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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201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俛宇 郭鍾錫이 지은 「南冥墓誌銘」은, 南冥을 두고 지은 傳記文字 가 운데서 가장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서술이라 할 수 있다. 남명 전기문자 의 최후결정판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남명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빠짐 없이 수록해 놓았다. 묘지명으로서는 매우 긴 작품으로 일반적인 묘지명의 틀과 다른 점이 많다. 면우는 이 묘지명을 지으면서 자료를 최대한 널리 수집하여 신중에 신중을 기하였고, 다 완성된 뒤에도 당시 慶尙道 지역에서 문장으로 손꼽히는 제자 深齋 曺兢燮과 晦峯 河謙鎭에게 문제점을 지적하여 같 이 수정하고 보완하여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원래의 請文者 弦齋 曺庸相을 통하여 深齋가 사소한 문제로 지나치게 장기간 문제를 지적하고 나오자, 마침내 자기가 지은 「南冥墓誌銘」은 폐기하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그 9년 뒤인 1926년에 간행된 俛宇集 속에 실린 俛宇의 시문 가운 데 南冥을 낮게 평가했다는 혐의를 받을 글이 발견되어, 남명 후손들은 출판하여 보내 온 俛宇集을 거절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俛宇 측과 관계가 멀어져 「남명묘지명」은 실제로 남명 묘소에 묻히지 못 했다. 「南冥墓誌銘」에서 俛宇는, 南冥의 偉大性을 부각시키고, 敬義가 南冥思想의 핵심임을 밝히고, 南冥의 治學方法을 체계화하고, 南冥의 憂國憐民사상을 부각시키고, 南冥의 學德의 특징을 宋朝 諸賢에 비교하 였고, 南冥의 雅號의 의미를 밝히고, 文廟從祀 疏請 등 남명 推崇事業을 소개하는 등, 내용이 가장 다양하면서 풍부하다. 단언컨대, 「南冥墓誌銘」은 남명에 관한 傳記文字 가운데서 가장 종 합적이고 체계적이고 심도 있는 자료라 할 수 있다. 남명이 직접 지은 詩文에는, 남명의 언행과 생활상을 이해할 자료가 거의 없는데, 제자나 친구 後學들이 지은 이런 다양한 종류의 傳記文字 가 존재함으로 해서 남명을 연구하는 자료로서 유용하게 활용할 수 높은 것이다.
        22.
        201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南冥 曺植은 수제자인 來庵 鄭仁弘을 자신의 분신으로 여겼다. 내암 도 남명의 이러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남명 사후 그를 추숭하는 일에 전력을 투구했다. 내암이 지은 「南冥 曺先生 行狀」도 이러한 남명추숭 의식의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남명은, 退溪 李滉의 출사 권유를 거절한 이후로 끊임없이 퇴계로부 터 여러 가지 비판을 받아왔으며, 이러한 비판은 퇴계의 문인들에게 그대로 전해져 내려왔다. 남명에 대한 퇴계의 비판은 급기야 남명의 문묘종사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고, 이에 대한 반 작용으로 내암은 죽음을 무릅쓰고 남명에 대한 퇴계의 비판을 해명하 는 데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내암의 노력은 그가 지은 스승 남명의 행장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내암은 남명의 행장에서 남명이 생전에 남긴 글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남명의 출처의식과 남명의 학문관을 설파함으로써, 남명의 입장에 대한 옹호는 물론 나아가 퇴계에 대한 비판까지도 불사하는 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23.
        201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남명의 연보는 无悶堂 朴絪이 1628년 덕산에서 남명의 둘째 아들인 칠원 군수을 지낸 慕亭 曺次磨로부터 부탁을 받고 1636년 편찬을 하였 다. 그 후 謙齋 河弘度, 澗松 趙任道, 林谷 林眞., 寒沙 姜大遂 등 私淑人들의 수정 보완을 거쳐 1700년 발간된 .南冥先生別集.에 실려 처음 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그 후 1814년 무민당의 후손들이 .무민당 집.을 발간하면서 집안에 전해오던 무민당 手稿本이라고 추정되는 .남 명연보.를 저본으로 삼은 연보를 수록하여, 3종류의 연보가 전하고 있 다. 연보가 발간된 후 내암관련 문자 삭제, 구암과의 절교 문제 등으로 논란이 있었는데 내암 관련 문자는 삭제하는 것으로 정리한 반면 구암 과의 절교 문제에 있어서는 상세하게 기록해야 한다는 무민당의 견해 가 수고본에 그대로 기술되어 있으며, 반면 .남명선생별집.과 후에 발 간된 .무민당집.에는 내용은 대동소이하나 그 분량은 현저하게 줄어들 었다. 1800년대 들어 남명학파 학자들의 문집이 이 지역에서 많이 발간돼 남명 생애에 대한 자료가 많이 발견되어 보충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또 연보의 내용도 일부분 거칠고 오류가 있다고 생각해 1897년 남명 선생편년을 간행했다. 남명편년은 그동안 제기되었던 연보의 오류들 을 바로 잡았을 뿐 아니라 대체로 연보의 기술 내용을 보충하고 있다. 특히 연보에는 덕계 수우당 한강 등 소수 문인들의 受學에 관한 기사가 있는데 반해 편년에는 남명 문인들의 受學에 관한 기사가 현저하게 늘었다. 이는 남명의 遺文들이 전해지지 않은 것이 너무 많아 당시 지역 선비들의 문집에서 관련 자료들을 구해 이를 보충하는데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24.
