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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9세기 영남 학계에는 李滉 이후 전통적으로 이해되어온 ‘心은 理氣가 합해 있다’는 설을 굳게 지키는 학자들이 아주 많았다. 이러한 학계의 경향에 정면으 로 맞서 李震相은 心卽理설을 제창하였다. 이진상의 제자인 郭鍾錫은 당시 영 남학계에서 ‘異端’으로 비판받았던 스승의 心卽理설를 잘 계승하여 변호하고 발전시켰다. 곽종석은 心學의 요체인 知와 敬에 매우 주목하였다. 그는 情(사단칠정)이 發 할 때에 知와 敬이 그 情의 발함을 主宰한다고 보았다. 知와 敬에 대한 그의 깊 은 탐구는 어려운 시대를 구제해나갈 이론을 眞知와 實踐이라는 두 측면에서 확보하려는 학문적 노력으로 이해된다.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곽종석이 明德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당시 학계에서 명덕을 心으로만 이해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였다. 그는 명덕은 心과 身, 性과 行을 포함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는 명덕 을 心이라고만 해버리면, 󰡔大學󰡕의 八條目 중 ‘正心’에서 ‘明德’을 밝힌다는 일 이 마쳐지게 되어버려 그 뒤에 이어지는 ‘修身’은 혹처럼 붙어 있는 것이 된다 고 하였다. 그는 명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세계 각국의 사상과 문화를 수용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런데 19세기 말부터 곽종석은 서구의 公法과 哲學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나타내었다. 서구의 공법과 철학과 과학에 대한 그의 관심의 증대와 더불어, 1919년에 그의 理學은 조선의 독립과 평화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변모하였다. 그는 仁義에 근거한 공법질서와 功利의 私心이 없는 서구의 철학과 그것에 토 대를 둔 서구과학을 인정하며, 하루빨리 조선의 독립과 평화가 성취되기를 바 랐다.
        2.
        2006.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金鎭祜는 경상도 단성의 商山金氏 가문에서 1845년에 태어나 1908년까지 활동한 학자였다. 단성의 상산김씨는 조선 중기에 이미 ‘八文章家’가 배출되어 영남의 名家로 알려졌다. 19세기 중반에 상산김씨 문중 書齋인 仁智齋는 김씨 문중의 家學의 산실이자 강우학계의 학술문화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김진호는 인지재에 소장된 수많은 책을 자유롭게 볼 수 있는 교육환경에서 자 랐다. 김진호는 17세부터 박치복의 문하에서 詩文을 배웠고, 이어 허전의 문하에서 禮學을 익혔다. 우선 그는 스승 박치복이 운영하던 百鍊齋에서 70여명의 강우 학자들과 함께 공부하였다. 그 뒤 그는 麗澤堂을 지어 박치복과 함께 講學활동 을 하였고, 박치복이 작고한 이후에는 그가 이택당을 맡아 후진을 양성하였다. 또한 그는 허전의 문하에서 禮學을 배웠는데 禮를 해석함에 있어 人情의 측면 보다는 義理의 측면을 더 강조하는 경향을 띠었다. 19세기에 강우학계의 학자들은 조선이 처한 위기를 理學을 새롭게 해석하여 극복하려고 하였다. 김진호는 理氣說에 있어 스승 이진상의 학설을 계승하여 七情도 理가 發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김진호는 明德을 心으로 이해하 여 명덕은 理이지 氣를 겸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이러한 김진호의 다 양한 주장은 19세기 당시 조선이 처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禮學이나 理學을 義理중심으로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3.
        2001.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is study examins the prestigious scholarship genealogy and trend of scholars who lived in the right side of Kyungsang province in the 19th century. In the right side region of Kyungsang province in 19th century, Lee Jin Sang(李震相) and Kwak Jong Seok(郭鐘錫) overtured the theory that the mind(心) is just Li(理). The theory criticized an old theory that the mind includes Li and Ki(氣) or the theory that the mind is just Ki. The theory is unique on the basic understanding that the mind is ruling Li and put an emphasis on the reality of the mind. The theory is for the quest of an answer in the Ki-centered theory(主氣說) which dominated the period. In the later half of 186, the right side region of Kyungsang province accommodated many other theories from another regions. First of all, Huh Jeon who is from Pocheon Kyunggi province promoted the scholarship trend of right side of Kyungsang province and the studies of etiquette. In addition to that the Li-centered theory(主理說) which was suggested by Ki Jeong Jin from Jeol la province was actively accepted. The scholars from right side region of Kyungsang province also accepted Lee Hang Lo's Li centered theory. Thereby the scholars who lived in the right side of Kyungsang province united themselves setting them free from Confucian party oriented mind or scholarship genealogy. The scholars who live in the right side of Kyungsang province held many seminars. And they also held Hyangeumjurye(鄕飮酒禮 : banquet for identifying young and old). In Sancheong. 1877, seminar and banquet were the example in case. By taking this opportunity, the scholarship trend of promoting Nam Myeong(南冥 : representative Confucian scholar) vividly revived. Also by taking the chance, the scholars who lived in the right side of Kyungsang province newly established their theory and set to put their best effort to promote and research the meaning of Nam Myeong' philosophy. In te following year, they held seminar at Seon Seok temple(禪石寺) in Seong Ju. The meeting also has an important meaning to unite the scholars who live at the right side of Kyungsang province. The seminar and scholar's activity at the right side region of Kyungsang province in the 19th century has greatly contributed to the confucian independent movement by uniting representative of confucian scholars all through the nation in 1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