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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색결과 17

        2.
        2014.06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o develope seaweed transplantation method to reduce grazing pressure by Anthocidaris crassispina, seaweed biomass and number of sea urchin were examined after 2 days from Ecklonia cava transplantation by four ways (three floating rope methods and seaweed transplantation block method). Three floating rope methods were different in the seaweed rope connection to fixation block rope; direct connection, polypropylene rope connection, and stainless wire connection. About twenty sea urchins were found on the seaweed cultivation rope connected directly to fixation block rope and on transplantation block. However no sea urchin was found for 2 days on the seaweed cultivation ropes connected by stainless wire and polypropylene rope. After 2 days from seaweed transplantation, biomass of E. cava was maximal with 992.61 ± 78 g m-1 in wet weight on stainless wire connection method and minimal in seaweed transplantation block method with 121.85 ± 71.67 g m-1. Before transplanting 42 Ecklonia cava plants were on one meter of cultivation rope and 41 plants on the cultivation rope connected with stainless wire to fixation block but five plants were remained on the transplantation block after 2 days. In conclusion, the best transplantation method of E. cava in this study to reduce grazing pressure of sea urchin was a floating rope method connected stainless wire to fixation block.
        4,000원
        3.
        2005.03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Severe-Ornament (Vyuha :Sanskrit) of wooden pagodas in Shilla period in order to assume a detailed shape of wooden pagodas called the palace style, the multi-story style, the towered namsion style, that were built at the temples in Gyeongju during Shilla period. The Severe-Ornament had been used traditionally by installing a Buddhist image, Guardians, Sarira and by printing a color. The other hand, The roof tiles and tiles were annexed to the Severe-Ornament so as to enhance the value of the wooden pagodas. The Vyuha had been used not only to install a highly valued Buddhist image in the wooden pagodas but also to represent an important part of ritual art of Silla period. Therefore, it was possible to find out a variety of details of the wooden pagodas in Shilla period.
        5,400원
        4.
        201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出處는 儒學에서 선비들에게 요구한 중요한 덕목이며, 많은 유학자들이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표적으로 남명 조식은 출처를 君子의 큰 절조로 보았으며, 평생 ‘處士’로 실천했다. 그런데 문제는 조정의 계속된 출사요구를 거부한 남명을 퇴계와 같은 당대의 유학자들은 부정적으로 보아 그 의미를 축소하거나, 학문적 體認의 결과가 아닌 개인적 기질의 결과로 이해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에도 ‘기절’이나 ‘기상’, ‘절개’등 개인적 차원의 의미만을 강조하여, ‘정치를 외면하지 않았다’며 정치적 의미에 대해선 소극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이 연구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남명의 처사적 삶과 사상을 보다 적극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하여 남명의 ‘처’ 즉 ‘물러남’이 가지는 국가권력과의 ‘거리감’에 주목한다. 유학은 현실정치를 긍정하여 ‘나아가감(出)’을 강조했지만, ‘處-물러남’ 또한 강조했다. 이러한 ‘처’는 유학자들이 현실의 정치권력과 적절한 거리를 둠으로써 견제와 긴장을 만들어낸 요소이기도 했다. 남명은 이러한 ‘물러남의 정치학’을 잘 이해했으며, 그의 출처사상과 처사로서의 삶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래서 남명의 處는 개인적 기절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국가권력에 대한 ‘경계’와 ‘비판’ ‘저항’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나아가 ‘폭력적 국가권력’을 ‘공공의 국가권력’으로 변화 시키려는 문제제기도 담고 있었다.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날 줄 모른다’는 당대 지식인들에 대한 남명의 비판과 그가 실천한 ‘물러남의 정치학’은 현대의 정치현실에 있어서도 부당한 권력을 비판하고 거부하는 정신으로 계승될 수 있으며, 나아가 권력의 성격을 보다 공적인 것으로 만들어나가 현대의 민주주의 발전에도 도움 될 수 있을 것이다.
        5.
        201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南冥 曺植은 수제자인 來庵 鄭仁弘을 자신의 분신으로 여겼다. 내암 도 남명의 이러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남명 사후 그를 추숭하는 일에 전력을 투구했다. 내암이 지은 「南冥 曺先生 行狀」도 이러한 남명추숭 의식의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남명은, 退溪 李滉의 출사 권유를 거절한 이후로 끊임없이 퇴계로부 터 여러 가지 비판을 받아왔으며, 이러한 비판은 퇴계의 문인들에게 그대로 전해져 내려왔다. 남명에 대한 퇴계의 비판은 급기야 남명의 문묘종사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고, 이에 대한 반 작용으로 내암은 죽음을 무릅쓰고 남명에 대한 퇴계의 비판을 해명하 는 데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내암의 노력은 그가 지은 스승 남명의 행장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내암은 남명의 행장에서 남명이 생전에 남긴 글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남명의 출처의식과 남명의 학문관을 설파함으로써, 남명의 입장에 대한 옹호는 물론 나아가 퇴계에 대한 비판까지도 불사하는 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6.
