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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흔히 왜관요(倭館窯)란, 17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일본 쓰시마번[對 馬藩]이 경영하던 가마를 말한다. 그 당시, 쓰시마번은 왜관(倭館)에서 다기(茶器)를 만들어 권력자들에게 바쳤다. 이 글은 고관(古館)이라고 도 하는 왜관에 1639년부터 1678년까지 설치된 가마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였다. 고관은 지금 부산 동구 수정동에 있었다고 하는데, 어디에 가마가 있었는지 오랫동안 의문 속에 있었다. 근대기의 기록 등을 살펴보면, 고관 공원(古館公園) 옆자리에 있었다는 기사가 있다. 이를 근거로 한 현지 답사의 결과, 가마의 위치가 지금 803번지 일대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 었다. 가마터는 완전히 파괴되었으나 이 가마는 고관과 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관 가마에서 제작된 유물도 역시 오래된 의문점의 하나이다. 대마도 킨세키죠[金石城] 유적에서는 576점의 다완편이 출토되었다. 하한 연대는 성의 기능이 새로운 성에 옮기게 된 1678년경이 될 것이다. 이 때, 대마도에 가마는 없고 아마도 이 파편들이 고관에서 제작되었을 것 으로 생각된다. 사료에 따르면, 양산, 기장 등이 왜관요에서 일하던 사기장의 파견지 이었다. 킨세키죠에서 출토된 백자는 유태(釉胎)나 굽의 형태, 받침 등 이 양산, 기장과 상통된다. 이를 하여금, 고요에서 지방 사기장의 기술 을 바탕으로 하여 제작 활동이 이루어진 것을 증명해준 것이다. 분청사기를 모방한 파편도 있는데, 당시 일본 다른 가마에서도 분청 사기를 모방하였다. 1610년대 이후에는 고관 가마나 일본 가마나 마찬 가지로 ‘원전(原典)’에 충실하려는 의도가 높았다. 그러나 쓰시마번만 말 그대로 ‘원전’, 즉 가마 자리나 사기장까지 ‘원전’을 지향하는 것이 가 능하였던 셈이다. 많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쓰시마번이 부산에서 가마를 운영하던 이유는 바로 다른 일본 藩과 달리 권력자에게 ‘원전’을 내세워 이익을 얻으려 하였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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