晉陽河氏 가운데서 河珍을 시조로 하는 司直公派는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에 名公巨卿이 배출되어 대단히 번성하였다. 그러나 領議政 河演, 大司諫 河潔 등이 현달하여 서울로 옮겨가는 바람에 진주에서는 명성이 줄어들었다. 다시 그 후손 중에 咸吉道 觀察使를 지낸 河襟이 朝鮮前期에 진주로 還故함에 따라서 다시 문호를 이루게 되었다. 이후 ‘南冥 이후 제일인자’라는 명성을 얻은 謙齋 河弘度와 그 아우인 樂窩 河弘達, 그리고 낙와의 아들이자 겸재의 조카인 雪牕 河澈 등이 나와 南冥學을 계승하여 큰 학문을 성취하여 이 家門의 격을 높였다. 科擧나 仕宦을 통한 번성은 아니었으나 학문과 儒論을 주도하여 지역 유림사회에서 큰 역할을 해냄으로써 집안을 현저하게 만들었다. 河東[조선말기까지는 晋州] 安溪마을에 거주했던 晉陽河氏 司直公派 가문의 역사와 특성을 자세히 고찰해 보고, 그 가운데 가문을 번성하게 한 대표적인 인물들을 선별하여 그들의 유림사회에서의 행적을 고찰하여 밝혔다.
이 글은 月川學團의 초기 성격을 살피기 위해 조목의 합천지역 교유인물과 조목에 대한 도산서원 종향 과정을 고찰한 것이다. 조목은 1598년 1월부터 2년 5개월 동안 합천 군수로 재임하면서 지역 학자들과 교유하였는데, 합천이 來庵 鄭仁弘의 지역적 기반이었던 만큼 정인홍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교유가 이루어졌으며, 특히 조목이 尤谷齋에서 『心經講錄』을 강학하면서 이 지역에 퇴계의 학문이 전수되기도 하였다.
‘조목과 정인홍 문인들의 친연성을 월천학단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였는가’하는 문제는 월천집 판본 비교를 통해 그 대략을 확인할 수 있다. 초고에 해당하는 필사본과 1666년 간행본의 내용을 비교‧검토해 보았을 때 필사본에 수록된 합천과 관련된 기록들이 간행본에는 모두 산삭되어 있었다. 더구나 간행본에는 남명을 추모하는 내용의 「聞曺南冥訃」가 산삭되고 정인홍을 강도 높게 비판한 「偶見仁弘南冥集跋語」가 수록되었다는 점에 주목하면, 간행본의 정리 과정이 정인홍과 그 문인들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에서 진행되었으며 이와 반대로 초기의 필사본은 수용의 입장에서 정리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한편 조목 사후에 그를 도산서원에 종향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啓請과 종향·배향에 대해 향촌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종향이 지연되다가 金中淸이 조정에 나아가 직접 啓請을 준비하면서 빠르게 추진되었다. 때문에 종향을 비판하는 일부 인사들은 대북파의 지원이 있었다고 의심했지만, 또한 그것을 확신하지는 못했다. 이 글에서는 대북파와 대립 없이 종향이 공론화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정인홍의 문인들과 친연성을 보이는 조목의 교유활동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보았다.
