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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색결과 29

        21.
        2010.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노백헌 정재규(1843-1911)는 한말의 혼란 조짐을 드러내기 시작하던 1843 년 경남 합천군 쌍백면 육리 묵동에서 태어나, 개화기의 급변하는 시대 상황 속 에서 일생 실추된 전통유학의 도를 회복하고 확립하는 삶으로 일관하였다. 그는 22세 때 전라도 장성의 노사 기정진(1798-1879)에게 수학하였고, 쇠잔 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남명학의 영향력이 건재하던 강우지역에 노사학을 확립 한 핵심 인물이었다. 정재규는 19세기 중반 이후 강우지역에서 일었던 학맥의 융합 분위기에도 아랑 곳 않고, 기정진을 집지한 이후부터 일관되게 노사학에 매진하였다. 인근 타 학맥의 학자들과의 친밀한 교유, 치열한 논쟁 등을 통해 그들의 학설을 접하고 수용하면서도, 강우지역에서 일어나는 여타의 강회나 인 근 명승으로의 유람 등을 통해 학문적 결속력을 심화시킨 것 등은 모두 노사학 의 전파와 확산을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일생 강우지역에서 스승의 학맥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데 전력을 다한 인물이었다. 이렇듯 일생 전통유학의 도를 扶持하고 이를 통해 난세를 극복하고자 했던 노 백헌의 정신은 사후 그 문인들의 학문 활동에 의해 지속적으로 계승되었다. 정 재규의 이러한 삶과 학문 활동이 개화기라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대처방식이었다 할지라도, 이는 당시 종래의 전통유학을 고수해 오던 노백헌이 택한 최선의 선택이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22.
        200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논자가 앞으로 10여 년간 중점적으로 탐구해야 할 과제 중 하나인 지 리산 유산기 연구의 試論이다. 논자가 진행해야 할 연구는 지리산권역을 중심 으로 한 조선조 지식인의 문학이다. 특히 조선조 지식인의 지리산 관련 遊山文 學과 영남・호남 지식인의 樓亭文學 작품을 주요 논의대상으로 삼아 그들의 山 水美學과 그 속에 융화된 자연관을 집중 탐구하고, 이의 전반적 이해를 통해 조 선조 지식인의 자연에 대한 이해, 나아가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모색하던 태도 를 밝혀내게 될 것이다. 본고는 그 첫 시도로써, 조선조 지식인이 지리산을 유 람하고 남긴 유산 작품을 대상으로 삼아 그 동안 발굴된 자료를 개괄하고, 작품 속에 내재된 그들의 산수인식을 고찰함을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조선초기 李陸의 「智異山記」에서 시작된 지리산 유산기는 20세기까지 약 90 여 편이 발굴되었다. 이를 시대별로 분류하면 15세기 6편, 16세기 5편, 17세기 전반과 후반에 각 6편과 7편, 18세기 20편, 19세기 27편, 20세기는 21편인데, 후대로 갈수록 작품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함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작품 수의 차이는 조선시대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 그에 따른 지식인들의 浮沈에 그 원인 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리산 유산기에 보이는 산수인식은 4가지로 압축할 수 있었다. 먼저 유산기 담당층이 조선조 유학자인 만큼 다양한 儒家的 志趣를 先賢尊崇으로 압축하여 살펴보았고, 다음으로 지리산 산수자연 가운데 佛家的・巫俗的 유적지를 통해 異端을 배척하는 지식인의 의식을 살펴보았고,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오는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仙境을 찾는 그들의 遊仙 의식을 살필 수 있었다. 특히 그들은 지리산의 절경 속에서 道家的 志趣를 갈망하면서도 유학자로서의 자세 를 잃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유람을 통해 뛰어난 文學的 志趣를 표출해 내었는 데, 이는 우리 국토에 대한 예찬으로 일관되었음을 확인하였다.
        23.