        2014.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의 목적은 우리나라 대표적 사상가이며 대학자인 남명의 신명사도에 근거하여 오늘날 유아기 인성교육에 적합한 수업모형을 탐색하는 데 있다. 신명사도에 근거한 본 수업모형은 남명의 실천사상을 통해 개인의 감정 존중과 사회적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자기실천화를 고양시켜 조화로운 인성발달로 연결하는 전인교육의 함의를 제시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역사적 인물을 통한 정체성있는 인성교육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유아기 전인발달을 도우는 인성교육의 현장연구로 연결될 것이라 기대한다.
        25.
        2013.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南冥 曺植(1501-1572)의 4종 神道碑文 중 尤庵 宋時烈(1607-1689)의 「南冥曺先生神道碑銘」을 총체적으로 연구한 결과물이다. 한 명의 인물을 대상으로 당대 최고 문사들이 각각 신도비문을 남기고 그 작품들이 모두 현전하는 경우는 남명신도비문이 유일하다. 송시열이 찬술한 남명신도비문은 남명 조식 사후 100여 년 만에 찬술된 것으로 이전 정인홍ᆞ조경ᆞ허목 보다 학문적 연원이나 사승 관계가 멀다 할 수 있고, 오히려 사후 정치적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조식과 송시열은 가장 대치적 관계에서 지어진 작품이다. 그러나 송시열은 정치적ᆞ학문적 입장을 뒤로하고 조식의 不朽한 功業과 序其爲人의 독특한 찬술자세로 남명신도비문을 찬술하였다. 송시열의 남명신도비문은 가장 비지문 창작이 왕성했던 60세 전후에 찬술된 작품이며 영남유림과 조식의 자손들 부탁으로 찬술되었음을 확인하였다. 특히 10년 전에 지어진 초고본을 다시 찾아 주변 지인들의 조언을 바탕으로 퇴고를 거듭 하며 남명신도비문에 많은 공력을 기울였다. 송시열은 조식의 공로에 대해 세 가지(①貴義賤利, ②可尙恬退’, ③可羞貪冒)로 요약했고 그의 성품에 대해서는 일화를 통해 간략하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도록 기술하였다. 조식의 출처관에 대해서는 이황의 말을 인용하며 미화로 여겨질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 나아가 조식을 성리학자로 최고의 위상이라 할 수 있는 육군자의 반열과 병렬시킨 것은 송시열 이외에 어떤 사람도 하지 못한 일이며 당시 노론 영수로 후대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송시열에게 이루어졌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였다. 송시열은 이황을 포함한 육군자는 조식의 위상과 차이가 없다 생각하였고 바로 이점으로 자신이 조식을 백세의 스승, 영원한 스승으로 삼았던 것이다. 당시까지 조식을 당파적 영수로 여겨왔다면, 송시열은 당파적, 정치적 외형에서 탈피하여 한 시대의 영원한 師表로 승화시켰다. 바로 이점이 기존 3종의 남명신도비문과의 변별점이며 송시열의 남명신도비문이 지닌 위상이라 할 수 있다.
        26.
