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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색결과 7

        1.
        201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독도 영유권 문제는 1693년 이래 300년 이상 한일 간에 논쟁의 대상이었다. 학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독도 영유권 문제에 대한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한일 연구자들 사이에서 공통의 논의를 찾기도 쉽지 않다. 순수한 학문적 연구보다는 자기 나라의 영유권 확보에 유리하도록 하기 위한 당위론적이고 목적론적인 연구에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독도문제를 둘러싸고 한일 간에 쟁점이 되고 있는 몇 가지 이슈를 시대 순으로 정리했다. 특히 도해금지령과 관련지어 태정관지령을 중심으로 검토했다. 구체적으로는 도해금지령은 독도 도해금지도 포함하고 있는가. 도해금지령을 현대 국제법적인 의미의 조약으로 불 수 있는가. 조약이라면 독도 영유권문제에서 도해금지령은 어떠한 함의를 가지고 있는가, 나아가 도해금지령을 승계한 태정관지령은 독도 영유권 문제와 어떠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가 등을 분석 대상으로 하였다. 이를 토대로 도해금지령과 태정관지령을 기초로 한 조일(朝日)/한일국경조약체제의 유용성, 그와 관련한 일본의 독도 편입의 부당성, 샌프란시스코 조약 해석에 대한 새로운 분석을 시도했다.
        2.
        201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연구는 근대 일본의 대표적 관찬사료인 『조선국 교제 시말 내탐서』, 『죽도고증』, 『태정관 지령』에 나타난 울릉도·독도 인식에 관한 연구이다. 19세기 후반 일본정부에서 발행한 이 사료들은 울릉도⋅독도가 역사적⋅지리적으로 한국의 영토였음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17세기말 안용복사건에 의해 촉발된 울릉도쟁계(죽도일건)를 통해 확인된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영토’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는 사료들이다. 먼저 『조선국 교제 시말 내탐서』13항 ‘죽도와 송도가 조선의 부속이 된 경위’에 대한 검토를 통해 일본 외무성이 “울릉도(죽도)는 물론이고 독도(송도)에 관해서도 기록된 서류가 없다”고 인정함으로써, 울 릉도와 독도가 하나의 세트로 인식되었으며, 역사적·지리적으로도 조선의 영토였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죽도고증』에서 기타자와 마사나리는 울릉도에 대해서는 한국의 영유권을 인정하면서 독도에 대해서는 일본의 영유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1860년대 이후로 당시 일본이 울릉도와 독도의 명칭과 지리적 인식에 대해 매우 혼란스러웠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당시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일본의 역사적⋅지리적 인식이 매우 부족했 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태정관 지령』에 대한 검토에서는 “죽도 외일도는 본방 과 관계없음”을 확언한 태정관지령과 첨부지도 ‘기죽도약도’를 통해 독도가 역사적·지리적 으로 한국의 고유한 영토임을 확인할 수 있다. 기죽도약도에서 표기된 조선동해-울릉도-독도-오키섬 간의 지리적 거리도 현재의 거리와 수치적으로 거의 일치하고 있으므로 ‘외일도 =송도(독도)’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결국 근대 일본의 대표적 관찬사료인 『조선 국 교제 시말 내탐서』, 『죽도고증』, 『태정관 지령』을 검토해 봐도 울릉도⋅독도가 역사적 ⋅지리적으로 한국 영토임을 확인할 수 있으며, 17세기 중반 이래 독도에 대해 실효적 지배를 해왔다는 일본의 ‘고유영토론’은 조작된, 허구적 주장이라는 사실이 한층 더 명백해 졌다.
        3.
