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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南冥 曺植은 수제자인 來庵 鄭仁弘을 자신의 분신으로 여겼다. 내암 도 남명의 이러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남명 사후 그를 추숭하는 일에 전력을 투구했다. 내암이 지은 「南冥 曺先生 行狀」도 이러한 남명추숭 의식의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남명은, 退溪 李滉의 출사 권유를 거절한 이후로 끊임없이 퇴계로부 터 여러 가지 비판을 받아왔으며, 이러한 비판은 퇴계의 문인들에게 그대로 전해져 내려왔다. 남명에 대한 퇴계의 비판은 급기야 남명의 문묘종사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고, 이에 대한 반 작용으로 내암은 죽음을 무릅쓰고 남명에 대한 퇴계의 비판을 해명하 는 데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내암의 노력은 그가 지은 스승 남명의 행장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내암은 남명의 행장에서 남명이 생전에 남긴 글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남명의 출처의식과 남명의 학문관을 설파함으로써, 남명의 입장에 대한 옹호는 물론 나아가 퇴계에 대한 비판까지도 불사하는 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2.
        2013.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南冥 曺植의 神道碑로서 가정 먼저 세워진 것은 1617년 무렵, 그 문인 鄭仁弘이 찬술하고 정인홍의 문인 裵大維가 글씨를 쓴 것이다. 이 비석은 1623년 仁祖反正에 의해 정인홍이 賊臣으로 몰려 처형되고 난 뒤 사람들의 눈앞에서 없어지고 말았다. 겉으로는 적신으로 처형된 정인홍이 찬술한 글이기에 넘어진 것이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퇴계를 은근히 비판한 글이기에 더욱 세워둘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글이 찬술된 것은 1615년에 남명이 영의정에 증직되어 신도비를 세울 수 있었던 조건이 충족되었고, 정인홍이 남명의 문인 가운데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정인홍은, 퇴계가 그 문인들에게 편지나 대화를 통해 여러 차례 남명을 비판하였으므로 그것이 알려져 남명이 문묘에 종사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고, 이 글을 쓰기 이전까지 적어도 7편 정도의 글이 남아 전할 정도로 여러 차례 퇴계에 대한 비판을 시도하였으며, 이 글은 그 결정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남명의 일생에 대해서는 대곡이 찬술한 묘갈명이 가장 극진하다고 생각하고, 이 신도비명에서는 오로지 남명의 학문 내용이 유가의 정통에 해당되며, 퇴계의 남명 비판은 잘못된 것이라는 논리로 일관하고 있다. 정인홍이 이러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점은 「跋文解」에 보이는 바, 문인으로서 스승의 학문이 誣陷당한 데 대하여 坐視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師生間의 義를 생각한 데서 나온 정당한 행동으로 스스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당대 최고의 인물이라 알려져 있던 퇴계에 대해 과감하게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실패하였지만, 이는 정인홍이 광해군 때 實職에서 行公해 본적이 없으면서도 遙執朝權하던 山林政丞이었다는 점과 인조반정이라는 당시의 정치적인 문제에 묘하게 맞물려 있었던 것이 첫째 원인이었고, 다음으로는 당대부터 퇴계가 가지고 있었던 막강한 영향력을 내암이 결국 당해내지 못했다는 것이 둘째 원인이라 할 것이다. 정인홍이 정치적으로 패퇴한 인조반정 이후 대부분의 남명 문인이나 정인홍의 문인 후손들이 차츰차츰 남인화하거나 서인화했지만, 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서부 경남 일대에 현재에 이르기까지 400여 년에 걸쳐 남명 정신을 추존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은, 남명의 학문적 영향력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며, 그런 측면에서 보면 정인홍의 남명 신도비명 마지막 부분에서 언급한 ‘冥道日月’이라 표현한 기대가 앞날을 내다 본 표현이 아닌가 생각된다.
        3.