        2013.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神道碑銘은 일종의 墓道文字이다. 묘도문자는 한 인물의 學問, 言行, 德性, 業績, 家系 등을 기록하여 돌에 새겨 神道에 세우는 것인데, 남명의 경우처럼 우여곡절을 겪으며 5종이나 남아 전하는 경우는 사례가 없다. 이 5종의 묘도문자의 撰者는 모두 자신의 입장에 충실한 修辭를 보였다. 대곡 성운은 평생의 벗을 여읜 슬픔과 그리움을 담아 곡진한 修辭로 표현하려는 입장이었고, 내암 정인홍은 무한한 존경심으로 스승을 높이려는 의도였으며, 미수 허목은 퇴계의 남명 비판 이후 견지되어온 남인학파의 견해와 자신의 평소 견해에 입각하여 남명을 高士로 기리는 입장이었고, 우암 송시열은 상대 당파이기에 오히려 자유로운 존숭을 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용주 조경은 미수와 동일한 입장과 견해에서 학자라기보다는 高士로 남명을 기리고 있으며, 사실의 기록과 闡揚의 수사 사이에서 사실의 기록에 치중하는 입장이었다. 龍洲는 南冥을 氣節이 높았던 高士로 평가했고, 그것을 修辭로써 잘 드러내기 위해 다양한 방식을 구사하였다. 이러한 修辭는 直敍와 尊崇의 사이에서 긴장하며 행간에 드러나고 있었다. 또 용주는 남명의 출처에 대해서 때를 만나지 못한 不遇와 高潔自守의 경우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修辭의 방식이 남명을 존숭하고 그 행적의 사실을 드러낸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대곡이나 내암 혹은 우암이 찬한 신도비명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直敍와 簡略함에 더 치중했음을 보았다. 따라서 용주의 修辭는 尊崇 내지 闡揚의 修辭와 事實의 直敍 사이를 오가는 긴장 속에 만들어진 것이며, 용주의 修辭는 오히려 史論의 褒貶에 가깝고 묘도문자의 목적인 揚善隱惡에는 다소 부족한 감이 있었다.
        27.
        2013.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眉叟 許穆이 지은 德山碑 즉 南冥先生神道碑는 1585년에 세워졌는데, 1926년에 南冥 曺植의 후손인 德山 曺氏 門中에 의해 훼손되어 없어지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晉州 鄕校와 德山 曺氏 門中 사이에 법적 소송이 벌어졌다. 진주 향교는, 미수 허목의 글을 없앴다는 이유와 조상의 신도비를 훼손한 것은 명백한 잘못이므로, 비석을 원상복귀하고 도내 유림에게 사죄하라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덕산 조씨 문중은, 미수 허목이 지은 비문의 내용에 자기들의 조상이자 만인이 추앙하는 남명 선생을 비하하는 내용이 들어있기 때문에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폈다. 하지만 실상 문법적으로 본다면, 비문의 내용을 굳이 악의적으로 보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문의 내용이 악의적인 의도에서 지어진 것이라고 덕산 조씨 문중에서 단정하는 이유는 바로 『記言』에 실린 「答學者」에서 미수가 남명을 폄하하고 있다는 뜻을 드러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본고는 남명선생신도비를 둘러싸고 벌어진 사건에 대해 덕산 조씨 문중이 어떤 시각으로 임하고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밝히려는 목적으로 작성된 글이다.
        28.
        2013.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南冥 曺植의 神道碑로서 가정 먼저 세워진 것은 1617년 무렵, 그 문인 鄭仁弘이 찬술하고 정인홍의 문인 裵大維가 글씨를 쓴 것이다. 이 비석은 1623년 仁祖反正에 의해 정인홍이 賊臣으로 몰려 처형되고 난 뒤 사람들의 눈앞에서 없어지고 말았다. 겉으로는 적신으로 처형된 정인홍이 찬술한 글이기에 넘어진 것이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퇴계를 은근히 비판한 글이기에 더욱 세워둘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글이 찬술된 것은 1615년에 남명이 영의정에 증직되어 신도비를 세울 수 있었던 조건이 충족되었고, 정인홍이 남명의 문인 가운데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정인홍은, 퇴계가 그 문인들에게 편지나 대화를 통해 여러 차례 남명을 비판하였으므로 그것이 알려져 남명이 문묘에 종사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고, 이 글을 쓰기 이전까지 적어도 7편 정도의 글이 남아 전할 정도로 여러 차례 퇴계에 대한 비판을 시도하였으며, 이 글은 그 결정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남명의 일생에 대해서는 대곡이 찬술한 묘갈명이 가장 극진하다고 생각하고, 이 신도비명에서는 오로지 남명의 학문 내용이 유가의 정통에 해당되며, 퇴계의 남명 비판은 잘못된 것이라는 논리로 일관하고 있다. 정인홍이 이러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점은 「跋文解」에 보이는 바, 문인으로서 스승의 학문이 誣陷당한 데 대하여 坐視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師生間의 義를 생각한 데서 나온 정당한 행동으로 스스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당대 최고의 인물이라 알려져 있던 퇴계에 대해 과감하게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실패하였지만, 이는 정인홍이 광해군 때 實職에서 行公해 본적이 없으면서도 遙執朝權하던 山林政丞이었다는 점과 인조반정이라는 당시의 정치적인 문제에 묘하게 맞물려 있었던 것이 첫째 원인이었고, 다음으로는 당대부터 퇴계가 가지고 있었던 막강한 영향력을 내암이 결국 당해내지 못했다는 것이 둘째 원인이라 할 것이다. 정인홍이 정치적으로 패퇴한 인조반정 이후 대부분의 남명 문인이나 정인홍의 문인 후손들이 차츰차츰 남인화하거나 서인화했지만, 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서부 경남 일대에 현재에 이르기까지 400여 년에 걸쳐 남명 정신을 추존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은, 남명의 학문적 영향력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며, 그런 측면에서 보면 정인홍의 남명 신도비명 마지막 부분에서 언급한 ‘冥道日月’이라 표현한 기대가 앞날을 내다 본 표현이 아닌가 생각된다.
