠 수 있는 자 리가 아닌 참봉직에 있으면서 조정에 장래 경륜을 펼칠 기반을 닦고 있었는데, 1572 년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치고 말아 그가 이룬 학문을 크게 펼쳐 보지 못 했고, 많 은 士友들이 아쉬워하였다. 첨모당 같은 유림에 비중 있는 인물이 나온 이후로, 그 후손들에 의해서 이 집안은 慶尙右道에서 학문이 있고 ⾏誼가 있는 대표적인 가문의 위상을 지속적으로 유지 하였다. 그 손자 林⾕ 林眞怤에 이르러 학문하는 家門으로서의 위상을 더욱 확실히 하였고, 그 林⾕의 후손들도 학문하는 가문의 위상을 계속 지켜 나갔다. 특히 石泉은 자식 교육에 전념하여 學⾏兼全의 교육을 몸소 실천하여 성공하였 다. 그 두 아들 葛川 林薰과 瞻慕堂 林芸이 나와 학문과 덕행으로 重望을 얻어 家聲을 높였다. 갈천은 退溪 南冥과 도의지교를 맺어 전국적인 인물이 되었고, 첨모당은 퇴계의 친밀한 제자가 되고, 또 남명에게 지도를 받음으로 해서 조선 학계의 양대 宗匠의 영향을 모두 받게 되었다. 퇴계와 남명의 학풍을 아우르는 이런 특징은 瞻慕 堂의 후손들에게 계속 이어져 조선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瞻慕堂은 51세 때 추천을 받아 출사했지만, 경륜을 펼칠 정도의 승진을 하지 못 한 채 일찍 세상을 떠나 영향을 크게 미치지 못 했다. 그 아들들도 대부분 일찍 세상 을 떠나는 바람에 학문적으로나 관직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 못 했다. 그 손자 林⾕ 林眞怤가 외조부 ⽴齋 盧欽, 蘆坡 李屹 등의 南冥學派 계통의 학문을 계승하 여, 퇴계학과 남명학을 아우르는 학문을 이루었다. 許眉叟 趙澗松 등과 교유를 통 해 학문의 폭을 넓히고 활동범위도 넓혔다. 특히 허미수와의 교유를 통해서 近畿南 人의 학자들의 학문 경향도 접하게 되었다. 瞻慕堂 가문은, 조선 전기 石泉 林得蕃에 의해서 家學이 형성된 이후 葛川 林薰, 瞻慕堂 林芸 형제를 거쳐 전국적인 學問名家의 위상에 올랐다. 그 이후 첨모당의 손자 林⾕ 林眞怤가 큰 학문을 이루었고, 그 아들 손자를 거쳐 조선말기까지 거의 학문이 끊어지지 않았고, 여러 종류의 문집을 남겼다. 특히 이 집안은 오랜 기간 대 대로 孝悌를 중심으로 실천 위주의 학문과 저서를 중시해 온 가문으로 江右地方의 대표적인 學者家門으로 손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