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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2010.05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논문은 퇴계의 한시에 나타난 대나무의 형상사유와 미의식을 연구한 것이다. 퇴계는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인 동시에 약 2000여수의 한시를 남긴 조선중기 사림의 대 문호였다. 이 시기 조선 사림들의 예술 경향 속에는 사군자로 지칭되는 절개와 지조의 상징물들이 독특하게 나타나 조선 사림의 예술을 선도하였다. 시․ 서 화를 통한 사군자의 예술지향은 성리정신과 조화를 이루며 한 시대를 풍미하 게 되었다. 이 중심에 퇴계의 대나무에 대한 한시가 있었다. 퇴계는 동아시아의 문학사에서 대나무를 형상화한 다양한 장르의 문예들을 접하고 이들을 바탕으로 대나무를 문학적으로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퇴계는 대나무를 직접 가꾸기도 하고 완상하기도 하면서 대나무를 비유와 상징의 수법으로 형상화 했으며, 당시에 유행하던 대나무 그림위에 제화시를 남기기도 했다. 그의 대나무 한시에는 다양한 미의식이 함의되어 있다. 그가 주창한 대나무 이미저리는 주로 선비의 굳은 지조 와 곧은 절개를 상징한다. 퇴계의 대나무 한시에는 꿋꿋하고, 맑고, 깨끗하고, 강 인하고, 의젓한 이미지를 그려낸다. 그의 대나무를 소재로 형상화한 시 속에는 枯淡, 拙樸, 苦拙, 淸眞등의 楚楚한 풍격의 미의식이 함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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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2009.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松江이 활동하던 시대는 倭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의 난리가 있었고, 조정에서는 黨爭으로 인한 정치적 다툼으로 인해 정치 ․ 사회적으로 혼란이 극심한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西人의 우두머리로서 정치에 몸담았던 송강은 黨派로 인한 답답한 심정과 謫所生活에서 겪는 고민을 해소하고자 도연명이 자연을 벗 삼아 참신하고 깨끗한 삶을 살았던 田園閑居 생활을 흠모하고, 그의 영향을 받아 自然憧憬의 시를 읊었다. 송강은 도연명처럼 자의적으로 歸去來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타의에 의한 謫所生活에서 出仕에 대한 의욕을 잃지 않고 있다가 마침내 임금의 은혜로 謫所에서 풀려나 정계에 복귀되어 좌의정이라는 높은 벼슬에까지 오른 것은 도연명이 자의적으로 전원에 歸去來한 후 다시는 조정에서 불러도 정치에 뜻을 두지 않은 出處觀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이것은 임금에 충성하고 經世濟民에 뜻을 두었던 16세기 조선 士林들의 出處觀과 송강도 같이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한편 도연명은 政治道義가 상실되어 不義한 방법으로 신하에 의해 왕위가 찬탈되어 晉에서 宋으로 나라가 바뀌자󰡒천하에 도가 있으면 벼슬하고, 도가 없으면 물러나 숨는다.(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와 󰡒달통하면 나서서 천하를 구제하고,막히면 할 수 없이 물러나 자신을 착하게 한다.(達則兼善天下,窮則獨善其身.)라는 儒家의 관념에 出處觀을 두었고, 송강은 맹자가 말한 󰡒삶도 내가 원하는 바요, 義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을 진댄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生, 亦我所欲也. 義, 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에 出處觀을 두어 經世濟民하고자 끝까지 벼슬에 대한 집착을 하였다. 이를 보면 兩人의 出處는 儒家의 가치관에 의해 정했다는 것이 相似點으로 나타났다. 松江은 당시 黨爭으로 인한 정치 현실에서 고뇌를 해소하고, 謫所생활에서의 위안을 얻는 데는 술만큼 좋은 媒介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도연명이 憂愁를 잊기 위해 술을 마셨다는 점과 일치한다. 도연명은 비록 다섯 편의 시에서 짧은 시구로 국화사랑의 시를 표현하였으나, 周濂溪가 그의〈愛蓮說〉에서 󰡒국화는 꽃의 은일자다.(菊, 花之隱逸者也.)󰡓라 말하고, 󰡒晉의 도연명은 유독 국화를 사랑하였다. (晉陶淵明獨愛菊)󰡓라고 말하여 도연명의 국화사랑을 특별히 부각시킨 이후 송강도 󰡐菊花󰡑하면 도연명이 동쪽 울타리 밑에 심었던󰡐黃菊󰡑을 연상하였고, 국화를 통해 名利로부터 탈속하여 선비로서의 고결한 자태를 보여준 도연명을 국화사랑의 대표자로 생각하며 존경과 흠모하는 시를 읊었다. 