        29.
        2013.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의 목적은 조선 시대 사상가이며 대학자인 남명의 인간관계를 분석하여 유아기 대인관계교육의 내용 및 방법을 고찰하는 데 있다. 연구 결과 남명의 인간관계는 역할과 도리를 다하는 인간관계, 상대방을 존중하는 인간관계, 마음과 행동을 중시하는 인간관계를 실천한 것으로 분석되어졌다. 남명의 인간관계 실천이 유아기 대인관계교육에 주는 시사점은 덕의 함양과 근본을 갖춘 지식, 그리고 사회ᆞ교육적 가치의 강조이며, 이를 생활에서 실천화하는 방법을 강조한 것으로 나타났다.
        30.
        2013.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忠毅公 大笑軒 趙宗道(1537~1597)는 남명 선생의 제자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招諭使 金誠一(1538~1593)과 함께 왜적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웠고, 1597년 丁酉再亂때 안음현감 郭준(1551~1597)과 함양 黃石山城에서 왜장 加蕂淸正이 인솔한 적군과 싸우다 장렬히 순국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대소헌은 어릴 때부터 家學 또는 지역의 先輩 학자들로부터 익힌 공부를 비롯해 본격적으로 남명에게서 배운 학문의 지결을 몸소 실천하였다. 곧 義理精神을 근간으로 한 그의 학문적 바탕이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초개같이 버려 仁을 이룰 수 있었다고 본다. 대소헌은 평소 국가에 재난이 있으면 관직이 있고 없고를 막론하고 선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평소 배운 대로 실행하여 하늘의 떳떳함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세상을 잊고 자신만을 깨끗이 간직하는 것을 능한 일로 삼아 명예만 얻으려는 사람은 옳은 것이 아니고 문무를 겸비하고서 옳은 일에 몸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 올바른 선비라고 주장을 했다. 이러한 주장을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몸소 실천함으로서 선비의 전형을 보여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31.
        2012.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지난 20여 년간 진행되어온 남명학파에 관한 연구를 종합, 검토하는 논문이다. 지금까지 남명학파에 관한 연구는 아주 다양한 측면에서 진행되어 왔는데 본고는 그 중에서도 특히 남명학파의 거시적 동향에 관한 내용이 포함된 논문을 모아서 분석대상으로 삼았다. 분석대상 논문은 우선 통시적 연구와 시대별 연구로 나누었으며, 시대별 연구는 다시 남명학파의 형성 및 전성기에 관한 연구, 남명학파의 몰락 및 쇠퇴기에 관한 연구, 남명학파의 부흥기에 관한 연구 등 세 시기로 나누어 검토하였다. 사실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통시적 관점의 연구는 주로 남명학파의 동향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는데, 인조반정의 가해자와 피해자 가운데 피해자에 해당하는 북인만 연구해온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결과 남명학파의 공(共)보다는 과(過)가 부각되었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가해자인 서인에 대한 연구가 병행되어야 입체적인 연구가 이루어질 것이다. 시대별 연구도 자료의 한계성 때문에 더 이상 크게 진보할 가능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자료 발굴은 물론 자료 해석에 있어서도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는 것이 필요하다.
        32.
