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검색조건
좁혀보기
검색필터
결과 내 재검색

간행물

    분야

      발행연도

      -

        검색결과 7

        1.
        2017.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박두진 시인의 신앙시집 􋺷나 여기에 있나이다 주여􋺸는 시인의 시력 후반기 에 선별한 신앙고백 시편인 동시에 개혁주의 신학의 관점에 입각한 구원의 서 정을 잘 드러낸 시집이다. 개혁주의 관점에서 구원의 서정이 중요한 이유는 하 나님의 구속사역이 인간의 태도와 행위에 부수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 문이다. ‘구원의 서정’은 박두진의 시에서는 크게 ‘소명’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찬양, ‘칭의’에 대한 구속사적 이해를 드러내는 시편들, ‘성화’와 ‘견인’으로서의 사도의식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뜻하는 한몸 의식이 강조된 시편들, ‘영화’ 에 대한 소망을 노래한 시편들로 분류할 수 있었다. 박두진 시인은 구원의 주체 가 천지만물의 창조주라는 명확한 인식을 갖고 그 태초의 부르심에 대한 경탄 을 시로 승화시켰다. 특히 갈보리의 노래 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공의와 사 랑이 십자가로 완성됨을 보여주었고 예수의 죽음의 고통과 육체적 부활의 환희 를 묘사해 내었다. 사도행전 연작에서는 신앙생활에 따른 고독감과 단독자의 식을 개인적 차원에서 공동체적 차원의 사도의식과 행군 의지로 끌어올렸다. ‘영화’는 미래완료형 개념이어서 시적 화자의 영원을 향한 소망을 담은 기도문 으로 나타났다. 주제어
        6,300원
        2.
        2016.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예이츠의 초기 서정시는 문명과 이상화된 이미지들의 결합일 뿐만 아니 라 예이츠가 평생 동안 관심을 가졌던 아니마 문디 상징의 단초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 초기 시들에는 예이츠의 난해한 신비주의에 대한 관심과 함께 개인적인 관계를 가진 여성과 신화적인 여신을 상징하는 장미의 상징이 자주 등장하며, 이 장미는 시인으로서 의 개인적인 정서와 통합된 범인류적 기억인 세계령의 강력한 연결고리로 나타난다. 초 기 시에서부터 세계령은 예이츠의 작품에 창조적 구조이며 시적 영감인 뮤즈이다.
        6,000원
        3.
        2011.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형식주의비평은 예이츠 연구에서 비교적 주변적 역할을 하고 있다. 최고의 시인이라는 명성이 기교적 탁월함에 근거한다는 일반적 인식을 고려할 때, 이것은 좀 놀랍다. 최근에, 그러나, 벤들러의 선도적 연구는 이 비평적 공백을 메우기 시작했다. 이 글은 예이츠 시에서 구체적으로 서정시 장르와 준서정시로 구분하는 벤드러를 논의한다. 본 논문은, 소네트 형식의 5편의 시에서, 마지막 두 행의 변화(turn)와 수욕적 힘의 대두 사이에 결합이 발생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관찰은 준서정시의 구분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결론적으로 장르구분의 확인의 한계를 지적한다.
        4,500원
        4.
        2010.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예이츠의 가장 초기 희곡 중의 하나인 『치킨 국물 뚝배기』는 어느 배고픈 부랑자가 인색하기로 소문난 노파로 하여금 국물을 끊이는 데 동참하게 만드는 희극이다. 유럽에서 널리 알려진 구전 설화로서, 예이츠는 여기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사용한다. 이 극에서 예이츠가 어떤 기법과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 이 논문은 그가 평범한 구전 설화를 어떻게 재구성하여, 독백, 대화, 노래, 무대지시, 등의 서정적 형식을 통해 극화시키는지 연구한다.
        4,900원
        5.
        1997.05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tradition of local landscape poetry in England has appeared since the 18th century, and has been enhanced as one of the main characteristics of the 19th century European poetry and inherited until today. The landscape, in general, plays three roles: first, it is used as the background and a medium with which to express a poet’s emotion and mind; secondly, it can reveal its role as a subject, making dialogue with a poet; and thirdly, it can be used as a reminder of collective mind. Yeats and Heaney, unlike the English poets, show strong aesthetical and collective mind, even in describing the landscape. However, Yeats, belonging to Protestant Ascendancy, used the landscape as a medium to express his individualistic emotion and