        2013.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인조반정 직후 내암 정인홍 문인들의 불안 요인과 그에 대한 대응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정인홍의 문인들은 광해군 정권 시절 조야에서 폭넓게 활동하다가,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대거 숙청되어 이후로 막연한 불안감이 정인홍 문인들 사이에서 형성되었다고 판단된다. 또한 이들은 반정에 불복하는 세력을 형성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이 발각되어 대규모의 옥사가 일어난다. 이로써 정인홍 문인들의 불안은 더욱 가중 되었고, 불안 요인 또한 증폭된 것으로 보인다. 정인홍 문인들의 일차적인 불안 요인은 자신과 스승 정인홍과의 관련성이었다. 박건갑은 정인홍의 회퇴변척을 옹호하는 소를 올린 적이 있는데, 1624년 10월 옥사에 연루된 박건갑 3부자(박규·박구)의 추국 기록에는 첫머리부터 ‘정인홍의 여얼’이라는 내용을 명시하고 있으며, 박건갑은 이에 대한 해명으로 자신들과 정인홍은 친인척 관계가 없음을 실례를 통해 증명하였다. 특별한 죄상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들에게 중형이 내려졌고, 이후 몇 차례의 옥사를 통해 정인홍 문인들의 불안 요인은 더욱 확대되고 구체화되었다. 1631년 2월 옥사의 주모자로 지목된 정한은 추국청에서 자신은 광해군 시절 정온·이대기 등과 의견을 함께 했음을 강조하며, 자신은 애초에 대북과 거리를 두었음을 역설하였다. 또한 이 옥사 발생 직후인 1631년 3월, 박인·허돈 등 인근 유림들이 덕천서원에서 회합한 일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정인홍이 지은 남명신도비문에 대한 처리 문제를 상의하였고 결국 폐기하는 쪽으로 결론이 난 것으로 판단된다. 강우지역의 인물이 대거 연루되어 처형 등의 처벌을 당한 상황에 직면한 정인홍 문인들이 나름의 자구책을 강구한 것이다. 1633년 3월에 발생한 옥사에서는 임석간에 의해 대구·고령·성주 지역 인물들이 고발되었는데, 이들은 앞선 1631년 옥사의 주동자 박희집과의 관련성을 추궁받았다. 박희집과 그의 집안은 정인홍과의 관련이 밀접한 바, 불안의 요인은 정인홍 주변 인물과의 관련성으로 확대되는 경향을 띄게 되는 것이다. 정훤은 우연하게 이 사건에 연루되었는데, 정인홍 문인이었던 자신에 대한 변명으로 대북 시절 폐모에 반대했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내었다.
        4.
        2007.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내암의 상사구렁이 퇴치 유형’의 텍스트 형성과정을 중심으로 고 찰하였다. ‘내암의 상사구렁이 퇴치 유형’은 내암 관련 구비전설의 대부분을 차 지하고 있는 유형이다. 본 연구에서는 ‘내암의 상사구렁이 퇴치 유형’으로 분류 한 텍스트가 남명전설이 아닌 내암의 인물전설로서 존재하는 양상과 그 의미를 밝히고, 내암전설의 유형적 성립 조건 및 방식을 규명함으로써, 기존의 연구사 에서 남명전설의 일부로 분류해 왔던 내암전설의 실체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첫째, 내암전설의 존재양상을 검토하고 그 하위유형을 분류하였다. 이를 통해 ‘내암의 상사구렁이 퇴치 유형’이 내암전 설의 하위유형의 하나로 존재하는 양상을 고찰하였다. 둘째, ‘내암의 상사구렁 이 퇴치 유형’의 서사 구조적 특징과 텍스트의 분화 및 성립 방식을 고찰하였다. ‘내암의 상사구렁이 퇴치 유형’이 남명의 인물전설이 아니라 내암의 인물전설 로 존재하는 양상을 서사 구조적인 측면에서 입증하였다. 한편 ‘내암의 상사구 렁이 퇴치 유형’이 남명 중심적인 서술시각으로부터 분립하여 내암 중심적인 서술시각을 성립시키는 분화의 단계를 미시적으로 고찰하였다.
        5.
        2007.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鄭仁弘의 晦退辨斥은 광해군 초에 실현된 五賢從祀에 대응한 것이었다. 오현 종사는 선조초 金宏弼, 鄭汝昌, 趙光祖, 李彦迪 등 四賢에 대한 종사 요청을 그 연원으로 하고 있었다. 이 중 이언적은 乙巳士禍 때의 행적으로 인한 혐의에도 불구하고 그의 학문적 성과에 대한 李滉의 평가에 힘입어 종사 논의에 포함될 수 있었다. 이러한 기반에서 이황을 포함한 오현종사는 東方의 道統을 설정하 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선조는 즉위 초 사현종사를 수용하지 않는 대신 이들의 행적을 수집 정리한 󰡔國朝儒先N󰡕을 편찬함으로써 이들이 담지한 도통의 구도를 일정하게 인정하 였다. 그러나 재위 후반 신하들의 국왕에 대한 태도에 대한 문제의식이 강화되 면서 이언적과 이황을 강도 높게 비판하였고 오현종사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 론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광해군은 즉위 초 公論을 수용하는 모습을 보이려는 정치적 선택에 따라 오현종사를 실행하였다. 정인홍은 이에 대응하여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 종사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 다. 그의 회퇴변척은 程朱學이 설정하고 있던 道統論을 조선에 적용시키는 논 점에서 전개되는 것이었다. 정인홍은 변척 과정에서 朱子와 관련된 사례를 적 극적으로 원용하였다. 주자가 孟子와 顔子를 변론한 것과 陳建이 주자를 변론 한 것은 결국 주자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도통의 학문적 실천으로 평가될 수 있 는 것이었다. 정인홍은 이를 동방 도통에 적용하면서 학술적 성과보다 도학의 실천적 측면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오현종사 논의에서 김굉필과 조광조는 이러한 기준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편 적으로 인식되었지만, 이언적의 경우 정치적 혐의에도 불구하고 이황의 인정에 힘입어 종사될 수 있었다. 이것은 학술과 행적 모두에서 이황에게 集大成의 의 의를 부여하는 토대가 되었다. 정인홍은 이러한 구도에 부당함을 느끼고 도학 의 실천적 측면에서 도통의 일원적 설정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경학적 측면에서 보면 󰡔中庸󰡕의 요체를 時中으로 이해하는 데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는 顔子의 은거를 時中의 道에 부합한 것으로 인식하였고, 그 연장에서 曹植의 위상을 규정하였다. 그리고 조식을 조광조와 정여창에 대한 평가와 연결함으로써 出處에 대한 엄격한 평가를 통해 도통이 설정되어야 한다 는 원칙을 수립하였다. 이러한 원칙을 통해 이언적과 이황은 時中의 道에 어긋 난 사례이며, 따라서 문묘 종사는 부당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내었다.