정리하면, 조목 사후 초기에 조목의 문집을 정리했던 문인들은 조목과 정인홍 문인들과의 친연성을 수용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종향을 추진하여 대북정권 내에서 무리 없이 공론화 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본 연구는 진주 승산마을에 세거하였던 능성구씨 문중에 관한 것이 다. 경화사족이었던 능성구씨 가문의 具槃은 18세기 처가인 김해허씨 의 세거지인 진주 승산리에서 지내게 되었다. 구반의 후손들은 승산마 을에 세거하면서 한국 굴지의 재벌가로 성장하였다. 본고에서는 승산 마을에 입향한 능성구씨의 先系와 구반의 직계 선조, 그리고 구반이 입향한 이후 후손들의 삶을 추적하였다. 승산리에 세거한 능성구씨 집안은 도원수파에 속한다. 능성구씨는 고려시대부터 이미 관료를 배출하였으며, 조선에 들어와서는 세조대에 구치관과 구치홍 갈래가 현달한 관료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승산마을 에 정착한 구반은 구치홍의 후손이었다. 구치홍의 가계는 왕실과 혼인 이 잦았고, 또한 두 차례의 반정 때에 正功臣에 책봉된 훈척가문이었다. 특히 조선후기에는 원종비 인헌왕후의 형제인 구사맹 집안이 조선 후 기 무반 벌열 가문으로 이름이 났다. 승산리에 세거한 입향한 구반은 구사맹의 동생 具思閔의 직계손이 다. 구사민은 1578년(선조 11) 遺逸로 천거되어 관직에 나갔다. 구사민의 차남 具寭는 문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갔으나, 그의 아들 具仁至 와 함께 대북세력의 비판으로 광해군 때에 화를 입었다. 구혜와 구인지 는 선조 말년에 재상이었던 유영경을 옹호하고, 정인홍을 비판하여 대 북세력에게 유영경의 당으로 낙인이 찍혀서 화를 입었다. 구인지는 정쟁으로 금고를 당했다가 사망함으로 가세가 급격히 기울 었다. 그렇기에 구인지의 차남 具崟은 10대 후반에야 외숙인 택당 이식 의 문하에서 학업을 시작하였다. 영릉 참봉이라는 음직을 받고 1652년 (효종 3) 문과에 합격하여 참상직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조부와 부친의 정치적 공백이 길었고, 조부가 유영경의 당이라는 지목을 받았으며, 문관 관료 가문으로서의 기반이 아주 탄탄한 것은 아니어서 당상관으 로 오르기에는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구음의 아들 具文游는 46세가 되어서야 음직으로 관직에 나갔기 때 문에 승진에 한계가 있었다. 그는 양천허씨 부인에게서 세 아들을 두었 는데, 그중 차남인 구반이 승산리 김해허씨 가문인 허륜의 사위가 되었 다. 구반은 승산리에서 연이어 세 아들을 낳고 불행하게도 30세에 사망 하였다. 구반이 일찍 사망하므로 허씨부인은 어린 아들들을 거느리고 승산리에서 살게 되었다. 구반의 후손은 외가인 김해허씨 가문의 사회적 경제적으로 지위에 힘입어 진주 주요 사족들과 혼인을 맺으면서 진주 사족으로서의 면모 를 갖추게 되었다. 구반의 자손들은 입신하기 위해서 儒業에서 武業으 로 전환하기도 하고, 계속 학문에 힘써서 생원진사시나 문과에 합격하 기도 하였다. 구반의 후손들은 직계 선대에는 무반 관료가 없으나 외가가 무반 가문이었고 방계친족이 세력 있는 무반 가문이었기에 무과에 합격하여 서는 무반 청요직인 무겸선전관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또한 구진검 같은 이는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어 지역 사족의 여론을 형성하고 주도하기도 하였다. 구연호는 일찍부터 경학 공부에 치중하 여 식년문과에 합격하였다. 문과 합격 후 참하관 시절을 온전히 승정원 에서 보냈고, 6품으로 승진해서는 대간에 재임하다가 낙향하였다. 구 반 이후 5대가 지나서 문과에 합격하였으나, 청요직에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능력과 집안의 문지를 인정받은 결과였다. 승산리의 능성구씨는 세력 있는 무반 벌열 가문의 갈래는 아니었으 며, 정쟁의 화를 당하기도 하여 가세가 위축되었다. 그런 중에 구반이 승산리의 김해허씨 집안과 혼인하고 일찍 사망함으로써 그의 자손들이 승산리에 세거하게 된 것이다. 외가의 도움을 받으면서 3세대가 지나도 록 기반을 닦아 집안을 다시 일으켰다. 그러한 노력이 지금의 승산리 능성구씨 가문을 있게 하였다.
