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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학연구 KCI 등재 The Nammyonghak St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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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

제52권 (2016년 12월) 12

1.
2016.12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浩亭 河崙은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에 걸쳐 仕宦한 고위관료이다. 조선 개국, 이방원의 등극, 조선의 제도와 典章의 확립 등 중요한 국가 대사를 맡아 주도하였다. 그의 고위관료로서의 자취 때문에 문학적인 면모는 소홀히 여겨져 지금까지는 연구한 바가 없어 밝혀지지 않았지 만, 그는 실로 최고의 문학가였다. 그는 조선 초기 최고의 성리학자이고 문장가였다. 慶會樓의 記文을 지었고, 圃隱 鄭夢周, 惕若齋 金九容 등 당시 최상급 문인들의 시집 서문을 썼다. 그리고 고려 말 대문호로 그의 스승인 牧隱 李穡의 神道碑 銘을 지었다. 과거를 통해 출사한 文臣들이 직책에 맞는 능력을 갖추지 못 한 것을 보고, 重試를 실시하여 능력을 보강하려는 제도를 만들었다. 호정은 4번 明나라를 다녀옴으로써 그 당시 문화 교류에 있어 가장 큰 공헌을 했다. 鄭道傳이 경솔히 지은 表文이 明 太祖의 비위를 거슬렀 을 때, 직접 명 태조를 만나 상세히 분명하게 전후사정을 간곡하게 진술하여 문제를 잘 해결하고 왔다. 또 建文帝와 永樂帝의 즉위식에 참석하 였다. 돌아와서 지어 太宗에게 바친 「覲天庭」, 「受明命」 두 악장은 나중 에 명나라 영락제에게도 알려져 외교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많은 시를 지었으나 대부분 없어지고 문집에 실려 있는 시는 조선후기에 와서 수집한 시이다. 그 가운데 「漢江詩」는 漢陽 천도를 송축하는 시인데, 그 속에 임금님을 諷諫하는 교훈이 들어 있다. 「嶺南樓」시는 절경 속의 嶺南樓가 名勝임을 부각시키고, 영남루에 대한 애정을 담았다. 곧 성리학자들의 天人合一 사상이 배어 있다. 「慶會樓記」는 경회루의 중복과정을 서술하고 중건과정에서 君民一 體가 되는 조선 초기 건전한 국가적 氣運을 느낄 수 있고, 또 경회루의 건물 구조 하나하나에 治道의 의미를 부여한 독특한 문장이다. 「矗石樓記」도 촉석루에 올라 풍경을 보면서 牧民官이 백성을 위해 해야 할 일을 연상하도록 하여 단순한 물리적 건물로서의 촉석루가 아니고, 목민관이 백성을 다스릴 방안을 창출해 내는 정신적 생산 공간 으로서 의미를 부여했다. 浩亭의 시나 문장은 단순한 문예적인 시문에 그친 것이 아니고, 經世 濟民의 의미를 담은 전통 유학자의 충실한 문학이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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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조선의 16세기 『朱子大全』 刊行과 그 이후의 學問的 動向에 대해서 연구한 논문이다. 조선의 한문학은 주자의 영향을 받은 것이 크다. 그러나 『朱子大全』의 간행보급은 16세기에 와서 이루어 진다. 이 책을 바탕으로 16세기 퇴계와 율곡을 거치면서 조선 성리학은 최고의 절정기를 맞이하였다. 『朱子大全』 간행이후 조선 선비들의 학풍은 변하였다. 『朱子大 全』의 간행은 성리학을 『性理大全』 중심에서 『朱子大全』 중심으 로 변환하게 하였다. 그리고 『朱子大全』 속의 백록동 서원의 기록은 주세붕에 의해 소수서원을 창건하게 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번져나간 교육의 영향은 조선을 크게 변모시켰다. 『朱子大全』 속에 들어있던 주자의 시는 조선 선비들의 경모의 대 상이 되었다. 특히 <武夷櫂歌>의 영향은 조선 선비들로 하여금 <九曲歌>를 짓게 하였고, 조선 산수의 자연미를 새롭게 발견하게 하였다. 주희의 詩文은 조선 사림들의 문장의 전범이 되었으며, 조선의 문풍을 변화시켰다. 『朱子大全』 속의 이기철학의 영향은 조선의 철학적 사유의 틀을 바꾸게 하였다. 그 이후 벌어지는 이기철학은 조선의 학문을 더욱 깊고 오묘하게 발전하도록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향약에 대한 영향은 조선 의 풍속을 변화시켰으며 조선 사회를 더욱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밖에도 『朱子大全』의 영향은 여러 방면에서 생활문화와 사상의 기저를 변화시켰다. 