        201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샌프란시스코 조약과 태정관지령의 관련성을 간단히 논하면 다음과 같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2조 a항은 ① 독도에 대한 미국의 제한된 정보와 ② 1905년 이전 독도가 한국의 영토로 간주된 적이 없다는 두 가지의 점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대해 다음과 같은 반론이 가능하다. ① 울릉도 쟁계에서 일본이 독도와 울릉도에 대한 한국의 영유권을 인정했고, 태정관 지령이 이를 승계한 것이므로 적어도 1699년 이후 일본에 의해 독도는 한국의 영토 로 인정되어왔다. ② 아무리 양보를 해도, 적어도 1905년 일본이 독도 편입 조치를 취하기 이전에 까지 태정관지령은 계속 효력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일본에 의해 독도에 대한 한국의 영유권이 인정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독도에 대한 한국의 관할권을 인정할 만한 직접적인 증거가 없더라도, 일본에 의해 독도에 대한 영유권이 인정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독도에 대한 한국의 관할권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③ 앞의 ①과 ②가 사실인 이상, 미국의 제한된 정보라는 것은 결국 1905년 일본의 독도편입조치 이후의 정보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1905년의 일본의 독도편입을 사실로서 전제를 하고 작성된 샌프란시스 코조약 제2조 a항에 대한 해석은 변경을 요할 수밖에 없다. 즉 제2조a항에 독도가 언급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곧 일본이 포기해야 할 섬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즉 샌프란시스코조약 제2조 a항은 미국의 잘못된 정보에 의해 작성된 것이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일본이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일본의 자기부정에 해당한다. 태정관 지령의 현재적 의미는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4.
        2016.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은 메이지(明治) 초기 일본의 국가최고통치기관인 태정관太政官의 기능과 성격을 밝히고, 1877년 독도의 영유권애 관련된 ‘태정관지령(指令)’의 의미와 효력을 분석한 것이다. 태정관은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행정부의 최고기관으로서의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니라 입법, 행정, 사법의 3권을 통할하는, “천하의 권력은 태정관에 귀결되는” 국가 최고통치기관이었다. ‘태정관지령’으로 사법부의 판결도 무효화되는 경우도 있었다. 태정관이 발하는 법령의 형식으로는 포고布達, 달達, 고시, 지령이 있다. 1886년에 ‘공문식公文式’의 제정으로 포고와 달은 법률로, 그 이하의 법령은 내각 및 각성의 명령 즉 각령 및 성령 등의 형태로 흡수된다. 지령은 하급기관의 질의에 대한 유권해석의 성격을 가진 회답이다. 1877년의 독도관련 ‘태정관지령’은 내무성괴 시마네 현의 질의에 대한 태정관의 유권해석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태정관지령’은 영토(주권)의 판도에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에 질의를 한 하급기관만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전체에 효력을 미치는 것으로 봐야 한다. 즉 1877년의 ‘태정관지령’은 헌법의 영토조항에 상당하는 가치를 기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시의 법령이 그 후에 제정된 법령에 모순되지 않는 한 현재까 지도 그 효력이 미치는 것으로 봐야하기 때문에, 독도의 조선 귀속을 확정한 1877년의 ‘태정관지령’은 현재도 유효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연장선상에서 헌법적 가치를 지닌 ‘태정관지령’을 무시하고 일본이 1905년 2월 시마네 현 고시를 통해 독도를 편입한 것이 법리적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된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일본 정부가 태정관지령의 변경을 명시하지 않은 상태에서 취한 시마네 현 고시는 상위 법령(태정관지령)을 위반한 무효의 행위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정치한 이론화는 앞으로의 과제로 남긴다.
        5.