田園은 생명의 근원이 샘솟고, 자연의 숨결과 생동감이 넘치는 곳이며, 순박하고 다정다감한 정서가 깃들어 있는 곳이다. 그리고 우리 인간들에게 勤勉과 休息을 주는 최후의 安息處이기도 하다. 도연명은 일반 전원시인들과는 달리 그의 시에서 田園에 대한 讚美와 함께 몸소 전원에서 躬耕한 체험을 바탕으로 田園의 생명력이 솟구치는 활기찬 정경을 읊어 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에 松江도 도연명이 읊은 시구와 典故를 援用하여 도연명의 田園閑居에 대한 동경의 시를 지었다. 陶淵明이 만년에 쓴 〈桃花源詩幷記〉는 晋 ․ 宋年間에 민중들이 정치의 災禍로부터 피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 이상사회를 추구한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잘 나타난 작품으로 人口에 膾炙되어 왔다. 이 작품은 간결한 언어와 뛰어난 造語力으로 순박하고 화목한 농촌사회를 이상세계로 삼아 老子의 ‘小國寡民’ 이나 儒家의 ‘大同世界’ 이념을 잘 형상화하여 혼란시대에 처한 인간들의 간절한 희망을 반영시켰다. 도연명의 이상향인 桃源世界는 신선이 사는 세계가 아니라 포악한 秦의 난리를 피해 漢나라가 있었다는 것은 물론 그 뒤로 魏나라 晉나라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면서 조상에 제사지내고, 손님에게 닭을 잡아 술을 대접하는 다정다감한 情感과 불 때서 밥해 먹는 인간사회의 정황을 묘사하였기에 松江도 도연명이 묘사한 儒家的 관념의 桃源世界를 갈망하였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이라는 운명으로부터 피할 수 없는 존재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도연명은 죽음으로부터 해탈하고자 不老長生을 추구하는 道家나 靈魂不滅의 佛家에도 관심을 가져 보았다. 그러나 여기서도 宿命的인 죽음을 해결할 방도가 없음을 깨달은 그는 儒家的인 自然歸依觀에 최후의 몸을 맡겼듯이 송강도 도연명처럼 儒家的 삶의 방식을 추구하다가 그의 생을 마쳤다. 결국 兩人은 1200년 가까운 시대적 차이와 각기 다른 국가에서 다른 정치 ․ 사회의 풍파를 겪으면서 각자의 삶을 살아갔지만, 兩人의 자연사랑과 은일관념은 儒家的 관념으로 불후의 전원시가 문학을 창작한 것이 일치하며, 兩人의 문학세계는 후대 시가 문학발전에 큰 공헌을 한 인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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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2007.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study is on the characteristics of the food culture through the written folk poetries which were described vividly the life customs peculiar to the Nation and so much that were Korean National customs papers written by Chinese poetry - during the latter part of the Choson period. It is used the way which is studied by the literature after collection, analysis, synthesis the analyzed second material of the latter part of the Choson period's written folk poetries. It is summarized to below five contents of the characteristics of the food culture through the written folk poetries. The first is the various and abundant food culture. The second, that is the food culture of praying blessing and praying a fruitful. The people prayed to be a year of abundance of food stuff and train oneself and have medicine for their health, but there has been repeated seasonably an occult action for being blessing which had settled down to the beginning of the year's customs. The third, it is the food culture of share tender feeling with among the people. The fourth, it is the food culture of business and economy's growth image. The fifth, it is the food culture of an image of economic distress and the trouble between rich and poor.