위대한 책 한권이 세상을 바꾼다. 『朱子大全』 한권이 조선의 학문을 변화 시켰다. 16세기 『朱子大全』 한 책이 조선 의 선비사회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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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金萬重이 南海 謫所에서 『三國志演義』를 비롯한 통속소설 에서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힘이 문학이라고 하였고, 『東坡志林』에 서는 통속소설을 짓는 까닭이라고 언급하였다. 이러한 배경이 그가 蘇 東坡를 同一化樣相이라는 점에서 모종의 연속성을 갖는다는 전제 하에 『서포만필』 소재 일화를 통해 그의 소설 성립의 배경에 대한 전후사 정을 살펴본 것이다. 『西浦漫筆』은 김만중이 남해적소에서 저술한 에세이 모음집이다. 『서포만필』은 서포소설의 컨텍스트를 파악하는 측면에서나, 텍스트 와 컨텍스트 사이의 상호연관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신빙할 만한 일차적인 자료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서포만필』 탐구는 서포소설의 해석 시각을 새롭게 마련하는 데에도 중요한 참조사항이 되리라 생각 한다. 필자가 원전을 독파해본 결과, 서포가 남해적소에서 저술한 유배문학이 소동파가 海南島에서 남긴 유배문학과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 으며, 일정부분 차이점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었다. 이는 『서포만필』 분석을 거쳐 김만중이 소동파를 동일화한 양상을 통하여 서포소설 성립배경 과정을 일화 관련 기사를 분석하였다. 분석결과 김만중은 『서포만필』 하권에서 소동파 관련 일화 기사를 통하여 漢詩 창작만을 고집하던 종전의 양식에서 탈피하여, 소설 창작 의 효용론을 주장하였다. 그러한 사유의 특징이 결국 남해적소에서 서 포소설 창작의 모태가 되었음을 추론했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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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에서는 해외에서 이루어진 한국학의 업적을 오늘날의 관점에 서 비판하고, 한국학의 범위 확대와 질적 수준을 발전시키는 방안을 연구사적 검토를 통해서 모색하고자 했다. 여기서는 윌리엄 스킬렌드 의 『고대소설』에 수용된 연구사로서의 고소설 담론 및 그의 학문적 성과와 연구사적 의의를 검토하고, 국내외 관련 저작물에 나타난 고대 소설의 파급 효과와 학술적 공헌을 살펴보았다. 고대소설에서는 서론에서 언급한 실증적 방법론이 본론에 와서는 고소설 문헌자료의 분석에 엄격하게 적용되지 않았다는 문제점도 있었 다. 이러한 오류를 범한 주된 이유는 아시아소설에 대한 그의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역사적 문헌기록을 배제한 채 이루어진 스킬렌 드의 실증적 문헌연구가 영국소설에 기반한 그의 관념과 오리엔탈리즘에 의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윌리엄 스킬렌드가 소개한 근대적 문헌연구방법 은 한국 문헌학의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고 간주된다. 뿐만 아니라 고소설 문헌의 계보를 추적하는 가운데 언급된 국내외 소설담론의 존 재를 알려주기도 했다. 또한 『고대소설』은 원본 자료에 대한 실증적 연구의 중요성을 제시하여 한국 고소설사의 문제점을 환기시킨 점에서 도 크게 기여했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중국소설을 번역한 작품 또는 중국소설의 번안 작품의 존재를 다루고, 한국 고소설의 해외 번역 상황 까지 소개했다는 점에서 윌리엄 스킬렌드의 『고대소설』은 한국학의 세계화라는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큰 성과로 평가된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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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일본의 지성계에서 나타나는 中華思想은 ‘夏夷의 세계관 앞 에 받은 상처의 치유와 극복이라는 지성사적 노력’의 한 모습이라고 나는 본다. 