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의 연구대상은 서예의 이론적 개념이지만 연구방법은 창작과정의 경험을 바탕으로 노봉(露鋒), 장봉(藏鋒), 과봉(裹 鋒)의 운필(運筆)에 대한 분석을 집중적으로 했다. 노봉은 이왕(二王) 위주의 전통적인 ‘첩파(帖派)’에서 주로 사 용했는데, 이는 위진(魏晋)시기에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장봉과 과봉은 모두 장봉에 속하지만 두 가지 측면에서 차이 가 있다. 첫째, 여기에 말하는 장봉은 필봉을 드러내지 않고 붓 을 대어 쓰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안진경으로 대표되는 전 주(篆籀) 필의가 이러한 용례이다. 그러나 과봉은 글씨를 쓰기 전에 필봉을 거꾸로 감싸서 글씨를 쓸 때 필봉의 마찰력을 증 가시키기 위한 방법이다. 따라서 장봉과 과봉은 붓을 다루는 동작과 목적에서 모두 큰 차이를 보인다. 둘째, 시간적으로도 차이가 있다. 장봉은 주로 장욱과 안진경 이후에 유행했으며, 중국서예사에서 여전히 ‘첩파’의 서풍에 속한다. 그러나 과봉은 청나라 ‘비파(碑派)’에서 주로 유행했으며, 과봉은 ‘비파’의 주요 한 용필법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선행연구에서 비파와 첩파의 심미기준이 대립되어 양쪽이 경쟁한다고 생각하지만 필자는 비파의 심미기준과 품평 언어는 이전의 첩파 심미안을 토대로 보완하여 확장했다고 주 장한다. 서예의 발전은 기존에 형성된 최고의 기준을 계속해서 변형하고 재성장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중국 서예사에서 안진경(顏眞卿, 709-785)의 위상은 오랜 세 월동안 점진적으로 제고됐다. 당송시기, 명 말기, 청대의 3단계 발전과정이 있었는데, 당송시기에는 안진경의 인격을 추앙하고, 명 말기와 청대에 비학(碑學)이 출현해 안진경의 서예가 본격 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됐다. 이러한 서예 내면의 작품적 영향력과 서예 외면의 사회적 영향력이 작용해 안진경의 서예 가 당대에 높은 지위를 얻는 토대가 된 것이다. 본고에서는 연구범위를 당송시기로 한정하고 송나라 때에 안 진경의 서예를 추존한 [미]에이미 맥네어(AmyMcNair)의 중정 지필(中正之筆)에 대한 관점을 집중적으로 토론해 다음과 같 이 유의미한 결론을 도출해 냈다. 먼저, 안진경을 추존하는 사조는 만당(晩唐)시기로 거슬러 올 라간다. 안록산의 난 이후에 당시 사대부들은 ‘중정(中正)’에 대 한 관심을 갖고 서예에도 이를 반영하기 시작했다. 둘째, 송나라 문인들의 안진경에 대한 추존은 여전히 당나라 사대부들의 논조를 계승해 ‘그 글씨(其書)’보다는 ‘그 사람(其 人)’을 더 중시했다. 셋째, 안진경 서예의 위상 제고는 문인 집단의 구조적 변화 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송나라 문인들이 안진경의 서예를 최 상으로 했다는 관점은 후대에 의해 크게 과장된 것이다. 이상과 같이 본고의 고찰을 통해 당송시기 안진경의 영향력 제고에 대한 원인과 변화양상을 이해하는데 일조가 됐으면 한 다. 부족한 부분에 대한 독자의 많은 질정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