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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산업의 발달과 농촌의 도시화로 인하여 각종 농기계가 도입되면서 혼자서도 농사지을 수 있게 되었고, 들녘을 가로지르던 농부들의 노랫 가락은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사람들은 온갖 이야기를 풀어내던 사랑방 대신 마을회관에 모여 대화를 나누기보다는 텔레비전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화면이 시키는 대로 웃고 울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제 더 이상은 과거와 같은 자연적이고 역동적인 구비문학의 전승현장은 찾아보기 어렵게 된 것이다. 함양군 지곡면 개평마을에 남아있는 구비문학 자료를 찾기 위해서는 현장의 목소리를 직접 채록하여 지역민의 정서 표출 욕구를 풀어내야 하겠지만 이야기판이나 노래판을 벌이기에 여건이 마땅치도 않고 몇몇 사람의 노래나 이야기만으로 마을을 대표한다고 할 수도 없다. 따라서 가장 최근에 조사된 『한국구비문학대계』 개정, 증보판의 내용이 자료로서의 가치가 충분하기에 대계의 자료를 중심으로 개평마을의 설화와 민 요를 살펴보았다. 개평마을의 이야기와 노래가 지니고 있는 최근의 모습은 마을 공동체의 변화와 함께 끊임없이 문화가 창출되고 변용되는 시공 간이 지닌 구비문학의 양상을 살피는 미시적 모델이 될 수도 있다. 마을 주민들은 마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주민들의 유대와 협력을 중시한다. 여성 제보자들은 허구적이며 상상력에 바탕을 둔 이야기를 즐기며, 남성 제보자는 역사적 사실이나 실제성을 증명할 수 있는 이야기에 공을 들인다. 여성들의 이야기에서도 부모에 대한 효도와 며느리로서 집안을 일으키고 잘 살아야한다는 부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인생을 들여다보고 살피는데 있어서도 여성들의 이야기는 운명적인 데가 많다. 타고난 팔자는 피할 수 없다고 믿으면서도 행운과 불운에 대해 민감하며, 우연과 행운에 기대와 희망을 걸고 살아간다. 구비문학 현장에는 여성제보자들의 이야기와 노래가 많다. 남성들은 이야기판에 관심이 없거나 직접 겪은 일이 아니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감정표현에 솔직하고 욕망을 드러내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여성제보자들의 이야 기는 인간의 솔직한 감정표현이라고 하겠다. 오랜 세월 여성들은 자연적이고 자발적으로 민요를 가창했을 것이며,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도 즐기고 만족하며 노래불렀을 것이다. 자신 들의 힘들고 고된 삶을 이야기로 풀어내기보다는 민요에 얹어서 부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타박네가 엄마 찾아 산소 가는 사연을 노래 부르며 어머니로서보다는 딸로서 어머니를 찾고 싶은 욕망을 드러냈으며, 계모가 사위 죽이려는 노래에서는 딸이나 여자로서의 꿈과 행복이 가장 좋은 일조차 방해받을 수도 있다는 한스러움을 노래했던 것이다. 농삿일이 기계화되고 놀이조차 행사나 축제의 하나로 통합되면서 여성들이 모여서 ‘노랫가락’이나 잡가를 부르고 놀게 되었던 일까지 이제는 오래 전의 추억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2.
        201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15세기 초 함양 개평마을에 정착한 풍천노씨 가문이 번창하여 발전한 과정과 가풍(家風)과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것이다. 풍천노씨가는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과 예조참판을 지낸 노숙동이 하동정씨 정복주의 사위인 김점의 딸과 혼인하여, 외손봉사를 통해 개평마을에 정착 하였다. 개평의 풍천노씨가는 공신이었던 노숙동에 이어 아들 노분과 손자 노우명을 거쳐 증손자인 노진에 이르러 가문이 크게 번창하였다. 노진은 이조판서로서 현달하였고, 대학자로서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기 때문에, 지리산권 일대의 영, 호남 지식인과 후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노진 이후로도 개평마을의 풍천노씨가에서는 왜란과 호란 때에는 많 은 의병장이 배출되었고, 17세기 이후에는 양반들의 명단인 향안(鄕案) 에 함양에서 가장 많은 인물이 수록될 정도로 번창하였다. 특히 19세기 에 이르러서 호조참판을 지낸 노광두나, 성리학과 문장에 뛰어난 노광리 를 배출하였고, 일제 시대에는 신간회에 가담하여 민족의 장래를 고민하 는 인물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개평마을의 풍천노씨가가 번창한 것은 향당에서의 효제(孝 悌)와 조정에서의 충신(忠信), 그리고 매사에 예의염치를 중시하였던 가풍의 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개평마을의 입향조 노숙동은 성실과 신의에 바탕을 두고 수신과 출사에 걸쳐 지켜야 할 도리를 밝힌 ‘성신염공근간화혜(誠信廉公謹簡和惠)’ 8자 유훈을 남겼고, 아들 노분 은 수신과 청렴한 관직생활을 강조한 ‘청신염결’, 손자 노우명은 일상 행활에서의 중용(中庸), 증손자인 노진의 종형인 노상은 안빈낙도(安 貧樂道)를 가훈으로 남겼다. 이러한 유훈을 이어받은 노진은 노숙동의 8자 유훈을 가문의 법도로 확정짓고 효제를 솔선수범하였으며, 중용을 강조하였다. 이어 노진의 종제 노주는 나라가 위급할 때에 거의(擧義) 하였고, 노진의 종증손 노형운은 효제충신과 예의염치를 강조하였으 며, 노진의 증손 노형필 은 정주의 격언에 따른 실천을 중시하였다. 특히 노형운이나 노형필 등은 가풍 외에도 그들이 사사(私事)하였던 한강 정구의 명체적용(明體適用)이나 예학, 여헌 장현광의 지행병진 (知行竝進)의 영향을 깊이 받은 것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효제를 토대로 향당과 출사의 가풍을 수립하였던 풍천노씨가 에서는 향촌사회에서 족보를 간행하고 사당과 서원향사에도 더욱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1701년 이후로는 마을의 경쟁관계에 있던 하동정씨 와 연합하여 도곡서원을 설립・운영함으로써 가문의 명성을 높이고 두 가문의 화합을 대외적으로 과시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