        2012.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2012년 7월까지 남명 조식의 철학사상을 연구한 업적들을 회고한 글이다. 다섯 분야로 나누어 논의의 흐름을 살펴보았는데, 실천유학성에 대한 논의, 남명 성리학의 속성에 대한 논의, 탈유학성의 논의, 공부론의 특징에 관한 논의, 이기론적 성향에 대한 논의가 그것이다. 대부분의 논문들은 남명의 유학이 실천유학이자 脫이론적이라는 데 동의하고, 남명학의 특징을 비교라는 방법에 의하여 탐구한다. 비교 대상으로 삼아진 이들은 이황과 주희였다. 비교를 통해 남명만이 가지는 특성이 많이 드러났으나, 지나치게 차이성을 강조하고자 한 경우 상식에서 벗어난 무리한 주장들을 내놓아 남명학 이해를 오히려 저해한다. 이에 필자는 저술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남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차별화와 함께 동일성을 찾는 작업이 중요함을 제안하였다. 아울러 남명학이 동아시아 유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찾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기존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생활 속에서의 체험을 통해 공부해야 한다는 남명의 교훈은 여전히 유효함을 주장하였다.
        7.
        2010.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무진봉사」에서 드러나고 있는 조식의 사회변혁론을 정리해 봄으 로써, 실천적 유학자로 지칭되는 조식의 문제의식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 지를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데 목적이 있다. 「무진봉사」에 나타난 조식의 사회 변혁론은 한마디로 군왕의 도덕적인 인격의 완성을 토대로 한 ‘덕치’를 핵심으 로 하고 있다. 군왕의 도덕적 인격완성은 인재의 등용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문 제의 해결 등 모든 정치의 출발점이자 토대이다. 즉 인재를 등용하는 것도, 관 리들의 비리를 척결하는 것도, 그 밖의 모든 정치․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열 쇠는 바로 군왕의 수신에 있고, 군왕의 수신에서 시작한다. 이와 같은 덕치를 통한 조식의 사회변혁론은 지나치게 원론적이고 이상적이 라는 측면에서 비판받기도 하지만, 훈척정치의 폐단이 문제가 되었던 당시, 제 도와 그것을 제대로 지키려는 인간의지 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작용을 할 수 있 었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고안된 민주적 절차가 점차 형 식화 될수록 인간성의 실현으로부터 멀어지는 오늘날의 상황에서도 형식화된 민주적 절차를 보완하거나 대체할 수 있는 것으로 주목될 수 있다. 또한 덕치의 이상은 현실을 재단하고 비판하는 척도로 작용함으로써 이미 충분한 의미를 가 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조식의 이러한 덕치는 관학파에서 훈구파로 이어 진 역사의 전개과정을 개인의 도덕적 수양을 토대로 하지 않고, 단지 법과 제도 에 의지한 정치를 지향한 것으로 파악하고, 그러한 단면적인 추구가 결국은 정 치․사회적인 다양한 문제들을 생성시켰다는 문제의식으로부터 제기되었다고 이 해된다.
        8.
        2007.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논문은 남명 조식이 정주학을 수용한 양상이 어떠했는가를 밝히고자 하였다. 관련 자료의 제시를 통해 ‘고증’에 초점을 두었으며, 󰡔학기유편󰡕을 중요 자료로 이용하였다. 조식의 저술에서 朱子보다 二程이 중시되었던 점에 착안하였고, 남명학에서 ‘실천’이란 두 글자가 학문적 특성을 논하는 데 중요한 단어임에 주 목하였다. 실천을 중시하였던 남명학의 특성상 주자보다 이정이 중시되었을 것 이고, 특히 明道가 중시되었음은 조식의 학문연원과 관련하여 중요한 사실이라 하겠다. 이것은 조식이 공자와 周濂溪・程明道・주자 이 네 사람의 초상화를 그 리고 때때로 존경하고 사모하였다는 사실로도 증명된다. 결국 退溪 李滉이 伊 川과 주자를 잘 배운 학자라면 조식은 이정, 특히 명도의 사상을 잘 체득한 학 자라고 할 수 있다. 남명학에 내포된 莊子的 요소, 陽明學的 요소 등 정주학 이 외의 여러 요소는 명도의 사상을 매개로 할 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9.
