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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고는 17세기 중반 소중화의식과 攘夷의 의지를 지니고서 6차 사행의 종사관으로 도일한 南龍翼이 일본을 바라본 시선을 「富士山歌」를 통해 살핀 것이다. 이 작품을 대상으로 한 이유는 이전의 부사산시에서 형상화된 거의 모든 심상들이 한 곳에 집약되어 있고, 그가 인식한 일본을 부사산이란 글감 속에 솔직하게 드러내어 문학적 투영 양상을 엿볼 수 있어서다. 그는 산의 위치, 외형, 정상의 눈, 魁踞를 큰 축으로 삼아 네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 논지를 전개하였다. 산의 위치에서는 서북보다 낮은 동남의 지형을 보충하려고 上帝가 부사산을 일본에 있게 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부사산을 서북에 종속시킴으로써 일본을 조선의 조력자나 교화의 대상으로 되게 하는 효과를 낸다. 일본이 武를 숭상하는 데 착안하여 시루 모양에 선계적 면모를 띤 산의 외형에서 ‘雄壯’을 읽어내었다. 부사산에 호의적 시선을 보이던 그가 정상의 눈을 대상으로 하자, 부정적 인식을 숨기지 않았다. 한랭한 눈 때문에 수목이 자라지 못하는 것은 산의 부덕으로 인해 인재를 배출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더구나 따스한 햇살에도 녹지 않는 눈이 마치 교화를 거부하는 夷狄의 교만함으로 비추어졌다. 눈에 기인한 부정적 인식은 산의 魁踞함으로부터 교화에 아랑곳 않고 멋대로 천자라 일컬은 尉佗의 僭濫함을 느낀 데서 극에 달한다. 尉佗의 僭濫함은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은 채 독자의 연호를 쓰고 천황의 존재를 둔 일본의 정치제도를 문제시하여 쓴 표현일 것이다. 부사산의 외형에서 선계로 보는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위치, 정상의 눈, 魁踞를 통해 부사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감추지 않았는데, 이를 통해 그가 일본의 문화 속에서 읽어낸 이적의 면모를 세밀하게 들춰내는 대신 부사산이라는 상징물 속에 문학적으로 형상해 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와 같이 그가 부사산에다 부정적인 인식을 투사한 이면에는 소중화의식에 근저한 양이 의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 작품이 일본 문사에게 주려고 지은 것이 아니라 부사산을 본 후 일본을 바라보는 자신의 생각을 기록한 것이니만큼 일본 문사를 의식할 필요가 없었기에 솔직할 수 있었다. 그가 부사산의 선계적 면모를 인정한 반면, 속으로는 부사산을 부정적으로 인식한다는 사실을 진솔하게 드러낸 것은 교린과 조선의 자존이라는 두 개의 가치 중에 조선의 자존을 발현하는 쪽으로 의식이 기울었기 때문으로 보아야 한다. 부사산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이전에 한 일본의 행태에 의해 부사산을 부정적으로 도색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혈기 왕성한 28세의 젊은이가 지었기에 그 정도가 심하였기는 하나 이것 역시 17세기 중반 조선 문사들의 부사산 인식의 일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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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7.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논문은 유가의 입장에서 사상을 달리하는 불가의 스님을 대하는 양상이 어떠하였는지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두 작품을 서로 비교한 것이다.두 작품은 中唐의 문인인 韓愈의 「送浮屠文暢師序」와 조선전기의 문인인 李陸의 「送日本僧聖津首座還國詩序」다.700여 년이라는 시간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유가로서 불가를 바라보는 시각을 공통적으로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우선 한유의 작품을 전범으로 설정하여 분석한 후,이륙이 그 전범을 모의하였는지의 여부를 작품의 내용을 대비하는 방법으로 밝히고자 하였다.분석한 결과,한유는 유가로서 불가를 대하는 데에 ‘이름이 유가면서 불가의 행동을 하는 자’와 ‘이름이 불가면서 유가의 행동을 하는 자’의 두 유형으로 나누고는 전자를 배격하고 후자를 승인하는 태도를 보였고,더 나아가 후자마저도 ‘이름이 유가면서 유가의 행동을 하는 자’가 되도록 요구하였다.그것은 불가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상대인 불가의 스님조차 인정하려 하지 않는 극단적인 입장이었다.이러한 한유의 견해는 유가의 도에 대한 자신의 논리를 전개한 「原道」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한유는 聖人의 道에 대비되는 불가의 교리가 인간을 夷狄이나 禽獸로 만드는 야만적인 것이라고 여겼기에 비판한 것이다.이러한 한유의 불가에 대한 인식은 왜구의 노략질로 골치를 썩어온 조선전기의 문인인 이륙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그 결과 이륙은 한유가 「送浮屠文暢師序」에서 유가의 聖人之道를 언급할 때 사용한 주요 용어들을 「送日本僧聖津首座還國詩序」에 그대로 차용하였고 왜구의 노략질이 남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불가의 교리에 연원하고 있다는 것도 발견해 내었다.내용도 서로 닮아 있지만 몇 군데의 형식도 한유의 작품에서 익히 본 적이 있어 낯설지 않았다.이것을 통해 이륙의 「送日本僧聖津首座還國詩序」가 한유의 「送浮屠文暢師序」를 모의하였다고 확언할 수 있다.다만 글을 시작하거나 맺는 방식에 있어서는 한유가 논쟁적인 글쓰기를 한 데 비하여 이륙은 설명하고 진술하는 글쓰기를 하는 차이를 보였다.이것은 두 사람의 개성이나 문세의 상이함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이륙이 유가로서 불가의 스님을 응대하는 양상의 전범을,시공을 초월해 중당의 한유의 글에서 찾아내어 모의하였음을 확인하였다는 데에 본고의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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