        200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滄海 文尙海(1765-1835)는 18세기 말 19세기 초 진주 인근에 살았던 남명 연원가의 한 사람이다. 이 시기 경상우도 지역의 학자들이 인조반정 이후 出仕 하지 않고 지방에 퇴처하여 학문연구와 修身에 치중하여 살았던 것처럼, 창해 또한 재야지식인으로서의 전형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일생 출사하지 않고 향리에서 不斷한 수양자세로 일관하였는데, 이러한 삶의 자세는 그의 문 학작품 속에 고스란히 표출되어 있다. ..창해집..에는 그 분량이 많지는 않으나 이 시기 경상우도 지역의 여느 지식 인의 문집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다양한 문체의 글이 실려 있다. 漢詩의 경우 조선조 지식인에게 통용되던 오언시와 칠언시 외에도 六言詩가 6수나 들어 있 으며, 그 외 記·說·詞·傳·訓·銘·歌·賦 등 다양한 문체의 작품이 골고루 실려 있다. 그 내용에 있어서는 재야지식인으로서의 ‘끊임없는 수양하기’가 일관되게 나타 난다. 곧 유사한 내용을 읊어내더라도 다양한 형식으로 표출해 낸 경우인데, 이 는 창해가 그만큼 풍부한 문학적 소양과 다양한 창작활동 욕구를 지녔음을 의 미한다. 문학작품 가운데 특히 시를 중심으로 효용론적 측면에서 孝行詩·紀行詩·愛民 詩·修養詩·隱居詩로 분류하여 살펴보았는데, 그 속에 드러난 창해의 문학적 志 趣는 재야지식인으로서 삶 그 자체였다고 하겠다. 그는 출사하여 자신의 이상 을 펼치지는 못하였으나 조선조 지식인으로서의 處世, 士意識, 愛民精神 등을 다양한 문체 형식을 빌어 작품 속에 표현해 내었던 것이다.
        24.
        2008.01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Adsorption process is largely influenced by pore structures of adsorbents and physical properties of adsorbates and adsorbents. The previous studies of this laboratory was focused on the role of pore structures of adsorbents. And we found some pores of adsorbates which have larger pore diameters than the diameter of adsorbate are filled with easily. In this study the effects of physical and chemical properties of adsorbates and adsorbents, such as pore size distribution, vapor pressure on adsorption were investigated more thoroughly at the concentration of adsorbate of 1000 ppm. The adsorption in the pore ranges of 2~4 times of adsorbates's diameter could be explained by space filling concept. But there was some condensation phenomena at larger pore ranges. The errors between the adsorbed amount of non-polar adsorbates and the calculated amounts by considering factors were found to be 44.46%, positively, and -142%, negatively. When vapor pressure is considered, the errors between the adsorbed amount of non-polar adsorbates and the calculated amounts were in the range of 1.69%~32.25% positively, and negatively -1.08%~-63.10%.
        25.
        2007.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遺逸은 16세기 조선조 사대부문학의 작자층 가운데에서 학덕이나 재능을 지 녀 朝官이 될 자질을 갖추고도 벼슬하지 않고 재야에 은거하는 未入仕者를 말 한다. 士禍라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근거지로 은거한 이들은 현실 을 외면하지 않고 끊임없는 학문연구와 심성수양을 통해 온전한 인격을 추구하 였으며, 향촌을 교화하고 도학을 전파하는 등 경색된 현실에도 굴하지 않고 士 로서의 정체성 확립에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사회적 비중과 신망이 조 정에서 벼슬하는 관료보다 더 높아져, 조정에서는 이들을 예우하여 徵召하였다. 곧 遺逸은 출사하지 않으면서도 지방에서 백성의 신망이 두텁던 당대 碩儒들로 서, 우리 역사상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 시대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삶의 터전은 산수자연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은거지에 대한 애정이 남 달랐고, 은거지 주변의 명산과 절경을 유람하는 것으로 이를 표출하였다. 유람 에서 만나는 자연경물에 자신의 심정을 붙여 술회하였는데, 그들에게 있어 산 수자연은 ‘본래 그러한 것, 본래 그러한 모습으로 존재했던 것’으로만 인식되지 않았다. 특히 16세기 조선조는 성리학 연구의 심화가 이루어지던 시기이다. 이 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성리학자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 산수자연은 당대의 不正한 현실을 인식하는 자신의 의식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특히 은거지 중심의 유람에서 표출되는 산수자연은 현실에서의 좌절을 수양으로 승화시키는 지식인의 의식세계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예컨대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성리학자였던 만큼 자연경물을 통해 현실의 不 正 및 민생고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였고, 역사유적지를 접하면 그 시대를 회고 하고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현실을 반성하는 계기로 삼았다. 무엇보다 물러나 있지만 자아를 각성하고 심성수양에 진력했던 이들에게 산수자연은 士意識을 고취하는 매개로 작용하였다. 곧 당대 관료세계에 피동적으로 편입되기를 거부 하고 물러났던 조선조 士人의 의식을 산수자연으로 표출하였던 것이다.
