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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조선 말기에서 일제 초기는 국내외적으로 혼란과 격변의 시기였다. 서양의 종교가 국내로 유입되어 날로 확장되는 반면 유교는 나날이 위축되어 가고, 조선은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을 상실하는 암울한 시기다. 이 시기 조선의 유교 지식인들은 위기감과 함께 유교를 부흥시켜 국권회복의 돌파구로 삼고자 하는 孔敎運動을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일제시기 경남지역에서 공교운동을 가장 활발하게 전개한 곳은 진주 硯山의 道統祠와 산청 丹城의 培山書堂이다. 도통사 孔敎支會 설립은 惠山 李祥奎(1846-1922)가, 배산서당 朝鮮孔敎會 설립은 眞庵 李炳憲(1870-1940)이 각각 주도하였다. 그러나 주자학 일변도의 성리학 이념과 체제에 젖어 있던 당시 유림계에서는 도통사와 배산서당의 성현 숭상 방식이나 공교운동 추진 방식, 주자학을 비판하고 금문경학을 수용하는 데 대해 큰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도산서원에서는 도통사와 배산서당의 성현 봉향 방법상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지지를 철회하고, 또 경남지역 서원과 향교에도 배산서당 공교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섬으로써 당초 혜산과 진암이 추구하고자 했던 유교부흥운동이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비록 경남지역에서 공교운동은 실패하였지만, 일제시기 경남지역의 공교운동은 경남지역의 학문적 역량과 문화적 자신감을 전국 및 동아시아에 충분히 과시한 활동이었다. 혜산과 진암이 그 선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일제시기 경남지역 공교운동을 유교부흥을 통한 독립운동의 한 방법으로 인정하고, 그 역사적 의의를 더욱 심도 있게 지속적으로 재조명 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