우리와 일본은 각자가 모두 자신의 나라가 중국보다 한층 높은 수준의 학문을 축적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 믿음이 곧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으로 인식하고, 자기 나라를 문명의 주인이라고 자임하게 만든 힘이다. 중화주의의 극복과 해체는 이렇게 중화주의의 내부로부 터 이루어졌다. 본고는 위와 같은 문제의식 아래 조선과 일본이 내세웠던 자부심의 실체로써 두 나라의 경학 성과의 실상을 비교해 보았다. 그 방법으로 먼저 朝日 經學界의 土壤과 雰圍氣를 살펴보고, 이어 대학의 ‘讀音’, ‘著者’, ‘明德과 新民’ 세 爭點에 대한 註釋 양상을 비교하였다. 조선은 朱子學이 經學界의 主流를 이루는 가운데 書院을 중심으로 師說을 繼承·深化하였고, 일본은 자유로운 藩校와 私塾의 분위기 속에 自家의 見解를 제출한 경우가 많았다. 朝鮮 經學家들은 朱子學 內的 論理의 精緻한 分析을 통해 獨自的인 철학 논쟁을 만들고, 그것을 통해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논제를 만들어가며 獨自的인 학문 체계 를 구축하였다. 일본의 경학가들은 학자마다 이전의 성과를 모두 부정 하고 처음부터 각자의 학문의 체계를 새로이 쌓는 듯한 보습을 보였다. 知性의 浪費라는 측면이 문제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다양성과 비판의 자유 위에서 거둔 무수한 獨創的인 견해들이야 말로 일본 학계 를 풍성하게 한 힘이었다. 요컨대 朝日 양국의 특색 있는 경학적 성과는 ‘中華主意 克復과 解體’ 의 바탕이 되기에 충분한 수준이었다. 그 성과를 밑거름으로 한 양국의 ‘中華主意 克復과 解體’ 과정의 구체적인 진행 양상은 이후의 연구에서 조명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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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9년 慶尙道 三嘉縣 玉溪洞의 在地士族들이 玉溪亭契를 결성하였다. 옥계정계는 玉溪亭이라는 누정을 매개로 문인적 기질을 공유하고, 喪葬禮 때의 상호 부조를 통해 구성원 간의 결속력을 도모하는 일종의 洞契·洞約이 었다. 조선후기 동안 玉溪洞에는 慶州崔氏·咸從魚氏·淸州慶氏·恩津宋氏·義 城金氏 등의 여러 재지사족 가문이 세거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옥계동계 운 영을 주도함으로써, 향촌사회에서 재지사족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함과 동시 에 하층민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이에 18세기 전반기까지 옥계 정계는 계원의 상장례 때, 동리의 하층민을 일꾼으로 징발하여 노동력을 부 조하였고, 하층민의 결사체인 香徒 조직을 긴박하였던 것이다. 옥계정계 구 성원들은 상호 부조를 위해 곡물을 납부하였는데, 이것은 식리 활동을 통해 증식되어 계의 중요한 재정적 기반으로 활용되었다. 이와 같이 옥계정계가 동리에서 강력한 권위를 가지고 있을 때에는 재지사족들이 계를 통해 동리 하층민의 인적·물적 자원을 징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후기 사회·경제적 변화와 옥계정계 주도권을 둘러 싼 옥계동 재지사족 간의 갈등이 노정되면서, 옥계정계의 권위는 약화되어 갔다. 특히 재지사족 간의 갈등은 매우 복잡다기하게 전개되어, 18세기 동안 동일시기 에 복수의 座目이 작성되거나, 특정 가문의 계원이 전부 洞案에서 刀割되기 도 했으며, 옥계정계에서 이탈하는 가문도 생겼다. 이러한 갈등 속에 옥계정 계는 더 이상 동리의 통제 수단이 되지 못하였다. 이에 18세기 후반부터 옥계정계의 구성원들은 새로운 운영 방안을 모색해 나갔다. 향촌사회 통제와 관련된 사안을 배제한 새로운 절목을 제정하여, 동계 운영의 초점을 구성원 간 상호 부조에 국한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성격 변화는 향촌 내에서 옥계정 계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조치였지만, 반대로 재지사족 간의 갈등 요인을 해 소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또한 이때부터 옥계정계는 성리학적 자치 규범인 鄕約을 표방하기 시작하였다. 