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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恩津林氏 가문은 16세기 葛川 林薰과 瞻慕堂 林芸이 나와 학문과 덕행으로 重望을 얻어 儒林社會에서 家門의 聲價를 높였다. 瞻慕堂의 손자 林谷 林眞怤가 외조부 立齋 盧欽, 蘆坡 李屹 등의 南冥學派 계통의 학문을 계승하여 퇴계학과 남명학을 아우르는 학문을 이루었다. 임곡은 三嘉로 옮겨와 활동하였는데, 鄭桐溪, 許眉叟, 趙澗松 등과 교유를 통해 학문의 폭을 넓히고 활동범위도 넓혔다. 특히 허미수와의 교유를 통해서 近畿南人의 학자들의 학문 경향도 접하게 되었다. 임곡은 慶尙右道 학자 가운데서는 문집의 양이 비교적 많은 편이고 많은 제자를 길렀다. 특히 그가 大君師傅에 제수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학문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증명해주는 것이다. 임곡 이후 이 가문의 학문이 끊어진 것이 아니고 20세기까지 면면히 계속되었다. 임곡의 아들 虛齋 林如松과 反求堂 林如栢도 모두 家學의 전통을 계승하여 학문을 갖춘 인물이었다. 반구당은 龜溪書院 원장에 추대될 정도로 학문과 명망이 있었다. 구계서원 원장으로서 龜巖 李楨 의 弘揚과 龜溪書院 중건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허재와 반구당의 아들들도 학문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허재의 아들 述齋 林東遠, 反求堂의 아들 錦岡 林東茂, 梅軒 任東說, 潤叟 林東迪 등이 학문 활동을 크게 했다. 林谷의 손자 시대가 임곡 후손들의 학문 활동이 가장 왕성하던 시기이고 유림의 推重도 가장 크게 받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 이후로 집안 외적인 상황으로는 1623년 仁祖反正 이후 慶尙右道 지방의 南冥學派 침체와 西人들의 회유 등으로 경상우도의 학문 전체가 떨치지 못하던 시대가 계속되었고, 집안 내적으로는 가난과 단명 등으로 家運이 번창 하지 못하여 학문 활동이 점차 위축되어짐을 면치 못하였다. 그래도 이 집안은 慶尙右道에서는 오랜 기간 대대로 孝悌를 중심으로 실천 위주의 학문과 저서를 중시해 온 가문으로 江右 地方의 대표적인 學者家門으로 손꼽을 수 있다.
        2.
        201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晉陽河氏 가운데서 河珍을 시조로 하는 司直公派는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에 名公巨卿이 배출되어 대단히 번성하였다. 그러나 領議政 河演, 大司諫 河潔 등이 현달하여 서울로 옮겨가는 바람에 진주에서는 명성이 줄어들었다. 다시 그 후손 중에 咸吉道 觀察使를 지낸 河襟이 朝鮮前期에 진주로 還故함에 따라서 다시 문호를 이루게 되었다. 이후 ‘南冥 이후 제일인자’라는 명성을 얻은 謙齋 河弘度와 그 아우인 樂窩 河弘達, 그리고 낙와의 아들이자 겸재의 조카인 雪牕 河澈 등이 나와 南冥學을 계승하여 큰 학문을 성취하여 이 家門의 격을 높였다. 科擧나 仕宦을 통한 번성은 아니었으나 학문과 儒論을 주도하여 지역 유림사회에서 큰 역할을 해냄으로써 집안을 현저하게 만들었다. 河東[조선말기까지는 晋州] 安溪마을에 거주했던 晉陽河氏 司直公派 가문의 역사와 특성을 자세히 고찰해 보고, 그 가운데 가문을 번성하게 한 대표적인 인물들을 선별하여 그들의 유림사회에서의 행적을 고찰하여 밝혔다.
        3.