        201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에도시대의 ‘죽도도해금지령’과 ‘독도 조선령’ 인식은 그 후 메이지(明治)시대에 들어 외 무성의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1870)와 󰡔태정관지령󰡕(1877)으로 이어졌다. 메이지 3년, 외무성의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에서는 독도를 ‘울릉도의 인도’(竹島ノ隣島)로, 또한 메 이지 10년 최고국가기관인 태정관의 󰡔태정관지령󰡕에서는 독도를 ‘울릉도외일도’(竹島外一島)라고 하여 조선령임을 재확인했다. 1870년의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와 1877년의 『태정관지령』은 독도를 울릉도에 부속 된 섬으로 보는 지리적 인식의 산물인 동시에, 안용복사건 당시에 확인된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영토’라는 사실을 한 번 더 확인한 것이었다. 다케시마(竹島)문제연구회에서 주장하는 것과 같이, 명칭혼동이나 착오에 의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태정관지령』은 독도영유권 귀 속에 관한 역사적인 논쟁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메이지정부 최고국가기관인 태정관은 1877년, 영토담당 정부기관인 내무성을 경유하여, 시마네현에 ‘울릉도와 독도를 시마네현 의 지적에 올리지 말 것’을 지시하고, 그 내용을 관보에 해당하는 『태정류전』에도 공시했다. 『태정관지령』은 일본의 양심적인 학자에 의해 공개된 이래, 주로 일본계 학자들에 의해 서 연구가 많이 된 반면에, 국내에서의 연구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편이다. 연구부족뿐만 아니라 근거자료로서의 가치도 저평가 되고 있다. 일본측에서 『태정관지령』을 부인 하는데 온 힘을 쏟아붓고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독도 문제에 대한 역사적 논쟁은 『태정 관지령』을 얼마나 잘 활용 하느냐에 따라 그 성패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국제법적인 측면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6.
        2014.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지난 2월 22일 일본 시마네현의 ‘죽도의 날’ 행사를 치루면서 독도홍보책자 󰡔죽도문제 100문 100답󰡕을 배포하였다. 여기서는 2005년 7월 죽도문제연구회 발족 이후 지금까지 죽도문제연구회가 펼쳐온 독도는 ‘일본 역사적으로 고유의 영토’라는 왜곡논리가 그대로 응축되어 있다. 사실 여기서의 ‘100문 100답’은 ‘Web죽도문제연구회’의 홈페이지를 통해 일반 네티즌들의 소박한 질문에 관해 답변해온 자료들 중 100여개를 취사선택하여 명료하 게 간추린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한국은 “예로부터 전혀 독도를 인지하지 못했고, 17세기 오야·무라카와 양가의 죽도도해로 인하여 17세기 중엽에 일본의 독도에 대한 영유권이 성 립했다”고 하는 입장을 그대로 견지하고 있다. 본 논문은 『죽도문제 100문 100답』의 고유 영토론의 논리를 일본 사료를 통하여 비판하고자 했다. 분석의 결과 고유영토론은 일본의 사료에 의해서 명확하게 부정되는 것임을 밝혔다. ①1695년 12월 24일 에도 막부의 필두로쥬(筆頭老中) 아베 붕고노카미(豊後守)가 돗토리번 의 에도번저(江戶屋敷)에 보낸 질의에 대한 답변서 「7개조 답변서」에서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에 부속하지 않는다고 확인한 다음 「죽도도해금지령」을 내렸던 점, ② 1870년 4월 일본 외무성이 3명의 외무성 관원에게 조선의 내정에 대해 정탐을 하게 하여 보고받은 「조 선국시말내탐서」에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부속임을 명확히 확인하고 있는 점, ③ 1877년 3월 29일 당시의 최고정치결정기관인 태정관이 지령으로 ‘울릉도·독도가 일본의 판도가 아니다’라는 결정을 내린 「태정관지령문」에서 2섬이 일본의 영역이 아니라 조선의 영역임 을 천명한 점, ④ 일본에서 독도가 최초로 언급되는 관찬지 󰡔隱洲視聽合記󰡕(1667)에서 일본의 서북한계를 오키섬까지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 등이다. 이들 일본 사료를 통해서 보더라도 죽도문제연구회와 일본 외무성이 주장하는 ‘고유영토론’ 논리가 성립하지 않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역사적 왜곡이 또 다른 사실 왜곡을 재생산하는 연결고리를 단절하기 위해서라도 일본은 독도에 대한 ‘고유영토론’의 논리를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7.