        4,900원
        26.
        2017.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蒼崖 許萬璞(1866~1917)은 진주 지역에서 활동한 한말의 유학자 이다. 武科에 급제하여 잠시 武人으로 살았으나, 외세의 침략과 문란한 정치 현실에 비분강개하여 스스로 관복을 벗어던지고 고향인 진주 지 수 승산마을로 낙향하였다. 그리고 세상을 마칠 때까지 은둔하다시피 하면서 經史를 탐구하고 스승을 찾아다니며 도학을 강론하였다. 본고 는 그 동안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진주 지역의 한말 유학자 창애 허만박을 주목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허만박의 문집을 토대로 그의 삶을 보다 세밀하게 추적해보고 그 자취를 담고 있는 한시를 검토 분석 하여 그의 내면의식을 따라가 보고자 했다. 52세의 나이로 비교적 짧은 생을 살다간 허만박은 선조들의 행적이 그러하듯 젊어서부터 은거 지 향적 면모를 보이다가 무과 급제 후 관직에 진출해 서울 생활을 시작했 다. 그러나 서울에서 보고 겪은 외세의 침략과 국가적 위기에 그는 절망 하고 스스로 사직하였다. 그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승산 마을의 염창강 가에 은둔하면서 도학의 근본 탐구에 골몰하며 절의를 실천하고자 하 였다.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로 인해 스승 송병선을 잃은 허만박은 이후 송병순과 최익현, 전우를 차례로 스승으로 모시며 도학을 강론하 고 자제와 후진 교육에 힘을 쏟았다. 이 시절 그는 상소문과 편지 또는 제문에서 혼란하고 무력한 정치 현실과 일본의 침략에 대해 비분강개 하며 통탄과 憂國의 심정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거듭되는 집안의 불행으로 위축된 모습과 하루하루 견디는 심정을 표출하기도 했다. 삶의 이력으로 볼 때 그는 폭넓은 교유 관계를 형성하기는 어려웠 던 것으로 보인다. 허만박은 자신이 살았던 智水 勝山 마을의 山水를 대상으로 삼아 시를 많이 지었다. 더불어 인근 주변 지역의 승경이나 또는 자연 속의 구체적인 사물들에 대해서도 시적 감수성을 발휘해 시를 짓는 계기로 삼았다. 물론 한시에 묘사된 산수 자연은 허만박의 삶의 흐름과 그에 따른 정서가 스며들면서 시기에 따라 다른 느낌과 이미지를 전달하고 있다. 허만박은 자신의 삶 대부분을 아름다운 고향의 산수에서 은둔하 며 조용하게 보냈지만, 당시 나라의 형세가 혼란하고 위급했던 만큼 그에 대한 심정과 감성도 시의 소재나 때에 따라 드러내기도 하였다. 1910년을 전후해 지은 시에서는 나라 잃은 분노와 비통함의 시적 정서 가 점점 고조되고 있었으며, 더불어 체념과 자조적 한탄도 뒤섞여 표출 되었다. 또 현실과 차단한 채 은거의 즐거움만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의식도 담아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27.