        201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浩亭 河崙은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에 걸쳐 仕宦한 고위관료이다. 조선 개국, 이방원의 등극, 조선의 제도와 典章의 확립 등 중요한 국가 대사를 맡아 주도하였다. 그의 고위관료로서의 자취 때문에 문학적인 면모는 소홀히 여겨져 지금까지는 연구한 바가 없어 밝혀지지 않았지 만, 그는 실로 최고의 문학가였다. 그는 조선 초기 최고의 성리학자이고 문장가였다. 慶會樓의 記文을 지었고, 圃隱 鄭夢周, 惕若齋 金九容 등 당시 최상급 문인들의 시집 서문을 썼다. 그리고 고려 말 대문호로 그의 스승인 牧隱 李穡의 神道碑 銘을 지었다. 과거를 통해 출사한 文臣들이 직책에 맞는 능력을 갖추지 못 한 것을 보고, 重試를 실시하여 능력을 보강하려는 제도를 만들었다. 호정은 4번 明나라를 다녀옴으로써 그 당시 문화 교류에 있어 가장 큰 공헌을 했다. 鄭道傳이 경솔히 지은 表文이 明 太祖의 비위를 거슬렀 을 때, 직접 명 태조를 만나 상세히 분명하게 전후사정을 간곡하게 진술하여 문제를 잘 해결하고 왔다. 또 建文帝와 永樂帝의 즉위식에 참석하 였다. 돌아와서 지어 太宗에게 바친 「覲天庭」, 「受明命」 두 악장은 나중 에 명나라 영락제에게도 알려져 외교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많은 시를 지었으나 대부분 없어지고 문집에 실려 있는 시는 조선후기에 와서 수집한 시이다. 그 가운데 「漢江詩」는 漢陽 천도를 송축하는 시인데, 그 속에 임금님을 諷諫하는 교훈이 들어 있다. 「嶺南樓」시는 절경 속의 嶺南樓가 名勝임을 부각시키고, 영남루에 대한 애정을 담았다. 곧 성리학자들의 天人合一 사상이 배어 있다. 「慶會樓記」는 경회루의 중복과정을 서술하고 중건과정에서 君民一 體가 되는 조선 초기 건전한 국가적 氣運을 느낄 수 있고, 또 경회루의 건물 구조 하나하나에 治道의 의미를 부여한 독특한 문장이다. 「矗石樓記」도 촉석루에 올라 풍경을 보면서 牧民官이 백성을 위해 해야 할 일을 연상하도록 하여 단순한 물리적 건물로서의 촉석루가 아니고, 목민관이 백성을 다스릴 방안을 창출해 내는 정신적 생산 공간 으로서 의미를 부여했다. 浩亭의 시나 문장은 단순한 문예적인 시문에 그친 것이 아니고, 經世 濟民의 의미를 담은 전통 유학자의 충실한 문학이다.
        4.
        2016.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晋陽姜氏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名門大族으로 역사상 많은 인물을 배출해 각 방면에서 크게 활약해 왔다. 진양강씨는 모두 高句麗 말기의 장군 姜以式을 시조로 삼는다. 강이식의 후손 가운데 고려 후기 姜啓庸은 벼슬이 國子博士였으므로 그 후손들을 博士公派라 일컫는다. 강계용의 손자 姜師瞻은 벼슬이 監察御史였으므로 그 후손들을 御史 公派라고도 한다. 어사공은 공목공의 증조부이다. 恭穆公 姜蓍는 1339년 晋州에서 태어났다. 1357년 成均試에 합격하여, 1362년 출사한 이후 내외의 여러 관직 을 거쳐 門下贊成事에 이르고 晉山君에 봉해졌다. 恭穆公이 가문의 위상을 크게 격상시켰고, 공목공에 이어 그의 형제 와 아들들이 모두 정승의 반열에 들어 일국의 명문이 되었다. 당시 불교가 성행하던 시대에 이미 儒敎思想을 철저히 실천했고, 실 용학문인 農學에도 관심을 가져 農書를 간행해서 보급했다. 두 아들 通亭 姜淮伯, 通溪 姜淮仲이 朝鮮 왕조에 다시 출사하여 가문의 기반을 닦았다. 이후 姜碩德, 姜孟卿, 姜希顔, 姜希孟 등 학문에 있어서나 仕宦에 있 어서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나와 朝鮮王朝 내내 名門家로서의 위상을 유지했다. 이 가문이 이렇게 장기간 동안 명문가로서의 위상을 유지할 수 있었 던 것은, 好學과 興學의 정신, 孝友와 忠節을 숭상하는 정신, 겸양과 節儉을 중시하는 정신, 實學的 분위기, 禮讓崇尙의 家風, 행정능력의 출중함, 中國文物의 수용정신 등이 原動力이 되었던 것이다.
        5.
