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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3.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4,300원
        2.
        1992.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4,000원
        3.
        2016.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사숙재(私淑齋)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이 편찬한 진산세고(晉山世 稿)를 보면 이 집안에서 대대로 많은 인물들이 문과에 급제하고 문집이 편찬되 었음이 확인된다. 이를 보면 진주강씨 공목공파가 고려말 조선초의 대표적인 문벌임이 확실하다. 공목공파(恭穆公派) 선조 가운데 문장으로 가장 뛰어난 인물이 강희맹인데, 그가 1483년 2월 18일에 세상을 떠나자, 성종이 곧바로 그의 문집을 편찬하라 고 명하였다. 『사숙재집(私淑齋集)』을 어명으로 편찬케 한 것만 보아도 조정에 서 그의 문장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조선왕조는 사대교린(事大交隣)을 외교의 근간으로 하였으므로, 과거시험을 통해 사대교린에 필요한 문장가를 선발하였다. 강희맹의 활동과 문학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많은 시를 지었고, 문화교류에 앞장섰다는 점이다. 중국 문인들이나 조선 문인들이 그의 조천시(朝天詩)에 많이 차운하여 문화교류의 전범을 보였다. 더군다나 대를 이어서 중국에 다녀오고 그 체험을 기록으로 많이 남긴 것은 다른 집안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진주 강 씨 문중의 특징이기도 하다. 조선 초기의 문벌인 공목공파 문인들의 한시가 한 시의 고향인 중국에서 그 진가를 발휘했던 것이다. 진주강씨 문인들이 북경에 갈 때에는 선조의 조천록이나 연행록을 가지고 가서 참조했으며, 선조의 시에 차운하여 시를 지었다. 선조가 길을 안내하며 함께 시를 주고받는 동반자가 된 셈이다. 강희맹은 형 강희안 덕분에 시를 짓기 전부 터 명나라 문인들에게 인정받았으며, 사행에도 성공하여 상을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그는 농사와 원예에 관심이 깊었으므로, 중국에서 연꽃 씨와 버드나무 가지를 들여와 조선에 퍼뜨렸다. 오백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조천 활동의 자취가 남아 있는 것이다. 진주강씨 종친회에서 선조들의 조천록과 연행록 10여종을 모두 번역하여 진주강씨 연행록집성을 출판하면 학계의 연구에 도움이 될 뿐만 아 니라, 국제적으로 활동했던 진주강씨 선조들의 문장과 업적이 널리 선양될 것이다.
        4.
        201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자신의 학문을 이루기 위해 외국에 유학갈 수가 없었으며, 자신의 연구업적을 외국 학자들에게 알리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삼국시대에는 중국이나 인도의 승려들이 삼국에 들어와 불교를 전파하였고, 신라의 승려들도 중국이나 인도까지 유학하였다. 고려 때에도 원나라에서 주자학을 받아들였으며, 고려 학자들이 북경 만권당에서 원나라 학자들과 학문을 토론하였다. 그러나 명나라가 건국되면서 쇄국정책을 실시하여 학자들의 교류가 거의 없었다. 진암(眞菴) 이병헌(李炳憲, 1870-1940)은 시대가 바뀌면 학문도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강유위(康有爲)에게서 공자교(孔子敎)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학문을 외국에 알리기 위해 다섯 차례나 중국을 드나들었다. 조선왕조와 청나라가 모두 망한 20세기초에 주로 활동한 학자이기에 쇄국시대인 조선후기 학자들과 같은 선상에서 비교할 수는 없지만, 교통과 통신이 발전한 20세기초에도 이병헌만큼 열심히 국제화에 앞장선 학자는 많지 않았다. 이병헌의 아들 이재교(李在敎)도 아버지 이병헌의 학문을 외국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케임브리지대학 동아시아도서관에 소장된 한국 고서 가운데 ‘Wade collection 5종’, ‘Aston collection 17종’, ‘선교사들이 기증한 초기(1890-1901) 성경 collection 62종’ 외에 수집 경로가 분명한 책은 이재교가 1959년에 영어 편지와 함께 기증한 『역경금문고통론(易經今文考通論)』 1종 뿐이다. 이 책 안에는 이재교가 도서관에 보내는 편지 이외에, 이재교가 지은 「경고유교연구동지(敬告儒敎硏究同志)」라는 글도 들어 있었다. 이병헌이 「읍고조선십삼도유림동포(泣告朝鮮十三道儒林同胞)」와 「경고역내동포유림(警告域內同胞儒林)」이라는 글을 써서 자신의 학문을 조선 유림들에게 널리 알렸는데, 이재교도 같은 방식으로 외국 학자들에게까지 편지를 보내어 공자금문경학(孔子今文經學)을 국제적으로 널리 알리려고 애썼다.
        5.
