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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09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글은 석성에서 토성으로 개축 시 양상을 설명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며, 행주산성을 대 상으로 하였다. 이 산성은 삼국시대에 테뫼식 석축산성-석성 1-으로 축조된 이후 다양한 부 속시설이 설치되었다. 고려시대에는 토성-토성 1-으로 개축되었으며, 이후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석성-석성 3-으로 개축되었음이 밝혀졌다. 행주산성의 석성 1은 덕양산과 서쪽 사면의 8~9부 능선을 두르는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축성되었다. 외벽에는 1~2차례의 수축이 이루어졌으나 적극적인 생활면의 변화는 확인되 지 않는다. 이후 북서벽에 치 1이 가축되었다. 서벽 북쪽의 트렌치 토층을 분석하면 석성 1 외부를 단상으로 굴착한 부분과 외황이 매몰되고 일정 부분 대지가 조성되었다. 보축성벽과 치 2가 가축되면서 북동쪽 성우과 서벽 외부에는 비교적 넓은 평탄지가 조성 된다. 성 내부는 구지표를 절개한 후 1열의 내벽이 축조되었다. 이와 연동하여 생활면은 2차 례 정도 높아졌고, 각각의 상면에는 기와와 점토를 혼합하여 다졌다. 이후 남서벽에 석성 2 와 치 3이 축조되었으나 성 내부의 생활면 변화는 알 수 없다. 석성이 폐기된 이후 서쪽과 남쪽으로 확장된 포곡식의 토성이 축조되었다. 북동쪽 성우 의 성벽은 석성 1의 붕괴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마감된다. 이 부분의 남쪽은 토성벽이 보이지 않다가 동벽에서 토성 1이 확인되는데, 토성으로 개축된 이후에도 석성을 활용하였 음을 알 수 있다. 일정 기간이 지난 후 북동쪽 성우와 남동벽에 치가 가축된다. 기저부의 양 상으로 보아 토성 1과 공정상의 차이로 보기 어렵고, 당연히 생활면의 변화가 감지된다. 토 성 2가 축조되는 시점에는 생활면이 상당히 높아졌으며, 성 외부의 지형은 굴곡을 이루고 있었다. 이후에는 토성이 폐기된 이후 퇴적층 상부에 석성 3이 축조됨으로써 생활면의 변화 를 유추할 수 있다. 따라서 행주산성은 테뫼식 석성으로 축조된 이후 포곡식 토성, 마지막으로 석성으로 개 축되었다. 이에 연동하여 생활면은 지속해서 높아짐을 알 수 있다. 한편, 토성에 대한 기왕의 연구는 성벽을 축조한 이후 유지가 어려우므로 내ㆍ외피 토루 를 설치해야만 붕괴를 방지할 수 있다고 알려져 왔다. 하지만 토성 1의 성벽은 초축 당시 최 소 300㎝ 이상이었다. 내ㆍ외피 토루 없이 유지되었음이 밝혀졌으므로 토성에 대한 개념을 재검토해야 하는 자료를 확보하였다. 이 글의 대상인 행주산성 성벽의 구조와 구지표의 변 화는 다른 성곽 조사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성곽에 대한 조사를 진행할 경 우 성벽의 구조와 더불어 경관의 변천(성벽의 수·개축과 구지표의 변화 등)을 파악하는데,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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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2.05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고에서는 경남지역 통일신라시대 토성 중 시굴 및 발굴조사와 발표자가 지표조사상에서 확인된 성곽을 중심으로 이 시기 토성의 특징과 축조주체 및 목적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제까지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통일신라시대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시기 경남지역은 이전 시기와 달리 왜구의 방어를 중점을 둔 축성이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양상은 조선시대까지 변함없이 이어졌다. 통일신라시대 토성의 특징 중 가장 두르러지는 것은 해안가에 집중적인 축성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안정적인 해로의 통제와 대 왜구 방어에 중점을 둔 축성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리고 토성의 규모는 길이900∼2,000m 사이의 토성들이 바닷가와 내륙 등 다양한 위치에 축조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길이 약 900∼2,000m 사이의 토성들이 주로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경남지역 통일신라시대 토성들은 모두 내․외벽 기저부에 기단석렬을 배치한 뒤 성벽을 쌓았다. 