조선후기 성리학적 생활규범이 일상생활을 지 배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향약을 차용해 명분상으로나마 옥계정계 운영 에 대한 성리학적 권위를 부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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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교육용기초한자 자소표 制定을 위한 試案 연구」(2015)에서 제시한 ‘試案’과 현재 중국 교육부에서 제정하여 시행하고 있는 「現代常用字部件及 部件名稱規範」(2009)과의 상호비교를 통하여, 兩者 간의 得失을 따져 보고, 그 결과에 근거하여 ‘試案’의 미비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작성되었다. 이를 위하여, 우선 ‘試案’에서 제시한 310개 組 453개 기초자소와 중국의 441개 組 514개 部件을 서로 비교하여 일차적으로 아래와 같은 兩者 간의 차이를 가려내었다. 1. 양자가 동일하게 선정한 자소: 343개 2. 前者에서 따로 설정한 자소: 110개 3. 後者에서 따로 설정한 자소: 171개 본고는 위의 3과 4를 중심으로 하여 양자 간에 차이가 나는 원인을 분석한 결과, 그 원인은 아래와 같은 이유에서 비롯된 것임을 적출 할 수 있었다. 1. 楷書體와 簡體字 간의 乖離 2. 對象 字數의 차이 3. 문자의 系統性과 現實性에 대한 인식차이 4. 層次分析 방법의 채택여부 5. 기타 이상의 비교작업을 통하여 양자 간의 得失을 糾明해 본 결과, 양자 모두 각 각 설정한 ‘자소추출원칙’을 일관되게 지키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게 확인되 었고, 疏漏한 부분 역시 적지 않게 발견되었다. 그러나 작업을 통하여 전자 의 문제점을 다시 검토하고 보완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게 되었으 며, 자소 數의 增減 、分組(組 나눔) 등의 문제에 있어서는 구체적으로 修訂 해야 할 부분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수확이라고 판단되었다. 이외에 도, 본고의 작업결과는 한자문화권에서의 한자공용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 초자료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며, 현재 韓中 양국에서 각각 公式字形으로 사용하고 있는 楷書體와 簡體字간의 互換原理를 파악하는데 있어서의 중요 한 학습자료로도 이용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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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계서원을 비롯한 대부분의 서원은 지역의 고등 교육기관, 출판사 및 도서관이라는 직접적으로 교육과 관련된 역할 외에, 수많은 부작용 을 불러일으킨 향촌 유림의 지역운영 혹은 지배 기관으로 작용하였고, 중앙 정계와 연결고리를 형성하며 학파와 정파 활동의 지역 거점 역할까 지 수행하였다. 특히 학파와 정파 활동의 지역 거점 역할이라는 측면에 서 남계서원의 경우, 건립과정이나 건립초기에는 남명학파나 북인정권 의 영향아래에 있었지만, 인조반정이후에는 남인계 서원으로, 戊申亂과 갑술환국이후에는 다시 노론계 서원으로 그 성격이 변화했다. 이러한 사실에서 보자면 남계서원이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변화시켜갔는지, 그리고 왜 남계서원이 그렇게 변화해 갈 수밖에 없었는지는 남계서원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주요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점에서 이 글은 남계서원의 성격변화와 그 과정을 살펴보고, 남계 서원에 주향되고 있는 정여창의 위상은 그와 같은 서원의 변화 속에서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논의는 먼저 서원을 세운 인물들을 중심으로 창건 당시 남계서원의 성격을 살펴본 후, 이것을 이어 후대로 내려가면서 남인계 서원과 노론계 서원으로 그 성격이 변해가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고, 마지막 결론에서 김굉필과의 비교에서 정여창의 위상을 살펴보고 있다. 김굉필의 경우 그의 진외증손인 정구에 의해 천곡서원과 도동서원 등에서 정이와 주희를 직계승한 인물로 추존되는 모습과 함께, 고향인 현풍과 성주ᆞ고령 등의 낙동강 중류 지역에서 상당한 위상을 가질 수 있었다. 반면에 정여창은 남명학파의 몰락 이후, 뚜렷한 계승자의 부재와 함께 정파와 학파적 기반마저 상실함으로써 더 이상의 위상제 고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남명학파의 몰락은 남명학의 전승뿐만 아니 라, 남계서원의 성격변화와 정여창의 위상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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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5세기 초 함양 개평마을에 정착한 풍천노씨 가문이 번창하여 발전한 과정과 가풍(家風)과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것이다. 