        2012.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의 목적은 1980년대 이후 최근까지 이루어진 남명 및 남명학에 대한 외국 연구자의 업적과 성과들을 회고하고 정리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선 연구사의 검토와 정리에 앞서 외국 연구자의 연구는 방법론적으로 자국의 연구 동향을 일정 정도 반영하기 마련이라는 전제에 입각해 외국인 연구자의 대다수를 점하는 중국과 일본에 있어서의 유교 내지 유학에 대한 인식과 연구 동향에 대해 개략적으로 검토해보았다. 다음으로 본론에서는 다섯 분야로 나눈 주제별 분류를 통해 외국 연구자의 연구 동향을 비교ㆍ검토하는 방법을 취하였는데, 실천 유학자로서의 남명과 남명학의 실천성 문제, 실천 철학으로서의 남명학이 지니는 실학사상과의 연관성 문제, 성리학자로서의 남명의 정체성과 주자학과의 거리, 남명 사상과 도가 사상과의 상관성, 남명학의 연관 분야 및 남명학파와 남명학의 계승 양상 등이 그것이다. 이들 주제 가운데 남명학의 실천성 문제는 외국 연구자가 일찍이 주목하던 바로서 지속적인 관심을 끌면서 논의의 대상이 되어 왔다. 아울러 외국 연구자에게 있어서도 이러한 실천 철학으로서의 남명학에 대한 관심은 이후 실학사상과의 연관성에 있어서 더욱 강화된 형태로 나타났다. 남명학과 주자학의 관계에 대해서는 영향 관계를 강조하는 입장과 양자 사이의 거리를 강조하는 입장으로 나누어지는데, 후자의 입장은 남명학이 원시유학의 정신을 수용하였다는 절충적 관점에서 도가 사상과의 관계를 주목하는 견해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기존에 외국인 연구자에 의해 이루어진 남명학 관련 연구는 자국의 연구 동향을 반영하는 한편으로 국내의 연구 동향과도 영향 관계를 맺으면서 그 질량에 있어서 일정 정도 성과를 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향후 연구의 심화를 위해서는 연구자의 국제화를 위한 체계적 대책의 수립 및 연구 활성화를 위한 시급한 대책, 예를 들어 관련 자료의 정리 및 번역 출판 등의 과제가 중요함을 제안하였다. 아울러 국내의 남명학 연구가 기존의 남명 사상의 언설을 반복 진술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현실 사회에 공헌하는 길을 찾기 위해 현대 중국에서의 유학 연구 사례를 모색해 볼 것을 제안하였다.
        33.
        2012.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정치의 통속적인 정의를 재검토하고 재조명하여 남명의 정치와의 관련성을 부각시키면서 그러한 맥락에서의 연구 성과를 종합적으로 재평가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즉, 정치란 무엇인가를 새롭게 생각해보면 호모 폴리티쿠스인 남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지평이 열릴 것을 기대해 마지않는다. 예를 들어, 벼슬에 나아가지 않은 남명의 출처가 정치적 행위의 일부였음을 인식하는 일이 가장 기본적인 단초가 될 것이다. 호모폴리티쿠스 남명의 총체성을 파악하는 일은 또한 텍스트적인 논쟁과 콘텍스트 구성과 관련된 복잡성을 넘어서서 새롭고 건설적인 방법론적 혁신을 필요로 한다. 이를 위해 두 가지 방법론을 제안하여 새로운 연구 방향 정립에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제 I 장에서는 정치 현상을 보다 세속적이고 일상적인 차원으로 들여다보고 그에 걸맞은 정치의 정의를 도출하고자 한다. 그 결과로써 정치가 포괄하는 범주가 보다 더 광범위해지고 그 안에서의 질서를 새로운 분류로 구분지어 보고자 한다. 이 시도는 남명의 글과 행위의 많은 부분이 정치의 범주에 반드시 귀속되어 있고 따라서 박병련이 주장한 대로 정치학적 프레임은 남명을 연구하는데 필연적이라는 것을 재삼 강조하기 위함이다. 제 II 장에서는 시도된 새 정의에 따라 남명과 관련된 정치 분야에서의 연구 성과를 회고 하고 그 동향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를 내리고자 한다. 제 III 장에서는 연구 성과에 대한 바람직하고 긍정적인 경향에 대해 두 가지 도움이 되는 방법론을 제안하고자 한다. 남명을 계승한 후대 남명학파들이 정치 일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정치적 인간으로서의 남명의 족적, 사상이나 가르침, 그리고 정치 행위 등이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결과라고 봐야 할 것이다.
        34.