        201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眞庵 李炳憲은 조선말기의 개혁적 유학자다. 본래 俛宇 郭鍾錫의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유학의 개혁을 통한 구국에 뜻을 두고 중국 강유위의 제자가 되어 今文經學을 공부하고 孔子敎운동을 전개했다. 西歐文物이 밀려들어오고 日本의 침략 마수를 뻗기 시작하던 19세기 후반기에 태어나 儒敎가 급속도로 망해가고 우리 傳統이 무너지는 것을 직접 목도하며 성장하였다. 그래서 유교를 復原할 수 있는 방안으로 유교를 종교화 하여 孔敎라 이름하고, 孔子를 敎祖로 삼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공교의 사상적 기반으로 삼기 위하여 今文經學을 공부하였다. 그는 국권을 회복하고 백성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유교라고 확신하였는데, 그 유교는 우리 나라에 두루 퍼져 있는 宋學이 아니고 孔子의 가르침을 원래 모습인 孔敎였던 것이다. 유교가 개혁을 통해서만 민족을 이끌 수 있고 전통문화를 지켜 나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의 孔敎運動은, 培山書堂에 文廟를 지어 孔子를 享祀하는 정도에서 그치고 말아 실제로는 크게 확산되지 못 했다. 시대변화에 무관심한 保守儒林들의 악랄한 반발로 그의 이상은 실현되지 못 했다. 그런데도 그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한 평생 孔敎運動에 헌신하였다. 비록 그의 孔敎運動은 성공을 거두지 못 했지만, 그는 韓國儒敎史上 가장 독특한 유학자요 사상가요 종교이론가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저서를 남겨 그의 유학사상을 수록했는데, 이는 韓國思想史에 새로운 경지를 연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康有爲의 大同思想을 바탕으로 華夷觀을 극복하고 四海同胞主義를 제창하였고, 變法自疆에 의한 국가발전을 도모하고, 민족의 自矜心을 고취하였다. 그는 孔敎運動을 통해 우리 민족을 보존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韓國學述史上 본격적인 今文經學者이다. 또 今文學에 바탕하여 儒敎經典을 재해석하여 『易經今文考』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이는 韓國經學史上 독특한 업적이다. 朱子學 일변도의 한국학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은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보수적 유림들의 극렬한 반발 아니라 해도, 급속하게 변하는 시대조류에 孔敎를 통한 儒敎의 復原과 民族의 自尊의 추구가 실효를 거두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었다. 아무튼 眞庵은 많은 儒學者들 가운데서도 가장 독창적인 학자고, 금문학을 도입한 특이한 학자고, 서양의 학문도 선구적으로 상당히 이해하였으며 당시 중국 사정이나 학계의 동향을 가장 잘 아는 학자였다. 일본과도 무조건적인 투쟁이 아닌 설득을 통하여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다.
        6.
        201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俛宇 郭鍾錫이 지은 「南冥墓誌銘」은, 南冥을 두고 지은 傳記文字 가 운데서 가장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서술이라 할 수 있다. 남명 전기문자 의 최후결정판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남명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빠짐 없이 수록해 놓았다. 묘지명으로서는 매우 긴 작품으로 일반적인 묘지명의 틀과 다른 점이 많다. 면우는 이 묘지명을 지으면서 자료를 최대한 널리 수집하여 신중에 신중을 기하였고, 다 완성된 뒤에도 당시 慶尙道 지역에서 문장으로 손꼽히는 제자 深齋 曺兢燮과 晦峯 河謙鎭에게 문제점을 지적하여 같 이 수정하고 보완하여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원래의 請文者 弦齋 曺庸相을 통하여 深齋가 사소한 문제로 지나치게 장기간 문제를 지적하고 나오자, 마침내 자기가 지은 「南冥墓誌銘」은 폐기하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그 9년 뒤인 1926년에 간행된 俛宇集 속에 실린 俛宇의 시문 가운 데 南冥을 낮게 평가했다는 혐의를 받을 글이 발견되어, 남명 후손들은 출판하여 보내 온 俛宇集을 거절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俛宇 측과 관계가 멀어져 「남명묘지명」은 실제로 남명 묘소에 묻히지 못 했다. 「南冥墓誌銘」에서 俛宇는, 南冥의 偉大性을 부각시키고, 敬義가 南冥思想의 핵심임을 밝히고, 南冥의 治學方法을 체계화하고, 南冥의 憂國憐民사상을 부각시키고, 南冥의 學德의 특징을 宋朝 諸賢에 비교하 였고, 南冥의 雅號의 의미를 밝히고, 文廟從祀 疏請 등 남명 推崇事業을 소개하는 등, 내용이 가장 다양하면서 풍부하다. 단언컨대, 「南冥墓誌銘」은 남명에 관한 傳記文字 가운데서 가장 종 합적이고 체계적이고 심도 있는 자료라 할 수 있다. 남명이 직접 지은 詩文에는, 남명의 언행과 생활상을 이해할 자료가 거의 없는데, 제자나 친구 後學들이 지은 이런 다양한 종류의 傳記文字 가 존재함으로 해서 남명을 연구하는 자료로서 유용하게 활용할 수 높은 것이다.
        7.