        2016.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김선신의 『두류전지』 현전하는 유일의 지리산 지리서이다. 지리산권 문화 를 연구하기 위한 일환으로 『두류전지』를 중심에 둔 지리·불교·문학 등 다양한 분과별 연구가 기획되었는데, 이 글은 그 중 문학 분과의 연구 성과로, 『두류전지』 제11편 「貼山詩話」 속 한시를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첩산시화」에는 모두 100여 개 항목의 한시가 수록되어 있으며, 그중 온전한 체재를 갖춘 작품은 대략 80수이다. 이들 작품은 김선신이 집필에 활용한 『동국여지승람』 과 지리산권역 10개 지역의 읍지에서 선별한 것이다. 모두 50여 명 작가의 작품이고, 시기적으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중기까지이다. ‘첩산’이라는 말은 ‘지리산에 기대어 있는, 지리산의 주변이나 가장자리’를 뜻 한다. 이는 「첩산시화」에 수록된 작품이 ‘지리산’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주변 사 람의 이야기를 담은 한시라는 의미이다. 「첩산시화」 속 한시 가운데 9할 이상이 지리산의 주변을 노래하고 있다. 「첩산시화」에 드러나는 김선신의 이러한 선별 의식은 여느 山誌의 체재와 비교해 보아도 매우 독특하다. 예컨대 『주왕산지』 나 』청량산지』에는 ‘題詠 또는 記錄’ 등의 제목 아래에 해당 산을 유람한 유람록과 유람시가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두류전지』에는 지리산유람록을 한 편도 실지 않았고, 유람시 또한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처럼 김선신이 ‘지리산’이 아니라 ‘지리산 권역’을 읊은 것은 그 속에서 지 리산과 함께 살아가는 인간의 삶과 문화를 드러내고, 그들과 함께 지리산이 지 닌 온전한 덕을 후세에 전하고 싶었던 의도라 판단된다.
        28.
        201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간정일록은 해기옹 김령이 단성항쟁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1862년 6월 4일부터 1863년 12월 30일까지 전라도 임자도에 1년간 유배되었 다가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지낼 때까지의 일상을 기록한 유배일 기이다. 한 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신이 겪은 일들을 기록하기 시작 한 며칠을 제외하고, 날짜에 따라 매일의 일상을 행간의 구분 없이 기록 하였다. ‘간정’이란 『주역』에 나오는 말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마음을 바르게 가진다면 허물이 없어진다[간정무구]’는 의미이다. 간정일록에는 130여 편의 한시가 실려 있다. 그 시들은 벗들과 술자리에서 수창할 때, 마음속의 회포를 풀려고 할 때, 주위의 요구가 있을 때, 잠을 이루지 못할 때 등 다양한 상황에서 지어진 것들이다. 이 시에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김령의 인간적인 면모들이 담겨 있다. 김령은 단성항쟁을 주도하며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문집이 없음으로 인해 그의 면모를 알 길이 없었다. 간정일록의 한시에는 온유돈후한 가장의 모습, 현실의 부조리에 대 해 개탄하는 유자(유자)의 모습, 고뇌를 타개해 나가려는 지식인의 모습 등 알려지지 않았던 김령의 인간적인 면모들이 나타나고 있다. 김령은 강자에겐 강직하며, 약자에겐 온유한 인물로 약자 편에 서서 현실적인 부조리를 개선하고자 했다. 간정일록에 수록된 한시에 나 타난 이러한 김령의 인간적 면모들을 보면 그가 단성항쟁을 주도한 그 이면을 알 수 있다.
        29.
        2010.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청학동은 우리 漢詩史에서 ‘이상향에 대한 동경’이라는 시적 제재로 사용되어 진 주요한 모티브 중 하나였다. 그리하여 많은 시인묵객들이 이상향에 대한 동 경의 실천태로써 이른 시기부터 청학동을 찾았다. 초기 청학동을 찾는 이들에 게 ‘청학동’은 선계 공간이라는 이상향이었다. 현실 세계에 존재할 수 없는 선계 로의 탐방은 부정과 좌절이라는 정서로 시화되어 나타난 것이 주를 이루었다. 청학동이라는 선계로의 유람은 현실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갈등과 회한이 어 우러져 있다. 다만 일반적인 산수시와 달리 청학동 소재 한시에 나타난 청학동 이라는 공간은 수기의 방편으로 사용된 예가 드물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류의 작품에 드러난 청학동은 현실 밖, 피세의 관념적 공간이자, 현실 속에서 부정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었다. 열망과 부정의 모순된 정서가 시화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상향에 대한 동경이라는 인간의 욕망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리산의 특정 지역을 청학동에 비정하였고, 관념 속의 청학동은 현실적인 명승공간으로써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이후 청학동은 선계 공간으로서의 지위와 명승 공간 으로서의 지위를 모두 지니게 되었다. 지식인의 한시 작품에 나타난 명승으로써의 청학동은 현실의 불행이 완전하 게 단절된 공간, 갈등과 번민이 없고 조화롭고 평화로운 공간으로 인식되는 경 우와 현실 밖, 피세의 관념적 공간이자, 현실 속에서 부정할 수밖에 없는 공간 으로 인식되는 두 가지 경향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모든 공간들은 열정과 한계 로 인하여 여러 양상으로 나타났지만, 과거 지식인이 추구하였던 이상향이었다. 시인이 청학동을 선계공간으로 인식하였든, 명승공간으로 인식하였든 공통적 으로 나타나는 요소는 현실 세계에 대한 철학적 부정을 통한 이상향에 대한 동 경이었다. 또한 이러한 시적 전통은 ‘청학동’이라는 특정 공간이 우리 민족의 이 상세계에 대한 구체화 작업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30.