        2012.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설립 20주년을 기념하여 남명문학 분야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고 향후 과제를 살피기 위한 목적으로 집필되었다. 남명문학 연구가 시작된 1980년대 이후의 연구 성과를 장르별로 분류하고, 『남명집』에 수록된 문체 유형에 따라 운문과 산문 분야, 총체적 분야, 비교문학적 분야 등 4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남명문학 연구는 현재까지 100여 편의 성과가 산출되었다. 남명의 창작품이 많지 않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적지 않은 수치이다. 이의 검토를 통해 몇 가지 문제점을 도출할 수 있었다. 예컨대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남명 삶의 특징적 국면을 강조하는 연구가 지나치게 집중적으로 반복적으로 진행되어 왔고, 또 이를 대변할 만한 소수의 작품만이 지속적으로 재인용되었다는 점, 특정 분야의 연구는 초창기 이후 장기간 정지되어 있다는 점 등이 있다. 연구가 지속되어 성과가 증가했음에도 이러한 양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이는 남명문학 연구가 직면한 총체적 문제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남명문학 연구의 절대적 분량을 차지하는 한시에 대한 포괄적인 정리가 필요하다. 『남명집』의 한시와 남명의 일대기를 대조하는 작업이다. 『남명집』의 수록 체계가 시대 순이 아니고 作詩 시기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하지만, 부분적으로라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남명의 삶은 크게 네 번의 전환기가 있었고, 그때마다 뚜렷한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져 왔다. 적어도 이러한 4 시기로의 분류만이라도 가능하다면, 현재 소강상태에 있는 남명문학의 연구는 한층 발전된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35.
        2012.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2012년 7월까지 남명 조식의 철학사상을 연구한 업적들을 회고한 글이다. 다섯 분야로 나누어 논의의 흐름을 살펴보았는데, 실천유학성에 대한 논의, 남명 성리학의 속성에 대한 논의, 탈유학성의 논의, 공부론의 특징에 관한 논의, 이기론적 성향에 대한 논의가 그것이다. 대부분의 논문들은 남명의 유학이 실천유학이자 脫이론적이라는 데 동의하고, 남명학의 특징을 비교라는 방법에 의하여 탐구한다. 비교 대상으로 삼아진 이들은 이황과 주희였다. 비교를 통해 남명만이 가지는 특성이 많이 드러났으나, 지나치게 차이성을 강조하고자 한 경우 상식에서 벗어난 무리한 주장들을 내놓아 남명학 이해를 오히려 저해한다. 이에 필자는 저술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남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차별화와 함께 동일성을 찾는 작업이 중요함을 제안하였다. 아울러 남명학이 동아시아 유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찾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기존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생활 속에서의 체험을 통해 공부해야 한다는 남명의 교훈은 여전히 유효함을 주장하였다.
        36.
        2012.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남명의 생애와 발자취에 대한 관심은 상당히 오래 되었다. 어찌 보면 남명 당대에도 이에 대한 관심이 있었고, 남명이 돌아간 직후 이에 대한 정리가 본격화되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남명의 생애 가운데 예민한 부분이 있기도 하고, 제자 정인홍의 정치적 부침에 따른 후유증으로 생애에 관한 자료도 여러 차례 여러 사람에 의해 중복하여 지어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남명에 대한 생애자료는 그 누구보다도 많이 남게 되었다. 근대에 들어 남명의 생애를 정리하여 소개하는 일에 그리 적극적이지 못하였다. 근대의 인명사서 등에 남명에 대한 내용은 비슷한 시기의 인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략한 감이 있다. 1990년대 초에 남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남명의 생애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본격적인 연구와 번역, 교정 등은 이루어지 않았다. 다만 최근 들어 다행스럽게 남명에 관한 생애자료가 다시 전반적으로 검토되고 정리되고 있다. 남명의 생애에 관한 정리와 소개, 교정과 연구는 논문, 저서, 소설, 사전, 교과서 및 개설서 등 여러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 가운데 소설로 지어지고 교과서 및 개설서에 소개되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으나, 논문, 저서 등의 형태로 점점 깊이 있게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인터넷 온라인상에 사전적 설명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남명의 생애에 대한 철저한 실증을 바탕으로 생애가 정확하게 소개되어야 할 것이다. 남명의 발자취에 관한 정리와 소개는 주로 책으로 몇 권 나와 있는데, 개설적으로 간략히 설명한 것에서부터 특정한 분야 예컨대 한시 등과 관련하여 발자취를 탐방하는 형식으로 된 것도 있다. 그리고 그의 생애의 발자취와 학문적 궤적을 관련지어 연구한 것도 있다. 이들 발자취에 대한 정리와 탐구는 이전의 유적지에 대해 소략하게 소개한 책자가 갖는 한계를 극복하였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발굴하거나 정리가 되지 않은 발자취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한 실정이다.
        37.