        200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6세기 초부터 17세기 중반은 남명의 교육사상이 형성되고 계승되는 시기이며, 그의 문인 및 사숙인들이 경상우도에 두루 거주하며 상호간에 활발히 교유하면서 하나의 학파를 형성한 시기이기도 하다. 남명은 교육이 비근한 것으로부터 시작해 야 하며, 하학에 대한 일이 선행되어야 하는 실천 중심의 교육을 강조하였다. 천도 의 묘리를 찾는 공부의 요체가 사친경형의 공부로부터 시작한 교육에 있음을 남명 은 주장한 것이다. 그는 하학상달의 공부를 ‘가까운데서 말미암아 먼 곳에 미친다’ 는 방법의 원리를 제시하고 있으며, 하학상달의 공부를 강조하는 교육은 오건․정 인홍․정구․김우굉․배신․이조․성여신․하항․유종지․유덕룡 등의 경우에서, 그리고 실천성의 강조는 오건․김우옹․정구․김효원 등에서 각각 그 계승을 살 펴볼 수 있었다. 남명의 실천 중심의 교육은 당시 유행하던 실천성이 결여된 성리 학의 명분론이나 관념적인 이론을 불식하고, 실천위주의 교육관을 제기한 데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남명의 실천 중심의 교육사상은 실 천과 결부된 교육목적의 설정, 실천이 결여된 교육실제의 난맥상 등을 극복하고 교육 전반에 걸친 뚜렷한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한국교육사상 실천적 교육사상의 선구자적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10.
        200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16세기 조선시대의 南冥 曺植(1501-1572)의 정치사상과 17세기 명말 청초의 鏡萬唐甄(1630-1703)의 정치사상을 비교한 논술하였다. 두 사상가는 130 년이란 시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마치 한자리에서 같은 주제를 갖고 토론하며 교류한 듯 여러 방면에 걸쳐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특히 부패하고 부조리한 정치현실에 대한 강력한 개혁의식과 실천정신은 그야말로 不謀而合이라 할 수 있다. 보통 성리학자들의 성향은 본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현학적 • 이론적 공소함 에 빠지가 쉽다. 막상 그런 현상은 성리학자들 사이에 빈번하였다. 그런 점에서 남 명과 주만은 철저히 이런 성리학자들의 단점을 실천적 · 개혁적 관점에서 보완해 나아갔다. 이로부터 두 사상가는 정치현실에 그 누구보다 민감하였고, 구체적 개혁 정책으로 당대 사회 정치적 부조리의 문제를 해소하려고 노력하였다. 결국 두 사상가는 당대보다는 후대에더 큰 빛을 발하며 사상사에 큰 족적을 남기었다.
        11.
        2003.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조식 사상을 연구하는 자료는 크게 두가지 종류가 있다. ⒫ 자료 - 『학기도(學記圖)』와 『학기유편(學記 類編)』, ⒬ 자료 - 시와 명(銘) 부(賦) 론(論), 편지, 상소문 등 문집에 실린 것들. 조식을 성리학자로 규정하는 사람들은 ⒫ 자료에 의존한다. 반면 ⒬ 자료에 의하면 조식은 양명학자이다. ⒫ 자료는 조식의 직접 저술이 아니며, 성리학 정초자들의 글을 모은 것이다. 반면 ⒬ 자료는 조식이 깨달아 안 것을 직접 쓴 것이다. ⒫ 자료에 의존하면, 조식의 사상을 성리학 정초자들의 사상으로 환원시켜 버린다. 그 결과 조식은 이론이 없이 실천만 파고든 묵수 주자학자가 되어 버린다. 반면 ⒬ 자료를 보면 조식은 거대한 자아를 추구한다. 이는 양명학의 '치량지' 이론과 비슷하다. 조식은 실천의 극한에서 창조적인 한 걸음을 내딛어서, 왕수인과 별개로 스스로 양명학적인 통찰에 도달한 것이다.
        12.
        2002.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Cho Sik was a great scholar in Chosun Dynasty. He was a contemporary scholar with Lee Hwang. We can see some statements of Cho Sik in the books written by Lee Ie(Yoolgog). It is obvious that his thoughts affected many scholars later. In addition to this, he taught many disciples some of whom became public officials, and some became civil leaders in the War named Imjinwoeran(the invasion of the Japan, 1592). His administrative thoughts are revealed in the Letters to the King(Sangso) more clearly. And so the author analyzed the Letters and classified his administrative thoughts. The findings were like these. His administrative thoughts could be summed 4 suggestions : leadership, personnel administration, administrative ideologies(the administration for the people and Minbon/民本 thoughts), the listening of public opinion, and the timing and Hersil(虛實, formal/substantial) as criteria for policy-making. His administrative thoughts belong to the style of Moral-training - oriented mentioned in the paper. Generally speaking, we can see that Cho-Sik emphasizes most the Moral-training of the leader and the recruitment based on that. The administration for the people and Minbon thoughts also are the ideologies for the leader. The listening of the public opinion and the criteria for policy-making wholly rely on the will of the leader. It follows that we can see that he suggested Moral-training and will of leader for the solution of the bureaucratic problems, and he rarely discussed practical systemic and institutional reforms. This seems to reflect his absence of practical experience as a public service in bureaucratic system. Nevertheless, his thoughts affected many practitioners and scholars later. And so we need to study the relationships with them and effects on them more clearly.