        26.
        2007.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In this study,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ore size distribution and the adsorption amount of adsorbates is investigated in detail. Adsorption amounts of non-polar adsorbates were greater than those of polar adsorbates because of slight negative charge on surfaces of adsorbents. The adsorption of benzene on the surface of absorbents was largely influenced by the specific pore size of 2~4 times of benzene diameter. But in case of toluene, the adsorption of toluene was affected by pore sizes of 2~4 times as well as 4~6 times of the diameter of toluene. Both acetone and MEK were examined by the same method. The adsorption of acetone was influenced by pore sizes of 2~4 times of the diameter of acetone. But acetone does not look to be built up multi-layer on those pore sizes. Since acetone molecule is small and its mobility is so fast, it is assumed that the adsorption and desorption of acetone is simultaneously occurred at the same time even at room temperature. In case of MEK, MEK was effected by pore sizes of 2~4 times of the diameter of MEK.
        28.
        2006.07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is study is to investigate the relationship between pore structures of activated carbons and adsorption characteristics of toluene vapor using dynamic adsorption method. The surface areas of below 10Å in the pore diameter of activated carbons used in this experiment were in the range of 72~93% of total cumulative surface area and the toluene vapor equilibrium adsorption capacities were in the range of 350~390mg/g. Activated carbons having larger toluene adsorption capacity than the compared activated carbons had relatively pores in the pore diameter range of 7~10Å. Linear relationship between equilibrium adsorption capacity and cumulative surface area was in the diameter range of over 7Å. It was thought that toluene vapor was relatively well adsorbed on surfaces of pores of over 7Å.
        29.
        2004.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5-16세기에 걸쳐 계속된 몇 차례의 사화로 많은 지식인들은 은거의 길을 선택 하였다. 이들은 물러나 있지만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을 기울였고,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서는 서슴없이 비판하였다. 그들은 ‘隱進’ · ‘處士’ · ‘逸士’ · ‘徵士’ · ‘居士’ 등의 영예로운 호칭으로 불리었으며, 국가에서는 遺逸薦擧制라는 독특한 천거 방식을 통해 그들을 예우하였다. 동주 성제원(1 506-1559) 또한 기묘사화의 참혹한 피해 상을 직접 보고 은거하였다가 후에 遺逸로 천거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당시 退處型사림들의 보편적 학문 성향, 곧 이론적이고 성리학 일변도의 학문 추구보다는 실천적이고 현실적이며, 어디까지나 성리학에 근본을 두되 성리학 외의 불교 · 노장은 물론 천문 · 복서 · 의 학에 이르는 잡학까지 두루 섭렵하는 탄력적인 학문성향을 나타내였다. 士의 출처 에 대해서는 그 시대가 왕도를 실행할 만한가, 士자신이 그 소임을 감당할 충분 한 능력과 자질을 갖추고 있는가 하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라야만 출사가 가능하다고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평생 출사하지 않다가 말년에 遺逸薦擧로 보은현감에 제수되었는데, 이를 그 동안 자신이 축적한 능력을 발휘할 계기로 삼았다. 이는 3년 간의 치세를 마치자 곧바로 은거의 삶으로 돌아간 그의 결단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동주를 비롯한 이 시기 遺逸之士들의 이 같은 처세는 후세 여러 학자들에 의해 칭송을 받았으며, 출처의 자세와 방향에 準據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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