        2013.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南冥 曹植은 退溪 李滉과 더불어 朝鮮을 대표하는 학자다. 그의 사후 그의 생애를 기록한 여러 傳記文字가 존재한다. 그 가운데서도 그의 神道碑는 여느 인물들과는 달리 네 개나 존재한다. 신도비는 하나만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1609년 남명이 領議政에 追贈됨으로 해서 당시 대표적인 제자라 할 수 있는 來庵 鄭仁弘이 神道碑를 지었다. 그러나 1623년 仁祖反正이 일어나 來庵이 처형되자, 죄인이 지은 神道碑는 둘 수 없어 즉각 없애버렸다. 다시 神道碑의 글을 받아 세울 필요가 있을 때, 남명의 손자 曺晉明이 謙齋 河弘度에게 請文했다. 겸재는 자신은 지을 수 없다는 뜻을 표하였다. 대신 西人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志節로 널리 알려진 淸陰 金尙憲에게 請文하도록 주선해 주었다. 그러나 淸陰은 지어주지 않았다. 당시 남명의 弟子나 後學들로 주축을 이루었던 大北派가 몰락한 직후라 南冥學派는 매우 곤경에 처해 있었다. 겸재는 南冥學派를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西人들과 제휴할 필요를 절실히 느꼈기 때문에 西人 가운데서 영향력이 있는 淸陰에게 청문하도록 주선했던 것이다. 淸陰이 지어주지 않자, 당시 南人의 영수였던 龍洲 趙絅에게 청문했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지어주지 않았다. 그 뒤 용주보다 후배로 南人의 영수인 眉叟 許穆과 西人의 영수인 尤庵 宋時烈에게 청문하여 두 편의 神道碑文를 받았다. 그 당시는 德川書院을 南人들이 주도하였으므로 南冥의 묘소 밑에 眉叟가 지은 神道碑를 세웠다. 尤庵이 지은 神道碑文은 나중에 三嘉 龍巖書院의 廟庭碑로 세워졌다. 1764년 『南冥別集』을 만들어 南冥에 관계된 附錄文字를 수록할 때도 眉叟와 龍洲가 지은 神道碑文은 수록되었지만, 尤庵이 지은 神道碑文은 수록되지 않았다. 처음에 南人의 영수와 西人의 영수에게 南冥의 碑文을 동시에 받은 것이 論難의 발단이었다. 두 사람은 學問의 方法이나 文章體裁가 다르기 때문에, 보는 시각에 따라서 그 碑文은 처음부터 문제가 될 수 있었다. 眉叟는 스스로 ‘漢나라 이후의 글은 안 본다’라고 선언할 만큼 六經에 바탕한 古學 위주의 학문을 했고, 文章도 아주 簡明하면서 含蓄的이었다. 반면 尤庵은 철저한 朱子學 신봉자였고, 문장도 朱子처럼 내용 위주의 雄渾, 質朴한 文體를 즐겨 사용하였다. 南冥의 후손들은 애초에 어느 특정 黨派에 얽매인 것은 아니었지만, 眉叟가 지은 神道碑文에서, 제목을 「南冥先生神道碑」라 하지 않고 「德山碑」라고 한 점 , 南冥이 學問淵源이 없이 독자적으로 一家의 學問을 이룬 것처럼 서술한 점, 氣節만 강조한 점, 이미 처형된 鄭仁弘의 이름을 비문에 특별히 기록한 점, 자손을 수록하지 않은 점 등에 강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래도 南人系 儒林들이 眉叟를 워낙 尊崇하기 때문에 불만을 가진 南冥 후손들은 어쩌지는 못 하고 오랜 세월을 지내왔다. 그러다가 眉叟가 南冥을 존경하지 않는 느낌을 주는 내용이 담긴 「答學者書」를 남명 후손들이나 西人系列의 인사들이 입수하여 보게 되자, 眉叟가 지은 神道碑에 대한 불만이 더욱 크게 고조되었다. 1879년부터 勉菴 崔益鉉, 淵齋 宋秉璿, 心石齋 宋秉珣, 老栢軒 鄭載圭 등 老論系 學者들이 眉叟가 지은 神道碑文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尤庵이 지은 神道碑를 칭찬하자, 南冥 後孫과 西人系 儒林들은 尤庵이 지은 碑文을 세울 운동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眉叟가 지은 南冥 神道碑에 강한 불만을 갖고 있던 남명 후손들이 1926년에 이르러 眉叟가 지은 神道碑를 넘겨 버렸다. 그러자 南人들은 南冥 후손들을 대대적으로 성토하면서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大邱覆審院에까지 가는 5년 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결과적으로 1차 2차 소송에서는 남인들이 이겼지만 최종심에서는 曺氏들이 이겼다고 한다*. 眉叟가 지은 神道碑는 다시 서지 못 했고, 묘소 밑에는 尤庵이 지은 神道碑만 서 있게 되었다. 두 비석이 다 특징이 있고, 濟南 河經洛의 條卞처럼 자세히 들여다보면 眉叟가 지은 碑文도 큰 문제가 없지만, 이해하기 쉽고 南冥을 尊崇하는 점은 尤庵碑가 더 낫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네 개의 南冥神道碑는 각각 특색이 있고, 또 그 撰者들은 모두 학문적으로나 영향력에 있어서 당대의 최고의 인물이었으므로, 오늘날 와서 보면, 남명을 연구하는 데 네 개의 신도비가 있는 것은 오히려 크게 도움이 된다.
        8.