        2012.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산문 몇 편만 알려졌던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의 시문집이 발견되었다.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는 흑산도와 강진으로 유배된 뒤에 자주 시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번에 소개하는 『여유당집(與猶堂集)』은 두 형제가 이 시기에 지은 글들을 수집하여 필사한 책인데, 여기에 실린 글 가운데 「송정사의(松政私議)」를 제외한 정약전의 글들은 지금까지 소개된 적이 없었다. 『여유당집』의 첫 부분 「여유당집」에는 정약용이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上仲兄書)가 9편 실렸다. 그 뒤에 실린 「잡설(雜說)」은 정약용이 강진 유배생활에 대한 보고서를 정약전에게 보내자, 정약전이 그에 화답하여 지은 것인데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실리지 않은 글도 있다. 두 번째 부분인 「여유당시집(與猶堂詩集)」에는 정약용이 강진에서 지어 정약전에게 보냈던 시 22제(題) 37수(首)가 실려 있다. ‘이하 손관(以下 巽舘, 가칭 정약전시문집)’에는 정약전이 지은 시 32제 40수가 실려 있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보면, 「여유당집」과 「여유당시집」· ‘이하 손관(가칭 정약전시문집)’을 함께 필사한 편집자는 강진의 정약용이 흑산도의 정약전에게 보낸 시문과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지은 글들을 함께 편집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정약용과 달리 정약전은 섬의 어부나 나무꾼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지냈다. 또 이들과 시를 주고받기도 했다. 정약용은 그곳 주민들을 ‘오랑캐 같은 섬사람’이라 표현했지만, 정약전은 나무꾼 고기잡이들과 기쁘게 친구가 되었다. 왕조실록에 나오는 흑산도는 대부분 유배지였는데, 유배 온 문인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섬의 자연을 노래하였을 뿐, 그 섬의 사람들과 어울려 시를 짓지는 않았다. 자신과 섬을 별개로 여기고, 자신은 잠시 있다가 떠날 존재로 인식한 것이다. 그러나 정약전은 흑산도와 하나가 되어, 흑산도를 문학의 현장으로 승화시켰다. 『玆山魚譜』가 어부들과 함께 쓴 물고기 생태학 보고서이고, 「송정사의(松政私議)」가 나무꾼들을 위해서 제출한 정책건의문이라면, 정약전 시문집은 어부나 나무꾼들과 친구가 되어 주고받은 흑산도 16년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다.
        6.
        2007.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鶴山樵談󰡕은 許筠(1569~1618)이 25세 되던 1593년 강릉에서 기록한 시화 집이다. 鶴山은 허균이 이 시화를 저술하던 시기에 머물렀던 愛日堂 북쪽에 있 는 靑鶴山이다. 󰡔학산초담󰡕 後記에서 애일당이 있는 뒷산의 이름을 따서 蛟山 子라는 호를 처음 썼다. 허균은 아직 문과에 급제하기 전이라 ‘청학산 나무꾼의 이야기’라는 정도로 겸손하게 책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필자가 현재까지 확인한 󰡔학산초담󰡕 이본은 6종이다. 이인영의 장서인 淸芬 室文庫에도 󰡔학산초담󰡕이 소장되어 있었지만, 현재 행방을 알 수 없다. 李仁榮 은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하던 1937년부터 고서를 수집했는데, 희귀본 540종의 해제를 작성하여 1944년에 󰡔淸芬室書目󰡕을 탈고하였다. 그가 소개한 󰡔학산초 담󰡕의 서지에 「寒皐館外史題後」를 인용 소개하였지만, 출전을 󰡔담정유고󰡕라고 밝힌 것을 보면 󰡔한고관외사󰡕에서 전사한 것은 아닌 듯하다. 10행 24자라는 필 사형식도 다르다. 현재 확인된 6종 가운데 규장각 소장본만 단행본이고, 다른 5종은 叢書에 실 려 있다. 가장 오래된 본은 이장재가 1790년에 편찬한 󰡔청구패설󰡕에 실려 있다. 󰡔패림󰡕이 일찍 영인되어 널리 알려졌지만, 김려가 편찬한 󰡔한고관외사󰡕도 󰡔패림󰡕 보다 시기적으로 앞선 총서이며, 󰡔패림󰡕은 󰡔한고관외사󰡕와 󰡔창가루외사󰡕를 저본 으로 해서 편찬했다. 󰡔패림󰡕에 실린 󰡔학산초담󰡕은 당연히 󰡔한고관외사󰡕를 베낀 것인데, 내용과 형태가 같을 뿐만 아니라 글자의 위치까지도 그대로 베꼈다. 그 러나 󰡔패림󰡕본에 빠진 구절들이 󰡔한고관외사󰡕본에는 온전하게 실려 있다. 󰡔한 고관외사󰡕본을 놓고 필사하는 과정에서 빠진 것이다. 󰡔대동패림󰡕본은 35칙만 필사되어 자료적 가치가 적으며, 장서각본도 󰡔청구패 설󰡕본이나 규장각본과 같은 내용이어서 자료적 가치가 적다. 󰡔청구패설󰡕에 실린 󰡔학산초담󰡕이 가장 앞선 본이기는 하지만, 주석이 정연하 기로는 󰡔한고관외사󰡕본을 따를 수 없다. 欄上의 기록이 덧붙긴 했지만, 체제가 정연하지 않다. 현재 확인되는 이본만 놓고 본다면 夾注는 김려의 󰡔한고관외사󰡕 에 실린 󰡔학산초담󰡕에서 시작되었으니, 김려가 정본을 만드는 과정에서 협주를 붙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더 많은 이본을 확인한 뒤에야 확실히 판단할 수 있다. 필사 습관에 따라 다르게 쓴 글자들은 선본 확정에 큰 문제가 아니다. 󰡔패림󰡕본이 󰡔한고관외사󰡕본을 충실하게 전사했지만 몇 군데 잘못된 부 분이 있어, 현재로서는 󰡔한고관외사󰡕본이 가장 선본이라고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