풍천노씨가는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과 예조참판을 지낸 노숙동이 하동정씨 정복주의 사위인 김점의 딸과 혼인하여, 외손봉사를 통해 개평마을에 정착 하였다. 개평의 풍천노씨가는 공신이었던 노숙동에 이어 아들 노분과 손자 노우명을 거쳐 증손자인 노진에 이르러 가문이 크게 번창하였다. 노진은 이조판서로서 현달하였고, 대학자로서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기 때문에, 지리산권 일대의 영, 호남 지식인과 후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노진 이후로도 개평마을의 풍천노씨가에서는 왜란과 호란 때에는 많 은 의병장이 배출되었고, 17세기 이후에는 양반들의 명단인 향안(鄕案) 에 함양에서 가장 많은 인물이 수록될 정도로 번창하였다. 특히 19세기 에 이르러서 호조참판을 지낸 노광두나, 성리학과 문장에 뛰어난 노광리 를 배출하였고, 일제 시대에는 신간회에 가담하여 민족의 장래를 고민하 는 인물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개평마을의 풍천노씨가가 번창한 것은 향당에서의 효제(孝 悌)와 조정에서의 충신(忠信), 그리고 매사에 예의염치를 중시하였던 가풍의 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개평마을의 입향조 노숙동은 성실과 신의에 바탕을 두고 수신과 출사에 걸쳐 지켜야 할 도리를 밝힌 ‘성신염공근간화혜(誠信廉公謹簡和惠)’ 8자 유훈을 남겼고, 아들 노분 은 수신과 청렴한 관직생활을 강조한 ‘청신염결’, 손자 노우명은 일상 행활에서의 중용(中庸), 증손자인 노진의 종형인 노상은 안빈낙도(安 貧樂道)를 가훈으로 남겼다. 이러한 유훈을 이어받은 노진은 노숙동의 8자 유훈을 가문의 법도로 확정짓고 효제를 솔선수범하였으며, 중용을 강조하였다. 이어 노진의 종제 노주는 나라가 위급할 때에 거의(擧義) 하였고, 노진의 종증손 노형운은 효제충신과 예의염치를 강조하였으 며, 노진의 증손 노형필 은 정주의 격언에 따른 실천을 중시하였다. 특히 노형운이나 노형필 등은 가풍 외에도 그들이 사사(私事)하였던 한강 정구의 명체적용(明體適用)이나 예학, 여헌 장현광의 지행병진 (知行竝進)의 영향을 깊이 받은 것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효제를 토대로 향당과 출사의 가풍을 수립하였던 풍천노씨가 에서는 향촌사회에서 족보를 간행하고 사당과 서원향사에도 더욱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1701년 이후로는 마을의 경쟁관계에 있던 하동정씨 와 연합하여 도곡서원을 설립・운영함으로써 가문의 명성을 높이고 두 가문의 화합을 대외적으로 과시하였던 것이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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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에는 명문가가 모인 마을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함양 개평 마을을 으뜸으로 꼽을 수 있다. 본고에서는 개평마을에 전해오는 노광 리의 풍천노씨가학십도를 통해 개평마을 풍천노씨 문중이 600여 년 간 명문가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을 살펴보았다. 조선시대 명문가에는 어떤 내용과 형태로든 가훈이 있었을 것이다. 가학십도에 적힌 가훈은 풍천노씨 선현들이 자신의 벼슬살이나 학문 수양에서 얻은 실증적인 경험을 후손에게 물러준 것이다. 또한 후손들 은 선조의 훌륭한 행적을 발굴하여 책으로 엮어 그 정신을 계승해 왔다. 이를 통해 아래와 같이 네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 가정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에게 공손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둘째, 관직생활에서는 겸손과 청렴을 강조하고 있다. 셋째, 국가적으로 외침을 당하면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하는데 앞장섰다. 