        2013.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咸安을 본관으로 하여 함안에 세거해 온 咸安趙氏는, 趙鼎, 趙丹碩으로 이어지는 上祖가 있지만, 文獻에 의한 고증이 불가능하고, 또 함안과 관계된 기록을 찾기 어렵다. 高麗末 琴隱 趙悅에 이르러서야 함안에 정착한 확실한 기록이 있다. 琴隱으로부터 치더라도 이미 600년이 넘는 오랜 기간을 한 곳에서 살아왔다. 중간에 晋州 靑松 등지로 移居한 일파도 있지만, 대대로 함안에서 최대의 성씨로서 집성촌을 이루고서 많은 인물을 배출하며 살아 왔다. 琴隱의 高麗王朝에 대한 節義를 지켰고, 漁溪가 生六臣으로서 志節을 지킨 이래로 門聲이 더욱 널리 퍼졌다. 丁酉再亂 때 大笑軒이 순절함에 따라 명문이 되었다. 대소헌의 學問과 忠節은 琴隱 漁溪로 이어지는 가문의 전통과 南冥이나 남명의 제자들로부터 받은 실천위주의 교육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 동안 9명의 문과급제자, 13명의 忠節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해 내는 등 학문과 충절로 이름난 집안이 되었다. 大笑軒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오는 데는, 오랜 기간 咸安趙氏 가문의 선조들의 온축된 傳統과 기운이 그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대소헌이 배출됨으로 해서 咸安趙氏 가문은 전국 어느 가문에도 손색이 없는 높은 위상을 획득했다고 말할 수 있다.
        9.
        2013.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覺齋 權參鉉은, 평생을 宜寧에서 초야에 묻혀 학자로서 일생을 보냈다. 선조인 霜嵒의 志節을 물려받고, 어린 나이에 淵齋 宋秉璿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栗谷, 尤庵의 학통을 계승한 학자였다. 그는 격변하는 시대조류 속에서 전통 儒學者의 자세를 견지하며 道學의 연구와 보전에 힘썼고, 제자 교육에 誠力을 다했다. 그리고 평생 많은 漢詩文을 저술하여 자신의 감정과 사상을 표현하여 남겼다. 신학문의 보급과 확대 속에서 유학의 보전과 전승에 힘을 다 쏟았지만, 이미 유학은 시대의 主潮가 아니라 국가나 대중으로부터 관심 밖으로 말려나는 상황이었으므로, 시대와 인심은 그의 뜻과 점점 멀어져 갔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좌절하기 않고 최후의 일각까지도 자신의 召命이 무엇인지를 자각하고 바른 길을 추구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수준 높은 저술과 많은 제자들을 길러 전통유학자로서 마지막 세대를 의미 있게 보냈다. 새로운 문명을 거부한 고루한 儒學者로 볼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 점을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10.
        2010.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月皐 趙性家는 19세기에 굴기한 慶尙右道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경사우도의 蘆沙學派의 首長 역할을 하였다. 어릴 때부터 月村의 문하에서 학문에 전념하였고, 장성한 이후로 蘆沙 문하에 30년을 출입하였고, 蘆沙 만년에 「猥筆」을 전수받을 정도의 대표적인 학자로 인정을 받았다. 또 노사 사후 노사를 모신 高山書院에 首位로 從享되어 노사의 首弟子로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月皐는 스승의 주된 학문 분야인 性理學에 관한 著述은 하지 않았다. 朱子 등 先賢들이 이미 다 해 놓았기 때문에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는 南冥이 ‘程子, 朱子 이후로는 꼭 저술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과 상 통한다. 朝鮮後期 학자들은 대부분 性理學을 위주로 공부하였는데, 사실 독창적인 새 로운 학설은 별로 없고, 늘 비슷한 주장이 많았다. 그리고 性理學에는 논란이 많다. 學派와 학파간은 물론이고 심지어 스승과 제자 사이에도 學說이 달라 사 이가 나빠진 경우도 많았다. 月皐의 내면을 살펴보면 실제로 그는 性理學에 그렇게 큰 관심이 없었다. 복 잡한 禮學 논의에도 관심이 없었다. 여타의 蘆沙 제자들과도 크게 다르다. 그가 늘 읽기를 권유한 책은 經書와 朱子의 저서였지만, 그 자신은 성리학에 관한 저 술은 물론이고 언급도 거의 하지 않았다. 月皐의 長處는 詩에 있었다. 그는 타고난 특출한 시인이다. 感覺이나 表現伎 倆이 다른 사람보다 월등하게 뛰어났다. 그리고 그는 천부적으로 시 짓기를 무 척 좋아하였고, 長篇鉅製도 물 흐르듯 지어내었다. 특출한 詩的인 才能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지어내기 힘든 능력이다. 월고의 시의 경지는 平淡하면서도 淸雅하다. 특히 詩語가 세련되고 표현기법 이 精巧한데, 山水自然이나, 人情世態의 묘사에 뛰어났다. 그러나 정치의 모순, 위정자의 비리, 농민들의 고통상, 당시의 내외정세 등 현 실문제를 다룬 시는 거의 보기 어렵다. 그의 관심이 天人合一的인 觀念世界나 修己에 치중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평생 性理學을 공부한 큰 학자지만, 성리학적인 저술을 남기지 않은 대 신, 수준 높은 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시 속에 그의 개성이나 사상, 학문, 취향 등이 나타나 있다. 그의 시의 분위기는 宋元의 性理學者들의 분위기가 농후하 다고 할 수 있다.