        2013.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 「태정관지령」 부속 지도 「기죽도약도」 발견 경위 2005년 3월 대신대학에서 일본의 한반도 침략 죄에 대한 설교를 계기로 나는 독도 문제 와 관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죽도 외 1도 건에 대해서는 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명심할 것”이라고 하는 태정관(太政官) 지령이 원본에서는 붉은 글씨로 되어 있는 한 문장을 만났습니다. 붉은 글씨를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그 의미를 알고 싶다는 생각에 서 원본의 개시 신청을 하고 동년 5월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원본에는 「기죽도약 도(磯竹島略圖)」(울릉도 약도)로 쓰인 작은 봉투 안에 접혀진 한 장의 부도(付圖)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것이 「기죽도약도」였습니다. 펼쳐 보고 더욱 놀랐습니다. 부도 오른쪽 상단에도 「기죽도약도」라고 기록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죽도(울릉도)와 함께 송도(독도) 가 그려져 있던 것입니다. 2006년 5월 고신대학 강연에서 제시한 공문록 및 「기죽도약도」 에 대해 6월 7일 부산 MBC 문화방송이 처음으로 텔레비전 방송에서 공개하였습니다. 독도 연구자인 박병섭 선생도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사료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즉시 인터넷상 에 공개하였습니다. 「기죽도약도」의 가치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인터넷상과 서적( 󰡔다케시마 =독도논쟁󰡕 內藤正中・박병섭, 2007년, 新幹社)에 공개한 것은 박병섭 선생님이 처음이었 습니다. 1. 「태정관지령」 부속 지도 「기죽도약도」 발견 경위 2005년 3월 대신대학에서 일본의 한반도 침략 죄에 대한 설교를 계기로 나는 독도 문제 와 관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죽도 외 1도 건에 대해서는 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명심할 것”이라고 하는 태정관(太政官) 지령이 원본에서는 붉은 글씨로 되어 있는 한 문장을 만났습니다. 붉은 글씨를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그 의미를 알고 싶다는 생각에 서 원본의 개시 신청을 하고 동년 5월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원본에는 「기죽도약 도(磯竹島略圖)」(울릉도 약도)로 쓰인 작은 봉투 안에 접혀진 한 장의 부도(付圖)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것이 「기죽도약도」였습니다. 펼쳐 보고 더욱 놀랐습니다. 부도 오른쪽 상단에도 「기죽도약도」라고 기록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죽도(울릉도)와 함께 송도(독도) 가 그려져 있던 것입니다. 2006년 5월 고신대학 강연에서 제시한 공문록 및 「기죽도약도」 에 대해 6월 7일 부산 MBC 문화방송이 처음으로 텔레비전 방송에서 공개하였습니다. 독도 연구자인 박병섭 선생도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사료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즉시 인터넷상 에 공개하였습니다. 「기죽도약도」의 가치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인터넷상과 서적( 󰡔다케시마 =독도논쟁󰡕 內藤正中・박병섭, 2007년, 新幹社)에 공개한 것은 박병섭 선생님이 처음이었 습니다. 1. 「태정관지령」 부속 지도 「기죽도약도」 발견 경위 2005년 3월 대신대학에서 일본의 한반도 침략 죄에 대한 설교를 계기로 나는 독도 문제 와 관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죽도 외 1도 건에 대해서는 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명심할 것”이라고 하는 태정관(太政官) 지령이 원본에서는 붉은 글씨로 되어 있는 한 문장을 만났습니다. 붉은 글씨를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그 의미를 알고 싶다는 생각에 서 원본의 개시 신청을 하고 동년 5월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원본에는 「기죽도약 도(磯竹島略圖)」(울릉도 약도)로 쓰인 작은 봉투 안에 접혀진 한 장의 부도(付圖)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것이 「기죽도약도」였습니다. 펼쳐 보고 더욱 놀랐습니다. 부도 오른쪽 상단에도 「기죽도약도」라고 기록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죽도(울릉도)와 함께 송도(독도) 가 그려져 있던 것입니다. 2006년 5월 고신대학 강연에서 제시한 공문록 및 「기죽도약도」 에 대해 6월 7일 부산 MBC 문화방송이 처음으로 텔레비전 방송에서 공개하였습니다. 