        2012.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지금까지 교육부분에 있어서 남명학 연구성과를 정리하여 그 동향을 밝혀 앞으로의 남명학 연구의 방향을 정하기 위하여 작성하였다. 여기서 남명학은 남명조식(1501-1572)과 그의 문인 집단인 남명학파에 대한 연구를 포함한다. 교육부분에 있어서 남명학 연구는 1947년부터 시작되었지만, 본격적인 연구는 1990년 이후부터 시작된다. 2000년까지의 연구는 거의 대부분 교육사상 일반에 집중되어 있다. 그것도 남명에 편중되어 연구되었다. 2000년 이후는 남명학의 교육부분에 관한 연구가 다양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2000년 이후에는 기존의 연구자가 새로운 방법으로 연구의 영역을 확대하였고 다양한 전공의 연구자가 남명학의 교육부분 연구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남명의 문인에 대한 개개인에 대한 연구가 남명학파라는 문인집단을 중심으로 연구의 방향이 변화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인접 학문의 연구방법이나 결과를 적극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의 연구는 첫째로, 남명과 남명학파의 교육에 관한 다각도의 연구와 남명학의 계승에 관한 연구를 통하여 역사 속에서 남명학파의 정체성을 찾는 연구가 필요하며, 둘째로 남명과 남명학파의 향촌사회에서의 교육실천에 관한 연구를 통하여 그들의 영향이 향촌사회에 어떠한 형태로 적용되어 향촌사회 변화와 발전에 기여해 왔는가를 밝히는 연구가 필요하며, 세 번째로 남명과 비교될 수 있는 사람과의 비교연구를 통하여 교육사에 있어서 남명과 남명학파의 위상을 정립하는 연구가 필요하며, 넷째로 남명과 남명학에 대한 연구에 현대 서양교육학의 이론과 연구방법을 지속적으로 도입함으로써 지금까지의 남명학 연구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과 한계점을 찾아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교육영역에 있어서의 남명과 남명학파에 관한 연구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관한 연구를 바탕으로 현재 교육문제 해결의 단서를 제공하고 나가가 미래 교육 발전의 방향을 제공할 때 의미가 있을 것이다.
        38.
        2012.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은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개소 20주년을 맞아 남명학연구소를 중심으로 지금까지의 남명학 연구에 대해 시기별로 발전 양상을 살펴본 것이다. 1990년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설립을 기준으로 1990년 이전과 남명학연구소 설립 후인 1990년부터 2011년까지를 남명선생 탄신 500주년이 되는 2001년을 기점으로 삼아 전후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우리나라에서 남명 조식 선생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은 1980년대 후반이다. 1980년대 후반 김충렬 교수에 의해 학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남명학은 1990년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설립을 기점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해왔다. 남명 중심의 연구에서 범위를 확대해 남명 제자들을 통해 남명사상의 계승 양상을 구명해 남명 정신이 우리나라 선비 정신의 본보기로 인식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001년 남명탄신 500주년을 맞아 남명학과 다른 학파와의 비교를 통해 16세기 유학사에서 남명학의 특징을 학계에 널리 알렸으며, 외국 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남명학의 국제화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지금껏 경상대학교 남명학 연구소를 중심으로 남명과 남명학파에 대한 연구는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남명학 연구의 발전 과제도 적지 않다. 20여년 동안 ‘남명’이란 주제로 수많은 연구 성과물들을 세상에 내놓았지만, 아직 남명 선생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인지도는 적어도 경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굳이 퇴계선생과 비교하지 않더라고 남명의 정신과 학문이 우리나라 대표적인 선비정신의 표상으로 전 국민들이 인식할 때 까지 관계자들의 꾸준한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39.