        11.
        2007.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咸安은 학문의 고장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데, 함안에 본격적으로 학자가 배출 되어 학문이 시작된 것은 조선 건국 이후부터이다. 高麗末 琴隱 趙悅과 茅隱 李 午의 咸安 정착이 咸安의 학문 興隆에 있어 하나의 큰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각 성씨가 함안에 기반을 잡아 번성함으로 인하여 그 후손 가운데서 많은 학자들이 나왔다. 朝鮮 宣祖朝에 寒岡 鄭逑가 咸安郡守로 부임하여 학문을 일으키고 교육을 장 려하고 󰡔咸州誌󰡕를 편찬한 것이 함안의 학문 수준을 높이고, 학문의 저변을 확 대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특히 󰡔咸州誌󰡕를 통해서 그 당시 함안의 지식인들 에게 그 때까지의 함안 문화의 전모를 알게 하여 함안의 문화적 전통에 대한 자 부심을 느껴, 앞으로 문화를 가꾸어 나가야 하겠다는 사명감을 갖게 만들었다. 仁祖反正으로 침체되기 시작한 咸安의 학문은, 澗松 趙任道의 노력으로 급격 한 쇠퇴를 막고 현상을 유지할 수 있게 되어, 仁祖反正 이후에도 江右의 다른 고을과는 달리 학문이 단절되지는 않게 되었다. 澗松은 南冥學派와 退溪學派의 융합을 위해서 평생 노력한 학자인데, 간송의 노력으로 인해서 함안 지역은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퇴계학파나 남명학파 두 학파의 장점을 골고루 섭취하 는 이점을 갖게 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함안에서 저명한 학자나 비중 있는 저술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이 때 함안의 학자들은 書院 건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쳐 尊賢과 講學을 통해 서 학문적 전통을 이어나갔다. 咸安에서 스승으로 삼을 만한 대학자가 나오지 않자,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함안에서 학문을 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 사람들은 慶尙左道나 畿湖地方으로 유 학을 가야만 하는 어려움이 있어, 자연히 대부분의 선비들이 향촌의 小儒로 침 체됨을 면하기 어려웠다. 조선말기 性齋 許傳이 金海府使로 부임하여 관아에서 講學을 하자, 배움에 목 말랐던 함안의 선비들이 구름처럼 몰려가 가르침을 들었다. 500여 명의 성재 문인 가운데서 90여 명이 함안 사람이고, 그 가운데서 문집을 남긴 문인만 해도 27명에 이르니, 함안의 학문은 성재의 敎導로 말미암아 완전히 중흥을 이루었 다고 말할 수 있다. 性齋의 문인들은 지금까지 간행하지 못했던 조상의 문집이나 實紀에 성재가 지은 序文을 얻어 간행하여 반포하고, 조상의 재실이나 정자에 성재가 지은 記 文을 붙이고, 조상의 산소에 성재가 지은 碑文을 얻어 새기는 등 先賢들의 學問 과 德行을 선양함으로 인하여, 묻혔던 함안의 학문이 단시일내에 다시 빛을 발 하게 되었다. 性齋의 문인 집단에서 좌장격인 晩醒은 性齋의 學統을 전수받아, 스승 性齋의 문집 간행과 성재를 享祀할 麗澤堂을 지어 성재의 학덕이 천추에 전할 수 있도 록 기반을 마련하여 敎恩에 보답하였다. 그는 또 定齋 柳致明의 제자이기도 한 데, 近畿南人學派의 실학적인 학문과 정통 嶺南退溪學派의 성리학적 특성을 잘 조화시켜 함안의 학문 경향을 정통을 지키면서도 실용적인 방향으로 가도록 했 고, 退溪와 南冥의 학문이 잘 조화를 이루도록 만들었다. 1937년을 하한선으로 할 때, 咸安의 학자들에 의해서 지어진 文集은 기록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약 200여 종에 이르고, 專著는 30여 종 되는 것으로 파 악되었다. 이 정도로 풍성한 著述이 나온 것은 咸安이 學問의 고장이라는 것을 확실히 증명하는 것이다. 이들 저술 가운데는 아직 간행되어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것이 많고, 개중에는 전란으로 인하여 간행되기도 전에 자취를 감춘 것도 적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앞으로 함안 학자들의 저술을 대대적으로 발굴하여 간행 보급하면, 함안에서 나온 文集과 專著를 현대의 많은 학자들이 본격적으 로 연구할 수 있게 되어, 함안의 역사와 문화가 새롭게 밝혀질 것이다. 특히 지 금까지 거의 방치하다시피 해온 朝鮮時代 咸安의 漢文學이 새롭게 조명되어 각 광을 받게 될 것이다.
        12.
