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검색조건
좁혀보기
검색필터
결과 내 재검색

간행물

    분야

      발행연도

      -

        검색결과 2

        1.
        201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경남에는 명문가가 모인 마을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함양 개평 마을을 으뜸으로 꼽을 수 있다. 본고에서는 개평마을에 전해오는 노광 리의 풍천노씨가학십도를 통해 개평마을 풍천노씨 문중이 600여 년 간 명문가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을 살펴보았다. 조선시대 명문가에는 어떤 내용과 형태로든 가훈이 있었을 것이다. 가학십도에 적힌 가훈은 풍천노씨 선현들이 자신의 벼슬살이나 학문 수양에서 얻은 실증적인 경험을 후손에게 물러준 것이다. 또한 후손들 은 선조의 훌륭한 행적을 발굴하여 책으로 엮어 그 정신을 계승해 왔다. 이를 통해 아래와 같이 네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 가정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에게 공손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둘째, 관직생활에서는 겸손과 청렴을 강조하고 있다. 셋째, 국가적으로 외침을 당하면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하는데 앞장섰다. 넷째, 벼슬에 물러나서는 학문수양과 자연을 즐기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풍천노씨가학십도는 풍천노씨 문중이 명문가를 유지할 수 있는 선현의 정신이 무르녹아 있는 책이다.
        2.
        201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조선 말기에서 일제 초기는 국내외적으로 혼란과 격변의 시기였다. 서양의 종교가 국내로 유입되어 날로 확장되는 반면 유교는 나날이 위축되어 가고, 조선은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을 상실하는 암울한 시기다. 이 시기 조선의 유교 지식인들은 위기감과 함께 유교를 부흥시켜 국권회복의 돌파구로 삼고자 하는 孔敎運動을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일제시기 경남지역에서 공교운동을 가장 활발하게 전개한 곳은 진주 硯山의 道統祠와 산청 丹城의 培山書堂이다. 도통사 孔敎支會 설립은 惠山 李祥奎(1846-1922)가, 배산서당 朝鮮孔敎會 설립은 眞庵 李炳憲(1870-1940)이 각각 주도하였다. 그러나 주자학 일변도의 성리학 이념과 체제에 젖어 있던 당시 유림계에서는 도통사와 배산서당의 성현 숭상 방식이나 공교운동 추진 방식, 주자학을 비판하고 금문경학을 수용하는 데 대해 큰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도산서원에서는 도통사와 배산서당의 성현 봉향 방법상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지지를 철회하고, 또 경남지역 서원과 향교에도 배산서당 공교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섬으로써 당초 혜산과 진암이 추구하고자 했던 유교부흥운동이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비록 경남지역에서 공교운동은 실패하였지만, 일제시기 경남지역의 공교운동은 경남지역의 학문적 역량과 문화적 자신감을 전국 및 동아시아에 충분히 과시한 활동이었다. 혜산과 진암이 그 선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일제시기 경남지역 공교운동을 유교부흥을 통한 독립운동의 한 방법으로 인정하고, 그 역사적 의의를 더욱 심도 있게 지속적으로 재조명 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