        6.
        2006.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내암집󰡕 간행의 준비 단계에서 이루어진 여러 종류의 필사본과 기타 고문서들에 주목하여, 선조 시기 정인홍의 정치적 동향을 구명하는 것을 목적 으로 한다. 오늘날 정인홍은 주로 광해군 시기의 權臣으로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정 치적 생애의 대부분은 선조의 재위 기간에 해당한다. 정인홍은 문과에 응시하 지 않고 유일로서 발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조시기에 종6품에서 종2품에 이르는 당시까지 문과 출신자가 아닌 경우로는 전례가 없었던 현달한 관직에 두루 임명되었다. 선조 시기에는 그를 뒷받침해 줄 뚜렷한 정치 세력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카리스마의 원천은 무엇보다도 국왕의 신임에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신임의 배경은 강직하고 학식이 깊은 인물로서의 그의 명성이었 으며, 임란 시기의 의병활동이 보여준 애국심이었다. 그가 한사코 관직을 사퇴하고서 ‘山野의 신하’로 남고자 했던 것은, 무엇보다 도 당쟁 시대인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 나아가 포부를 실현할 수 없다고 판단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국왕의 신임에 의거하여 사직소나 사은소 등의 형 태로 주어진 정치적 상황에 대한 발언은 계속하고 있었다. 그것이 이른바 산림 정치의 원형을 이루게 된 것이었다. 군주가 인물의 선악을 옳게 판단하여 군자 의 당을 자신의 측근으로 삼고 그들에게 핵심적인 권력을 맡겨서 소인의 당이 조정에 발붙일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당쟁 시대에 처한 정인홍의 일관된 정치적 주장이었다. 그가 선조시기에 이미 많은 정적들을 만든 것도 이러한 비 타협적인 정치노선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7.
        2001.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e most influential figure, both in political and academical terms, in the period of the latter half of and the entire run of King SunJo's and GwangHaeGoon's respective regimes, was the Head of the Northern Faction at the time, RaeAhm Jung In-Hong. He was renowned as the most prominent figure of the Northern Faction during GwangHaeGoon's regime for his distinctive records of political actions and services, which included his taking initiatives back in the ImJin war crisis, his social background in the GyungSang WooDo area, his legitimate status in the academic society granted by his being one of Joe, Sik's disciples, and his unwavering loyalty for the King GwangHaeGoon. But his radical, straightforward attitude and political perspectives forced the opposing political parties to stand against him. He also promoted the cherishing project for his mentor Joe, Sik in a great hurry, which was also against the general consensus and wishes of the scholars. Hence, he became the primary target of the leaders of the revolution which had InJo as the new King, and was executed in the aftermath eventually. There were indeed some redeeming qualities in his life. He firmly maintained his principles of being loyal to the country, to the King, and to his mentor, although he had probably gone too far when he criticised TwaeGwae Lee, Hwang, or when he excessively insisted the executions of the convicted traitors to the country, in the process. Yet it is true that there have been too much of negative sentimentality and too many criticisms against him, which was in part actually engineered by the opposing Western Faction politicians at the time, who generally named him a rogue traitor. What was true, however, was htat he had also demonstrated certain personal principles and outright determination to stick to that principles throughout his entire life, which was also a typical trait for the Chosun SanRim scholars. More rational and reasonable evaluations of the character would be recommendable in the futrue. Efforts like that might also be instrumental in defining the political and academical position the Northern Wing personnels deserved to occupy in the history of the Chosun dynas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