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에게 가장 일상적인 시각 대상이었던 대지와 하늘, 바닷가와 강가의 산과 모래밭, 그리고 숲속의 오솔길, 그 길가에 여기저기 서 있는 크고 작은 나무들, 개울에 흐르는 잔잔한 물소리, 가끔은 크고 작은 자갈에 부딪히는 소리들은 우리에게 맑은 숨을 쉬게 하고 작은 힘을 솟게 해주었다.
겨울 산과 여름 산의 정서가 다름은 우리가 자주 느끼는 일이다. 바다에 있는 산은 작게 보이고 강가에 있는 산은 크게 보인다. 사람이 서서 볼 수 있는 거리 때문이겠지만 우리에게 주는 정서 역시 제각기 다르 다. 특히 여름철 해질 무렵 연한 보랏빛 석양에서부터 검 짙은 갈색으로 변할 때까지 지켜본다는 것도 자연의 일부분을 충분히 경험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파트로 둘러 싸여 있어 그런 기억들이 2차원의 공간에서만 볼 수 있는 먼 추억이 되어버렸다. 2차원 공간? 우리는 3차원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2차원 공간이 생소하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생활 속에서 2차원 공간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책, 사진, 문서, 벽면 등등.
그러나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것도 중요하지만 3차원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생홣 밖의 일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상상, 공상, 환상, 망상, 그리고 창의적 발상의 요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은 각자 다를 수 있다. 이를테면 글자로 쓰는 것, 선으로 그리는 것, 색으로 칠하는 것 등등. 최초의 원시인도 기계문명시대에 사는 현대인도 하기 힘든, ‘인류의 유산’으로 남겨놓은 것들을 우리는 알고 있고 볼 수도 있다. 암각화, 벽화, 골각화 등등.
캄캄한 동굴 안에, 거대한 암석에 그러한 그림들을 그린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무슨 도구를 사용했으며 누구를 향한 절규였을까. 필경 목숨을 걸고 그런 일을 했다면, 생각할수록 더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필자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나이가 많아서 할 일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도 괜찮다. 왜냐 하면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은 이러한 역사적이거나 철학적인 얘기를 꺼내면 밥 맛 없는 소리 한다고 치부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잘 모르고, 우리 역사를 잘 모르고, 인류의 역사를 잘 몰라도 우리는 잘 먹고 잘 살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철학에 물리적 실체가 있다면 아마 예술이라는 걸로 표현될 것이다. 어떤 모습, 무슨 색깔, 무슨 구상이 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오롯이 작가 자신일 것이다. 관람객이 작품을 그저 쓱 쳐다본다면 그 작품은 같은 위치와 같은 장면만 보여준다. 관람객의 사회적 위치나 시선과는 상관없이 민 낮의 정서로 그 사람 과 마주친다. 그러면 관람객은 그림 속의 사심을 자기의 마음으로 하나씩 벗겨낸 다음 맨 마지막으로 보 통 이렇게 이야기 한다. “이게 뭐야? 나도 할 수 있겠다!” 그러고는 종종걸음으로 작품 앞을 떠난다.
동일한 시간에 올실 안의 풍경과 문 밖 강가의 풍경이 다를지라도 생명의 리듬은 같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물풀에 잠시 앉아 있는 까만 잠자리나 빨간 고추잠자리가 하는 일은 같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구상에 모든 생명은 ‘질서’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잘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