넷째, 벼슬에 물러나서는 학문수양과 자연을 즐기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풍천노씨가학십도는 풍천노씨 문중이 명문가를 유지할 수 있는 선현의 정신이 무르녹아 있는 책이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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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의 발달과 농촌의 도시화로 인하여 각종 농기계가 도입되면서 혼자서도 농사지을 수 있게 되었고, 들녘을 가로지르던 농부들의 노랫 가락은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사람들은 온갖 이야기를 풀어내던 사랑방 대신 마을회관에 모여 대화를 나누기보다는 텔레비전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화면이 시키는 대로 웃고 울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제 더 이상은 과거와 같은 자연적이고 역동적인 구비문학의 전승현장은 찾아보기 어렵게 된 것이다. 함양군 지곡면 개평마을에 남아있는 구비문학 자료를 찾기 위해서는 현장의 목소리를 직접 채록하여 지역민의 정서 표출 욕구를 풀어내야 하겠지만 이야기판이나 노래판을 벌이기에 여건이 마땅치도 않고 몇몇 사람의 노래나 이야기만으로 마을을 대표한다고 할 수도 없다. 따라서 가장 최근에 조사된 『한국구비문학대계』 개정, 증보판의 내용이 자료로서의 가치가 충분하기에 대계의 자료를 중심으로 개평마을의 설화와 민 요를 살펴보았다. 개평마을의 이야기와 노래가 지니고 있는 최근의 모습은 마을 공동체의 변화와 함께 끊임없이 문화가 창출되고 변용되는 시공 간이 지닌 구비문학의 양상을 살피는 미시적 모델이 될 수도 있다. 마을 주민들은 마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주민들의 유대와 협력을 중시한다. 여성 제보자들은 허구적이며 상상력에 바탕을 둔 이야기를 즐기며, 남성 제보자는 역사적 사실이나 실제성을 증명할 수 있는 이야기에 공을 들인다. 여성들의 이야기에서도 부모에 대한 효도와 며느리로서 집안을 일으키고 잘 살아야한다는 부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인생을 들여다보고 살피는데 있어서도 여성들의 이야기는 운명적인 데가 많다. 타고난 팔자는 피할 수 없다고 믿으면서도 행운과 불운에 대해 민감하며, 우연과 행운에 기대와 희망을 걸고 살아간다. 구비문학 현장에는 여성제보자들의 이야기와 노래가 많다. 남성들은 이야기판에 관심이 없거나 직접 겪은 일이 아니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감정표현에 솔직하고 욕망을 드러내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여성제보자들의 이야 기는 인간의 솔직한 감정표현이라고 하겠다. 오랜 세월 여성들은 자연적이고 자발적으로 민요를 가창했을 것이며,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도 즐기고 만족하며 노래불렀을 것이다. 자신 들의 힘들고 고된 삶을 이야기로 풀어내기보다는 민요에 얹어서 부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타박네가 엄마 찾아 산소 가는 사연을 노래 부르며 어머니로서보다는 딸로서 어머니를 찾고 싶은 욕망을 드러냈으며, 계모가 사위 죽이려는 노래에서는 딸이나 여자로서의 꿈과 행복이 가장 좋은 일조차 방해받을 수도 있다는 한스러움을 노래했던 것이다. 농삿일이 기계화되고 놀이조차 행사나 축제의 하나로 통합되면서 여성들이 모여서 ‘노랫가락’이나 잡가를 부르고 놀게 되었던 일까지 이제는 오래 전의 추억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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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개평마을의 문화재로 지정된 5개의 전통주택을 중심으로 그 특징을 고찰하고자 한다. 연구 내용은 각 가옥에서 발견되는 건축적 특징을 알아보며, 이들에게 어떠한 공통점이 있으며, 그러한 점들이 인근 지역의 가옥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를 찾아본다. 연구 결과는 경남서부 지역과 전남 동부 지역의 건축들이 서로 문화적 접촉을 통해 유사한 영향권 내에 있었음을 밝히는데 기초적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는 점에 의의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