기단석렬은 평행한 것과 사직선을 이루는 것으로 나누어지지만 시기성을 적극적으로 반영하지는 못한다. 또한 영정주 간격 역시 정형성을 찾기 힘들 정도로 다양하다. 주목되는 점은 기존에 알려진 것과 달리 영정주를 중심으로 좌․우의 판축토가 동일한 것과 판이하게 다른 것으로 나누어지는데 판축토가 달라지는 양 끝부분을 한 구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것이다. 토성벽의 내․외부 퇴적토에서 출토되는 다량의 기와편들은 성벽의 구조를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는 가정하에 4가지 정도의 가능성을 검토해 본 결과 와적여장 및 성벽 상부 덮을 때 사용하는 개와였음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 토성의 축조주체는 신라사회의 변화 궤를 같이하므로 축조주체 역시 변하였을 것이다. 즉 삼국통일 후에서 9C 전반에서 중반 정도까지는 중앙 정부의 영향력이 강하였다고 생각된다. 그 이후 호족들의 세력이 커지는 9C 후반에서 10C 초반에는 새로운 토성을 축성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기존의 토성을 최대한 활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토성들은 고려시대 초 조운제가 운영되면서 최대한 활용되었으며, 토성이 축조되어 있지 않은 지역은 새로운 축성을 통하여 안정적으로 해로를 통제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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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1.05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성곽의 축조는 당대의 토목기술과 관념(정치상황과 국가간의 관계)을 반영하므로 동일한 시기에 축조된 성곽들은 유사한 축조수법과 형태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러한 양상은 창녕지역에도 동일하게 나타날 것이다. 본고에서는 창녕지역 성곽 중 낙동강 연안에 축성된 성곽에 대한 지표조사를 바탕으로 확인한 속성들을 분석한 결과 낙동강 동안에 위치하는 성곽들은 5세기에서 6세기 초반경 재지세력에 의해서 축조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낙동강 연안의 성곽들의 특징 및 성격은 첫째, 낙동강과 지류가 합류하는 지점에 축조된 성곽들은 200m 이하의 소형인데 반해, 창녕지역으로 진출하기 유리한 지점의 성산산성과 웅곡리산성, 그리고 낙동강 중류역이 한눈에 조망되는 지점의 구진산성은 대체로 400~600m로 대형에 속하지만 경남지역에서 확인되는 신라산성 중 규모가 소형인 산성과 비교하면 비슷하거나 소형에 해당된다. 따라서 낙동강 연안에 위치하는 성곽의 규모로 보아 낙동강을 적극적으로 통제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낙동강 연안 성곽의 축조수법은 토성과 석성으로 나누어지며, 토성의 비율이 높다. 토성의 정확한 축조수법을 파악하기 힘들지만 이 시기에 축조된 다른 토성들의 축조 수법을 감안할 때 순수판축 토성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석성의 경우 허튼층쌓기에 가깝게 축조하였으며, 자연암괴가 노두된 부분은 성벽을 쌓지 않음으로써 공력을 줄였다. 이러한 양상은 전형적인 신라성곽과는 차이를 보인다. 상기의 내용으로 보아 낙동강 연안에 축조된 성곽들은 낙동강 동안에 위치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이 시기 신라의 영토 확장과 관련된 지역에 축성된 신라성곽의 특징과 부합하지 않으며, 신라에 의해서 축조되었다는 근거 역시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따라서 낙동강 동안에 위치하는 대부분의 성곽들이 신라에 의해서 축조되었다는 견해는 수정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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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4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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