        13.
        2002.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is thesis deals with comparing and observing 『Shim Kyoung』 which Donggo wrote to Nammyoung for a present as well as the books written by Nammyoung and Donggo, their growing background and learning, their positions as government officers, and 「Moojinbongsa」 and 「Byounginbongsa」, letters having written to show respect to the King There are more records about Nammyung in 『Donggoyugo』 than in 『Nammyoungjib』. However, I am aware of the fact that the two books have almost the same content in them. 「Nammyoungshimkyoungbal」 has exactly the same content as 『Donggoyugo』. According to the comparition of these two books, I found that Donggo had sent the medicine material, calenda, 『Shimkyoung』, and other things to Nammyoung. Then Nammyoung sent appreciation letters to Donggo. In 『Shimkyoung』, Donggo suggested to Nammyoung that he became a government officer, but Nammyoung was only interested in morality. Donggo sent his son to Deoksan to grieve Nammyoung's death. They had the different pedigrees. Nammyoung's forefathers, who live in Huubcheon, didn't have any big government ranks. However, Donggo's forefathers had high government ranks. In their backgrounds some things are the same and some things are different. The things that were different were that Nammyoung was born in a rural area and his father died when he was 6 years old, but Donggo was born in Seoul and his father died when he was 26 years old. The things they had in common were that they all struggled economically, their mothers were all very clever, and they were not the eldest sons in their families. As they had different pedigrees, in the end Nammyoung became a scholar and Donggo became responsible for the national property. When Nammyoung was studying, I suppose that he was taught about learning from his father. However, Donggo learned about it from Lee, Yeonkyoung and Mr. Thansoo. When they were staying in Hyubcheon and Sangju, I suppose that they went to Hwang, Hyoheon to study, Nammyoung didn't go to school but Donggo went to school. Nammyoung changed his career objectives due to failing the exam to be a government officer, but Donggo started the job as a government officer because he passed it. Nammyoung's highest rank in his life was only Hyunkam, but Donggo was Youngeujung. However, Nammyoung was appointed to a high position by the King. In 「Moojinbongsa」written by Nammyoung, he insisted on 'Respect', which is the important item of his consideration. It is the same that in 「Byounginbongsa」Donggo insisted on 'Harmony' which is an important item of his consideration. In 「Moojinbongsa」, he made clear the troubles of the government officers and suggested to the King that he treat all the problems of the government very strictly. In 「Byounginbongsa」, Donggo insisted harmony and advised that they have to prepare the following King through logic which to choose the talented men. I am aware that both of them did their best with their position at that time. When Doggo was 33 years old, he presented 『Shimkyoung』to Nammyoung. When Donggo gave that. I supposed that he transmitted Nammyoung 'Su-ki-chi-in'(to control themselves by learning) of the important spirit of Confucianism. Nammyoung decided to himself that he would try to study harder when he received the book. Both of them had lived differently but they always cared for their people. The fact Donggo gave a present, 『Shimkyoung』 to Nammyoung. After much consideration, study and hearing from our country's political leaders, I have become aware that there is now more study and consideration being given to our country.
        14.
        2001.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e article aims to compare the thought and practice between Nammyeong Jo Sik(1501-1572), the Confucian scholar of the mid Choso˘n period and Yamazaki Ansai(1618-1682), the Confucian scholar of the early Tokugawa Japan. Most of the comparative studies are conducted to highlight the differences between the cases compared. People, for example, will expect from the comparative study of Nammyeong and Ansai's thoughts to see the differences of reception and development of the Neo-Confucian thought in Choso˘n and Tokugawa Japan. This article, however, focuses on the commonalities and similarities shared by the two Neo-Confucians who lived in the totally different political systems and backgrounds. Both of them concentrated not on how to philosophize their own thinking but on ways to actualize the truths revealed by their antecedents. Their lives, therefore, were consistent in practising the truths discovered by the sages. Their concrete methods of practice were Jing(敬) and Yi(義). The two thinkers actualized their beliefs: Nammyeong as Chushi(處士) in times of the massacre of literati in mid Choso˘n period, and Yamazaki Ansai as Binshi(賓帥) in the barrack state, a counry unfamiliar with Neo-Confucianism. They shared the common dreams of being the Wangshi(王帥) and truly corresponded to Chu Hsi(朱熹)'s idea of the citizen of the cosmopolitan 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