본 연구는 국내에서 창작, 출판된 아동 다문화문학 가운데 다문화 동화 20편의 내용을 인물, 갈등의 양상, 해결 방식, 다수자의 편견을 중심으로 분석함으로써 다문화 동화에 담긴 문제점을 고찰하고 개선 방향을 제시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하여 아동 다문화문학과 이데올로기의 관계를 이론적으로 고찰하고 다문화 동화의 개념 및 의미를 정의하였다. 아동 문학 및 아동 다문화문학에 대한 앞선 연구를 바탕으로 분석을 위한 내용 요소를 선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연구 대상 20편의 다문화 동화 내용 분석을 실시하였다. 분석 결과, 많은 작품에서 다문화가정 등장인물은 이국적인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었다. 이들은 외모 면에서 주류 한국인과 대비되며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주류 한국인의 경우 다문화가정 등장인물과 긍정적 관계를 형성하는 선한 인물과 부정적 관계에 있는 악한 인물로 양분화되어 나타났다. 갈등의 해결 양상을 분석한 결과 공감 능력이 뛰어나고 높은 도덕성을 지닌 인물이 갈등을 해결하는 전형성이 나타났다. 또한 많은 작품에서 소수자에 대한 주류 한국인 작가의 외부자적 관점이 드러났으며 출신 국가와 이주 목적에 따른 다수자의 편견과 고정관념이 여러 작품에 걸쳐 반복적으로 제시되었다. 다수자와 소수자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소통과 이해의 도구로 국내에서도 다문화 동화가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만큼 다문화 동화의 내용에 대한 검토와 연구를 통해 더 많은 질적 발전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엘리엇의 여성관은 늘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 특히 엘리엇의 전기적 사실이 부각되던 시기에는 그의 시에 등장하는 여인들을 여성혐오주의의 희생양으로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엘리엇은 모든 시의 출발은 사적 경험이라고 하였으니 시에 등장하는 여인들이 그의 삶에 등장했던 여인들과 불가분의 관계일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몰개성시론이 반증하듯 엘리엇은 사적 경험을 분석·해체하여 객관적, 보편적 경험으로 승화시키려고 일관되게 노력하였다. 비록 시대적인 한계와 개인적인 편견에 기인한 가부장적 어조와 관점이 다소 남아있다 하더라도 엘리엇의 시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개인의 경험과 관점을 넘어선 시적, 상징적 인물로서 기능한다. 여기에 엘리엇 특유의 자기조롱 및 극적아이러니가 작용하여 이들 여인들의 성적, 젠더적 정체성을 중립화시키고 남성 등장인물과 공감할 수 있는 기반을 형성해 나간다. 엘리엇의 여인들은 여성으로서 보편적인 인간의 한 축을 대변하는 한편, 그들이 겪어내는 고통을 매개로 다른 한 축인 남자들과 연결되어 있다. 이 두 성적, 젠더 주체는 고통의 대상인 동시에 주체로서, 한번 해체되면 새로운 통합과 구원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닌다. 이 점에서 엘리엇의 여인들은 궁극적으로는 구원의 가능성과 희망을 염두에 둔 상징적 설정이다.
이 논문에서 소개하는 질적 사례 연구는 문학과 예술적인 소양을 가졌던 연구참여자가 중등학교 시절부터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면서 활성화되었던 인문 예술적 소양이 점차 이공계 분야에서 발현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IT 분야에서 일하는 한 명의 연구참여자(현웅)을 대상으로 초상화법에 따라 심층면담을 4회 실시하였으며 인물 사례 형태로 묘사하였다. 현웅의 삶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부분은 가족관계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그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 기독교 신앙이다. 두 차례의 이정표적인 신앙 체험을 통하여 그의 인문예술적 소양은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에 활짝 꽃을 피웠다. 