독도 연구자인 박병섭 선생도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사료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즉시 인터넷상 에 공개하였습니다. 「기죽도약도」의 가치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인터넷상과 서적( 󰡔다케시마 =독도논쟁󰡕 內藤正中・박병섭, 2007년, 新幹社)에 공개한 것은 박병섭 선생님이 처음이었 습니다. 1. 「태정관지령」 부속 지도 「기죽도약도」 발견 경위 2005년 3월 대신대학에서 일본의 한반도 침략 죄에 대한 설교를 계기로 나는 독도 문제 와 관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죽도 외 1도 건에 대해서는 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명심할 것”이라고 하는 태정관(太政官) 지령이 원본에서는 붉은 글씨로 되어 있는 한 문장을 만났습니다. 붉은 글씨를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그 의미를 알고 싶다는 생각에 서 원본의 개시 신청을 하고 동년 5월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원본에는 「기죽도약 도(磯竹島略圖)」(울릉도 약도)로 쓰인 작은 봉투 안에 접혀진 한 장의 부도(付圖)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것이 「기죽도약도」였습니다. 펼쳐 보고 더욱 놀랐습니다. 부도 오른쪽 상단에도 「기죽도약도」라고 기록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죽도(울릉도)와 함께 송도(독도) 가 그려져 있던 것입니다. 2006년 5월 고신대학 강연에서 제시한 공문록 및 「기죽도약도」 에 대해 6월 7일 부산 MBC 문화방송이 처음으로 텔레비전 방송에서 공개하였습니다. 독도 연구자인 박병섭 선생도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사료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즉시 인터넷상 에 공개하였습니다. 「기죽도약도」의 가치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인터넷상과 서적( 『다케시마 =독도논쟁』內藤正中・박병섭, 2007년, 新幹社)에 공개한 것은 박병섭 선생님이 처음이었 습니다. 2. 「태정관지령」 부속지도 「기죽도약도」의 의의 「기죽도약도」가 발견되기 전부터 공문록 사료를 진지하게 마주 한 연구자들은 ‘외 1도’ 가 송도(독도)라고 하는 바른 결론을 당연히 내리고 있었습니다. 「기죽도약도」는 이러한 연구자들의 연구의 결과가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박병섭 선생님이 “「공문록」 에 쓰여진 외 1도인 송도(松島)가 독도인 것은 「공문록」 부속 「기죽도약도」를 보면 일목 연하다”(『시모죠 마사오의 논설을 분석한다』, 90쪽, 『독도연구』 제4호, 2008년, 영남대학 독도연구소)고 적고 있는 대로입니다. 태정관지령을 문서사료와 함께 확인한 「기죽도약도」 에 의해서 ‘외 1도’가 어느 섬을 가리키고 있는지 판단할 수 없다고 하는 견해는 거부되었습 니다. 게다가 ‘외 1도’를 공문록 그 자체로 부터 해석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해 공문록 밖에서 독도 이외의 섬이라고 결론지으려고 하는 잘못된 시도와 결론도 무력화시켜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3. 독도 문제 독도연구의 제1인자로 거론되는 고 나이토 세이쥬(內藤正中) 선생님은 일본 외무성의 자세를 “과거의 역사와 정면에서 부터 바라보려고 하지 않고 역사의 일부를 편의주의에 따라 수박 겉핥기를 하고, 그 한편으로 자신의 주장과 맞지 않는 사실은 무시하고 고려하지 않는다”(『죽도=독도문제입문』 64쪽)고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즉, 국가가 역사로 부터 진심 으로 배우고 마주보고 역사적 사실을 존중해 간다면, 독도 문제도 해결의 길을 찾아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국의 역사에서 진심으로 배운다는 것은 국가 스스로가 그 시대의 역사에 새겨진 발자 취로서 역사적 사료에 관심을 가지고 이것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국가가 과거의 잘못을 진지하게 응시하고 회개하는 것에 의해서 미래는 올바르게 열어 갑니다. 「기죽도약도」 등이 중요한 사료는 이것을 보는 사람이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진실로 마주 보는지 어떤지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죽도(울릉도) 외 1도(독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하는 태정관지령은 확실히 오늘 일본에게 회개를 강요하는 지령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