        200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南冥 曹植은 退溪 李滉과 더불어 朝鮮時代 학계의 양대산맥이다. 그는 일생 동안 벼슬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서 독서와 講學으로 일생을 보냈다. 그는 실천위주의 선비였고, 이런 학풍을 제자들에게 전수하였다. 이로 인하여 壬辰倭亂 이 일어나자 南冥의 제자들은 모두 목숨을 걸고 義兵을 일으켜 나라 를 위해 싸워 나라를 구출해 내었다. 이런 공훈으로 인하여 宣祖의 신임을 받아 조정에 발탁되게 되었고, 光海朝에는 大北政權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너 무 자신들 위주로 정치를 해 나가고 반대당을 철저하게 배척한 관계로 1623년 仁祖反正을 맞게 되어 몰락하게 되었다. 大北派는 대부분 처형되거나 유배 당 하였고, 南冥學派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仁祖反正 이후 새로 결성된 南人들은, 본래의 南人에다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몰락한 北人일부가 새로 편입한 것이다. 이들 남인은, 서울 경기지역에 기반을 두고서 西人들과 연합정권을 형성하여 官職에도 나갔으므로 嶺南南人을 포함 한 전체 南人을 주도하였고, 많은 학자 문인들이 나왔다. 이들을 특별히 近畿南 人學派라 일컫는다. 이들은 退溪學派의 한 갈래로서 寒岡 鄭逑의 제자인 眉叟 許穆을 통해서 近畿 地域에 退溪學脈을 전파시켰다. 이들은 줄곧 嶺南에 근거를 둔 南人들과 활발 하게 교류를 했다. 이 近畿南人學者들의 대표라 할 수 있는 龍洲 趙絅, 眉叟 許穆, 星湖 李瀷, 順 菴 安鼎福, 樊巖 蔡濟恭, 性齋 許傳 등이 近畿南人學派의 學統을 이어왔다. 이들 은 退溪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켜 實學과 접목시켜 독특한 학문을 형성하였다. 이들 近畿南人학자들은, 仁祖反正 이후, 西人들의 의도적인 집요한 南冥 貶下 의 상황에서, 南冥을 옹호하고 南冥의 位相을 높이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해 왔 다. 그들은 비록 南冥을 尊崇하는 정도가 退溪에게는 미치지 못했지만, 南冥學 이 명맥을 유지하는 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英祖朝의 星 湖 李瀷, 正祖朝의 樊巖 蔡濟恭과 朝鮮末期의 性齋 許傳 등은 南冥의 位相을 提 高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 오늘날 南冥學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이 세 분의 학자가 노력한 것에 힘입은 바 크다.
        13.
        200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江右地域은 아득한 三韓시대부터 전국의 학문적 문화적 중심지가 되어 본 적 은 없었다. 高麗中期 이후 晋州를 본관으로 한 姜氏 河氏 鄭氏의 문중에서 걸출 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나, 이들은 현달한 이후로 주로 중앙으로 이주하 였기 때문에 후대의 영향이 크게 없었다. 江右地域의 학문이 본격적으로 흥기한 것은, 佔畢齋가 咸陽郡守로 부임하여 비교적 장기적으로 재직하면서 적극적으로 인재를 양성함으로 인해서이다. 점 필재는 經學과 文章을 융합하는 학문으로 교육하여 그의 제자들은 문학과 경학 에 모두 우수하여 내용 있는 시문을 창작하여 당시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또 그들은 과거를 통해서 중앙관계에서도 嶺南士林派를 형성하여, 朝鮮 건국 이후 확고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勳舊派를 견제하는 위치에까지 이르렀다. 왕조교체기에 節義를 지키지 않았고, 경학적 뿌리가 없는 詞章 일변도의 시문 을 짓는 훈구파에 대해서 이들은 우월의식을 갖고서 배타적으로 처신하는 경향 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점은 훈구파에게 빌미를 제공하여 戊午士禍에 일 망타진되는 비극을 당하게 되었다. 점필재에 의해서 형성된 朝鮮 前期의 嶺南士林派가 戊午士禍와 甲子士禍로 인하여 그 學脈이 후세에 직접적으로 계승되지는 못했지만, 그 한 세대 뒤에 南 冥 같은 대학자가 崛起하는 데 토양을 제공했을 것이다. 그리고 전기 嶺南士林 派에 의해서 형성된 선비정신은 남명이나 그 제자들에 의해서 더욱 정제될 수 있었을 것이다.
        15.