기독교적인 메시지를 통하여 삶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으며 그 이후에 그가 가졌던 섬세하고 감성적인 글쓰기 소양이 논리적인 컴퓨터 프로그래밍 작업과 결합되었다. 이 인문 사례는 인문예술적 소양이 이공계적 전문성과 결합되는 통합적인 측면과 현웅의 내적 소양이 고차적 양상과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헬라 철학에서 유래된 영지주의 사상들은 초대교회시 이미 여러가지 초기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었으나 본격적인 사상체계를 갖춘 영지주의의 존재를 입증 할 수 있는 문서는 오늘날 까지도 없다. 다만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는 이 천년 기독교역사 가운데 강한 영향력이 있는 이교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어떠한 체계화를 통해 그런 지속성을 갖게 되었는지를 추론해 보고자 한다. 물론 각자의 독창성을 발휘하는 특색이 있었던 반면, 이러한 다양한 영지주의의 사상들을 관찰해 보면 어떤 패턴처럼 공유된 연속성을 이레네우스는 가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나름대로 다양한 영지주의 창시자들이 주장한 교리적 연속성과 특성들을 정리 하는 카달록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에 따르면 각양 기독교적 영지주의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모든 이교들은 싸이몬 마구스를 비롯하여 발단 되었으며, 싸이몬의 측근에서 메낸더가 그의 후계자로 등장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두사람은 각각 초창기 시절의 원동력을 일시적이나마 카리스마적인 구세주의 역할로 구심점을 이뤘다면, 다음세대의, 그리고 지속되는 영지주의란, 그 이상, 아니면 그 외의 것들을 갖추었을 때 지구력이 있는 종교로 서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 시점에서 케린투스가 주장하는 교리내용은 그 당시 신비적인 부분을 적당히 갖추었던 헬라 문화가 실질적인 신인관계를 표출하는 스토리라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케린투스가 영지주의를 다분히 지속성이 있는 종교가 되도록 했다면 결국 두 가지 중요한 패러다임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도케티즘의 구세주 (Docetic Savior) 와 영지주의적 부활 (non-bodily resurrection)이다. 영지주의에 있어서 이러한 패러다임의 가치는 그 뒤에 오는 싸터나이너스 와 벨렌티너스가 ‘divine spark’나 ‘divine seed’를 통해 영지주의적 부활을 설명 하고 있다는 것이며, 이러한 본격적인 영지주의로 전개 해 나가기 까지는 케린투스가 초석을 마련 했다는 점이다. 케린투스가 싸터나이너스에게 직접 영향을 미쳤다는 언급은 없으나, 이레네우스의 ‘이단반박’에 따르면, 두 사마리아 출신인 싸이몬과 그의 후계자 메낸더가 유사했고, 케린투스와 싸터나이너스는 소아시아의 동시대의 영지주의의 리더였으며, 그들은 유대교적인 뿌리의 특성을 갖춘 인간론, 도케티즘적인 기독론, 그리고 도덕적인 강조점 등이 있음을 볼수있다. 그외에 ‘사도서신’ 은 싸이몬 과 케린투스 두 사람만을 명시 하고 있는데, 싸이몬 이후의 케린투스의 비성서적 부활의 가르침을 경고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같은 입장을 강화하고 있다. 이와같이 케린투스의 독창적으로 계발한 두가지의 결과는 영지주의의 지속성을 기인 했을것 이라는 개연성을 갖는다.
이 글은 조선중기의 임진왜란 초기에 경상우도의 의병 봉기에 크게 기여하고, 정유재란을 당하여 고립된 황석산성에서 전직 군수로서의 직분을 지켜 순절하였던 대소헌 조종도가 한국의 인물사 내지 문화사에 있어서 가지는 의의를 점검하고, 역사 문화 인물로서 대소헌 조종도의 위상을 역대 문헌에 수록된 그 인물 형상의 특징을 통하여 개괄하고자 집필되었다.
본론에서는 먼저 대소헌과 관련된 문헌을 사망 직후의 애도를 표한 輓章과 祭文, 친지나 가문 기록으로서의 碑誌와 傳狀, 국가나 사림의 공식 추모 문자로서의 褒贈 追崇의 문자 등 세 층위로 나누어, 해당 인물에 대한 사적 애도와 공적 추모의 전개 양상을 점검하고, 다음으로 이들 문헌에 빈번하게 나타내는 인물 형상의 특징적인 징표를 大笑子와 烈丈夫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요약하고, 그 인물 형상의 성립 정착 과정을 추적하는 한편, 이 두가지 징표가 가지는 인물사적 문화사적 의의를 간략하게 추론하였다.