to stir the Romantic Ireland. On the other hand, Heaney, belonging to the oppressed Ulster Catholic, projects the communities’ lack - as well as the reaction to overcome this lack - the lost land, language and tradition. Heaney’s point of view and technique are very realistic, while Yeats’s point of view and technique are romantic. Yeats’ landscape is painted purple-coloured ; Heaney’s is described as a dark-coloured one, reflecting his own pity for the oppressed people and their adversity.
        5,400원
        6.
        2013.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점필재 김종직은 조선초기 사림의 종사이다. 그가 조선조 도학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것은 그 자신이 문학과 학문에 있어서 탁월한 성취를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지방 행정을 통하여 인륜 도덕을 숭상하는 사회 기풍을 일으키는 모범적인 사례를 보여주었고, 그 문하에 도학의 이념을 실천하는데 앞장선 훌륭한 후학들을 양성해내었기 때문이다. 점필재의 도학 이념에 입각한 정치 교화와 교육의 실천 모범은 그가 지방관으로 근무하였던 10년 동안에 가장 잘 나타난다. 이런 관점에서 이 글에서는 점필재가 함양군수로 봉직하였던 5년 동안의 시문 가운데 정사를 임하는 태도와, 풍교의 대책과 강학 및 유상의 정서를 추적하여, 점필재의 평소 학문 사상과 정치 교육의 성과가 조선전기 도학의 선구임을 밝히고자 하였다. 점필재는 함양군수로 부임하면서부터 수시로 관내를 순시하면서 지역의 역사와 물산, 홍수의 재해, 조세와 부역 등, 民生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었고, 함양읍성 나각을 보수하고 다원을 경영하는 등 조선초기 지방관원으로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고을 주민의 편익을 위한 적극적인 대책을 강구하여 시행하였다. 그는 또한 향교를 보수하고 향교를 중심으로 향음 향사 양로의 의식을 거행하여 인륜 도덕으로 풍속을 순화한다는 風敎의 실현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한편으로 많은 문생들을 받아들이고, 그 문생들과 고을 주변의 산천을 다니면서 수시로 학문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도학과 심학의 단서를 열어주었다. 점필재는 함양군에서 시행한 시정과 풍교 강학의 규범은 이 시대 학자들에게 도학 정치 실현의 한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인재들은 조정의 관료나 재야의 문인 학자로서 그의 모범과 신념을 널리 확산함으로써 한 시대의 새로운 조류를 형성하였다. 그런 점에서 함양은 점필재 김종직의 학문 사상과 경륜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 조선조 도학의 본류를 형성하는 전환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7.
        2009.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河崙의 정치적 존재양태의 변화를 통해서 그의 삶을 구명하려고 한 것이다. 하륜은 經世와 가례에 밝았다. 太宗은 집권 전기에 하륜으로 하여금 庶 政을 관장하게 하면서 그를 ‘賓師’로서 대우하였다. 반면에 李居易와 朴誾 및 沈 溫 등은 하륜이 인사를 전횡한다고 크게 비난하였다. 심지어 閔霽는 하륜이 鄭 道傳처럼 患亂을 당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태종대 전기 하륜의 정치적 존 재양태는 극히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하륜은 朴子安 사건에 연루되어 숙청될 위기를 겪었다. 정도전 일파는 박자안 의 입을 빌려서 하륜을 숙청하고자 했다. 이는 태종과 하륜이 생사의 동맹을 맺 게 되는 가장 극적인 미시적 사건이었다. 박자안 사건은 태종과 하륜이 ‘相與之 際’를 맺게 한 단서였다. 하륜은 태종에게 盡心全力하여 충직하기가 비견할 사 람이 없는 빈사였고, 태종은 하륜에게 유가적 지식인으로서 삶을 후원·보호해 준 주군이었다. 이로써 둘은 ‘君臣相與之際’였다. 하륜은 閔無咎 형제의 옥사에 직접적인 관계는 없었다. 그러나 李之誠의 供辭 내용, 柳沂의 의심스러운 행동 등에서 보면 의문이 든다. 특히 하륜은 민무구 형제가 自願安置되자 ‘세자 제거가 아니라 宗支 제거이니 적합한 벌’이라고 하 여 태종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런데 태종은 그것조차 하륜의 해명을 통해서 충직한 행동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태종은 黃喜에게 하륜과 오고간 내용을 비밀로 하라고 명령하였다. 이후 하륜의 정치적 존재양태에 변화가 보인다. 하 륜은 태종의 자문에 응하여 武科 試員을 혁파할 것을 말하고, 나아가 임금이 직 접 考閱할 것과 이를 비밀리에 추진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처럼 하륜은 태종과 같이 朋黨을 크게 경계하였다. 이는 李叔蕃과 심온이 黨與를 개의치 않다가 죄 를 받았던 것과 비교된다. 이로써 태종대 중기 이후 하륜이 태종의 庶政 자문에 응하는 정치적 존재양태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