        200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后山許愈(1833-1904)를 배출한 三嘉縣의 金海許氏가문은 경상우도에서 문호 를 유지해 왔다. 고려말기 許麒에 의해서 固城에 정착하여 金海許氏가문을 형성 하였다. 다시 허기의 현손 竹溪許珣이 三嘉縣佳會里德村에 移居하였다. 본래 는 무관의 가문이었으나 竹溪의 아들 晩軒許彭齡이 南冥문하에 나아가 공부함 으로 인하여 武業을 버리고 儒學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晩軒은 南冥을 享祀하는 晦山書院창건을 주도하였고, 창건 이후에 회산서원 에 매달 초하루 焚香할 정도로 남명에 대한 존모의 정도가 지극하여 유가로서의 기반을 확실히 잡았다. 그의 두 아들은 倡義하여 忘憂堂郭再祐휘하에서 군공을 세웠고, 또 형제 둘 다 문집을 남겼으니, 유학에 조예가 깊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아들 滄洲許燉대에 와서, 문과에 급제하여 文名을 날리고, 대북정권에 협 조하지 않는 절조를 지켰으므로 家數를 크게 제고시켰다. 이후 강우의 비중 있는 가문이 되었다. 滄洲의 손자 臥龍亭許鎬는 굉장한 경륜을 가져 북벌을 담당할 將臣에게 세 가지 계책을 제시할 정도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신실한 선비로서 처신하였는 데, 주로 江左의 학자들과 교류가 깊었다. 晦山書院창건을 주도할 정도로 南冥을 존숭하는 가문이면서 아울러 退溪도 존숭하여, 두 대학자의 장점을 융합하여 발전시키려는 가문의 전통적 학풍을 갖고 있었다. 아울러 倡義를 하는 등 우국연민의 구세정신도 여타 가문보다도 더 강렬 하였다. 이런 전통은 后山에게까지 면면히 이어져, 雷龍亭을 중건하는 일을 주관하고 뇌룡정의 강학을 주도하고 神明舍銘或問이라는 神明舍銘에 대한 역사상 가 장 상세한 주석을 달면서도, 퇴계의 학문을 존숭하여 聖學十圖附錄이라는 聖 學十圖에 대한 精深한 주석서를 내고 있다. 남명과 퇴계를 대립적인 구도로 파 악하지 말고, 후학들이 두 대학자의 좋은 점을 상보적으로 배운다면, 국가민족을 위해서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이 후산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학문은 늘 구세정 신이 있어야 그 존재가치가 있다는 문학관을 갖고서, 문장을 지을 때도 世敎에 도 움이 되지 않으면 지을 필요가 없다고 후산은 생각했다. 후산은 남명․퇴계 우리나라 양대 학자의 학문을 조화롭게 아우른 家學의 바탕 위에서, 寒洲에게 나아가 心卽理說을 배워 계승하여, 19세기 강우지역을 대표할 수 있는 대학자로 성장하여 많은 제자들을 길렀으며 강우의 학문이 부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6.
        2004.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明庵 鄭栻의 은 1683(肅宗9)년에 普州 玉峯에서 태어났다. 字는 敬甫이고, 명암은 그 號이다. 明나라가 망한 것을 슬퍼하여 일생 동안 仕宦하지 않고 초야에서 포의로 지내다 일생을 마친 문학자이다. 그는 명나라를 숭상하는 인물 가운데서도 철저한 사람이었다. 그는 청나라는 미개한 오랑캐로 간주하여 철저하게 배척하여 인정하지 않았다. 명나라를 높은 학문과 찬란한 문화를 가진 중국 역사상의 正統 으로 인정하였다. 사람답게 사는 삶의 질이 높은 이상적인 국가로 명나라를 생각 하였다. 그래서 청나라가 지배하는 세상에 나가서 벼슬하는 것을 더럽게 생각하였 고, 어떻게 하면 중국 대륙에서 청나라를 섬멸하여 축출할까 하는 것이 일생의 話 頭였다 명암의 사상과 문학은 모두 이 화두에서 출발하였다. 그래서 그의 號마저도 明庵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의 고결한 정신자세는, 朝鮮의 伯夷叔齊라 일컬어 손색이 없다. 청나라가 중국을 통치하고 있던 시대에 태어나 살았던 明庵은, 名利를 초탈하여 명나라의 회복과 청나라의 축출을 염원하면서 한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을 스스로 포기하고서, 出處의 大節을 지켜 곧게 깨끗하게 艱苦한 삶을 영위하였다. 그는 선비 지식인으로서 국가의 운명에 무관심할 수 없였던 것이다. 伯夷叔齊이래로 이어져 온 선비의 節義사장이 이 시대상황에서 명암을 통해 體現 된 것이었다. 그의 시는 淸浮하고 肺腑한 서체에서 흘러나온 것이기에 읽는 사람에게 감동을 준다. 詩想이 다채롭고 진지하고, 표현의 기볍도 독창적이라 이전의 시를 답습한 것이 아니고, 아주 逼眞하게 사물을 묘사하였다. 언어를 다루는 기술이 섬세하여 그의 시는 내용적으로 뿐만 아니라 文藝的으로 성공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산문 가운데는 「矗石樓重修記」, 「義嚴碑記」등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던 글이 있지만, 문학적으로 가장 뛰어난 글은 여러 종류의 遊山錄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유산록은 산수문학의 典範으로서 韓國漢文學史에 등장시킬 가치가 있 다. 本考에서는 지금까지 학계에 소개된 척이 없였던 明庵 鄭栻의 의 생애와 그의 詩文學의 독특한 면모를 밝혀, 韓國漢文學연구의 지평을 확대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