결론에서는 대소헌 조종도가 남명 조식의 문도로서 학문을 성취하여 통달한 식견과 활달한 처신 및 왜란 도중 의병을 일으켜 국난에 헌신하고 황석산성에서 대의를 지켜 죽음을 감수한 행적으로 인하여, 그와 교유한 당대의 지인들은 물론 후대 사대부 지식인으로부터 대대로 추숭되고, 조정과 사림으로부터 누차 포증을 받아, 조선왕조의 역사에 있어서 유가 의리와 신념에 충실하여 죽음을 사양치 않은 인물 전형의 하나로 각인되었다고 논평하였다.
본 연구는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멀티미디어 정보 환경 중에서도 미국 방위산업체 정보기관의 감시 카메라 속 특정 인물을 색출하는 작업 상황을 가정으로, 사용자가 방대한 영상 데이터 기록물들 가운데 원하는 정보를 한 눈에 분석하고 검색해 낼 수 있는 효율적이고 만족스러운 멀티미디어 검색 환경에 대해 연구하였다. 이를 위해 첫 번째 실행된 실험에서 CAVE형 가상현실 공간 인터페이스를 검색환경으로 제안하고 데스크톱과 CAVE형 공간 인터페이스를 비교 평가하였다. 이 실험에 사용한 콘텐츠는 각 과제에 최적화되어 개발된 소프트웨어들과 데이터베이스를 사용하였다. 두 번째 실험은 CAVE형 가상현실 공간 인터페이스에서 검색의 효율을 높여주는 입력시스템에 대한 연구를 실행하였다. 특히, 인간의 움직임에 보다 가깝게 디자인되어 자연스럽게 조작할 수 있도록 설계된 제스처 입력시스템을 중심으로 CAVE형 가상현실 인터페이스에 적합한 3가지 입력시스템을 사용하여 검색 후 각 과제들에 대한 선호도와 만족도를 측정하였다. 또한 각 과제별 검색 수행 시간을 측정하여 효율성 높은 입력시스템을 분석하였다.
The poems of Wangsogun. had been written by many Korean, Chinese, and Japanese poets in ancient time. Today we can discover several different aspects from the their contents. On this parer, I would like to introduce the particular points of three nations' poems in which Wangsogun's life was divided in six terms.
The first, I am interested in how poets of each nation described Wangsogun, before she left the court of Han(漢) in old time of China. In the poems, poets of three nations commonly told it very sadly at that time. However Japanese and Chinese poets did not say about it as sad as Korean do. It is very interesting thing that Korean poets sang the fact distinctly. Probably, in Korea the birth and growth of someone are accepted as an important thing than any other country.
The second. Wangsogun had lived unhappily in the court of Han, because she didn't be recognized by Woenhe(元帝), the Emperor of Han. Among the poets of Japan and China, this problems were not accepted as a large issue except of Korea.
The third, it was really miserable thing for the poets of three countries in ancient East Asia to describe the fact that Wangsogun departed for Hyungno(匈奴). Especially, In Japan, this subject of Wangsogun's poem, was accepted more serioulsy than the other countries.
The fourth,it caused variety problems why Wangsogun had to be married to Hohansa(呼漢邪), the king of Hyungno. The poets of three nations generally explained that Wangsogun wanted to go there by herself, but that reason was different from each other country.
The fifth, the life of which Wangsogun had lived in Hyungno, implicated lots of means in Chinese poems. In historical materials, it was treated very importantly whether Wangsogun was married to his son or not. But, in the poems, many poets of three countries criticized about incapability of Han dynasty.
The sixth, at this part, I try to understand the reaction of poets who wrote the Cheongchong(靑家), Wangsongun's tomb. Many Korean, Chinese and Japanese poets sang the Wangsogun's conduct through description of Cheongchong. Especially Korean poets described the mood of Wangsogun's tomb less than Chinese poets. This aspect was caused from Korean poets had not have many opportunities to see the Cheongchong.
On the above, Icompared three nations ancient poems which told the life of a woman who lived in the court of Han, and was married to Hohansa. We realize the fact that poets of three nations described the life of Wangsogun in various sides of hteir various versions. In many cases, Chinese poets sighed at the tragic fate of their own country, Korean expressed the sorrow of themselves through the Wangsogun's poems, and Japanese sang the grief of Wangsogun who had to go to Orangkae(胡)'s reg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