        2010.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남명학연구󰡕 29집 소재 「󰡔南冥集󰡕 諸板本의 刊行年代」라는 오이 환의 논문에 대한 반박 논문이다. 요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남명집󰡕 기유본 문경호 발문의 ‘임인(1602) 년간’은 문집의 편집 작업 이 진행된 시점을 언급한 것이고, 초간된 것은 서문이 찬술된 갑진(1604)년이 며, 장판각에 불이 난 뒤 순찰사 유영순의 후원에 의해 병오(1606)년 무렵에 1 차 중간이 있었고, 다시 이를 부분적으로 수정하고 보유를 추가하여 간행한 것 이 기유(1609)본이다. 둘째, ‘年間’, 즉 ‘즈음’이란 용어가 간행연대를 적시한 용어로 보기에는 분명 하지 않고 너무나 느슨하다. 간행한 것은 분명한 것이고, 문집 편찬을 의논한 것은 오늘날처럼 간행위원회를 만든 것이라기보다는, 1600년의 󰡔퇴계집󰡕 간행 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 시기가 불분명하였던 것이다. 셋째, 갑진년 8월에 정인홍이 찬술한 서문이, 문경호가 발문을 실은 그 책에 같이 실려 있다는 것은 문집의 초간이 갑진년에 있었다는 것을 가장 웅변적으 로 말해주는 것이다. 넷째, 초간본의 장판각이 불타고 유영순에 의해 중간이 되었다면 이는 유영순 의 관찰사 재임 기간[1605년 9월-1607년 3월]과 관련시키면 병오(1606)년 무렵이라 해야지, 오이환처럼 갑진(1604)년으로 볼 수는 없다. 다섯째, 오이환이 󰡔고대일록󰡕의 신축(1601)년과 임인(1602)년 등에 보이는 ‘看役’이 문집 간행의 일이라고 해석할 근거가 없다. 더구나 계묘(1603)년 겨울 에 李堉이 鄭逑의 심부름으로 󰡔남명집󰡕의 편집 작업을 주도하던 鄭仁弘에게 특 정한 글을 제외하기를 요구하였는데, 정인홍이 “선생의 문자라면 片言隻字라도 가볍게 취하거나 뺄 수 없다.”며 거절하였으니, 이는 1603년 겨울 이전까지 문 집의 편집 작업이 계속되고 있었다는 근거 자료가 된다. 여섯째, 이상 네 가지 이유로 임인(1602)년에 󰡔남명집󰡕이 초간되었다고 주장 한 오이환의 설이 설득력을 잃게 된다. 일곱째, 이에 오이환은 유영순에 관한 문경호의 기록이 신빙성이 없다며, 하 징의 「덕천서원기」와 배대유의 「신산서원기」에서의 관찰사 기록 착각의 예를 들었다. 그러나 이는 논리가 닿지 않는다. 하징과 배대유가 설사 관찰사에 대하 여 착각했다 해도, 그것이 문경호의 착각에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증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필자는 그것조차 오이환이 사실이 아닌 주장을 한 것으로 논증하 였다. 여덟째, 우선 하징의 「덕천서원중건기」에서 윤근수가 관찰사로서 재임 기간 [1574년 10월-1575년 10월] 중에 덕천서원의 창건을 지원하였다는 것을 오 이환은 하징이 착각하여 잘못 기록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재임 중에 그가 지원한 뒤 1576년 봄부터 일을 시작했다고 보면 하징의 기록에 전연 무리가 없 음을 알 수 있다. 아홉째, 배대유의 「신산서원기」는 󰡔모정집󰡕 기록을 보면 ‘방백읍재’ 밑에 윤 근수와 하진보가 각각 세주로 처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세주를 후인이 추기한 것으로 보지 않으려는 것은, 오이환이 배대유가 착각했다고 보기 위함 에 다름 아니다. 배대유는 당시의 관찰사 김수와 김해부사 양사준의 인품을 문 제삼아 그들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애초에 ‘방백읍재’라고만 하고, ‘金方伯睟梁知府思俊’이라 표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40.
        2010.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이상필 교수가 2008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남명집󰡕의 초기 간본들과 관련하여 김윤수 씨의 설을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필자를 비판한 데 대 한 응답이다. 이 교수는 문경호의 기유본 발문 중에서 “순찰사 유영순 또한 공 역을 도왔다.”는 한 구절을 鐵案으로 삼아, 이 구절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필자 를 비난하고 있다. 이것이 그들의 유일한 논거인 까닭에 필자는 남명학파의 초 기 역사와 관련된 다른 자료들에서도 경상감사가 서원의 일에 관여했다는 기록 은 모두 󰡔道先生案󰡕과 어긋남을 증거로서 제시했던 것이다. 만약 이러한 지적 이 이 교수의 주장에 치명적인 것이 아니라면, 그가 「덕천서원중건기」의 기록 을 왜곡하고 「신산서원기」 중 해당 부분의 贗作說을 제기하는 것과 같은 무리 를 범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남명집󰡕의 초간본이 임인년에 간행되었음은 기유본 발문에 명기되어져 있 으며, 󰡔고대일록󰡕 속에도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있다. 임인 전해인 신축년 (1601) 조에 ‘留寺看役’ 등 해인사에서의 간행 작업에 관한 기록들이 보이는 점 이 그것이다. ‘看役’ 또는 이와 유사한 표현은 이후의 󰡔고대일록󰡕에도 많이 보이 고 있는데, 그것들에서도 이 용어는 타인이 하는 작업을 감독한다는 의미로 쓰이 고 있으며, 정경운은 벗들이 모두 귀가한 후에 혼자 해인사에 남아 이러한 일을 수행하고 있으므로, 그것은 판각이 아닌 편집 작업의 의미로는 해석될 수 없다. 필자의 󰡔남명집󰡕 판본 연구도 이제 완결 단계에 접어들었으므로, 차제에 전체 판본 계통과 판본명에 대한 그 동안의 성과를 정리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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