        2009.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漢詩는 작가의 입장에서나 독자의 입장에서나 인간에 대한 이해라고 할 수 있 다. 한시는 작가에게 사소하고 은밀한 정서의 토로를 가장 잘 보장한다. 독자는 한시를 읽으면 작가의 삶의 진실에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 어떤 인물을 이해하고자 할 때 그가 남긴 고담준론의 철학 저술을 읽는 것 못지않게 그가 남 긴 단편의 한시를 꼼꼼히 읽는 것도 중요하다. 俛宇 郭鍾錫(1846~1919)의 한시가 수록된 󰡔俛宇集󰡕의 편차는 기본적으로 編年의 방식을 따르고 있어 작품의 창작 시기를 대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간 행 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한시 작품의 수량은 1,541題 1,998首에 이른다. 16세 부터 59세까지의 작품이 전체 수량의 약90%이고, 을사늑약 이후에 해당하는 60세부터 74세까지의 작품은 175제 255수로 10% 남짓에 지나지 않는다. 문 집 간행이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작품 분포가 심한 편차를 보이는 것이다. 본 논문은 곽종석의 한시 창작에 대한 태도를 우선 살피고, 이어 자연물을 마 주하여 느꼈던 정서를 토로한 詠物詩를 분석하고, 마지막으로 인간관계 속에서 발생한 정서를 표현한 한시를 해석해 보았다. 그는 가슴에 감응하는 정서를 자 연스럽게 토로하는 방식의 한시 창작을 긍정하면서 일생 동안 한시를 지었다. 자연을 마주하여 物我一體의 심정을 느끼기도 하고 심성 수양을 돌이켜보기도 하면서 인격을 완성해 나갔다. 이리하여 붕우 간, 사제 간, 가족 간의 인간관계를 우정과 공경과 사랑의 마음으로 유지해 나가는 인격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었다. 한시 작품을 통한 이상의 고찰은 곽종석이 <布告天下文>과 <巴里長書>를 발 송한 배경을 이해하는 데에 일정한 도움이 된다. 민족 간 국가 간 유지되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서로의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상호존중이다. 집단 간의 상호존중은 근본적으로 자연과 인간을 사랑하고 존중할 줄 아는 개 인의 인격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31.
        2009.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俛宇 郭鍾錫의 漢詩에 부조된 지리산의 형상을 조명한 것이다. 논의는 곽종석이 경상우도의 지역적 기반을 가진 지식인으로서 지리산과 南冥 曺植을 어떻게 인식하였는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곽종석은 학통으로는 퇴계학파에 속하는 일원이었으나 19-20세기 경상우도 의 학풍에 대응하여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을 함께 존숭하는 태도를 취했다. 다 만 본고에서 곽종석의 시문 중 지리산 한시로 대상을 제한한 까닭은 ‘남명학파 의 계승과 발전’이라는 기획주제에 부응하기 위함이었다. 남명 조식의 만년 강 학처였던 지리산 덕천 일대를 방문하고 쓴 곽종석의 기행시는 다분히 남명학과 의 연장선상에서 진단해야 진가가 드러날 수 있는 자료라고 판단했다. 실제로 29부터 33세 상간에 지리산을 방문하고 남긴 곽종석의 한시는 남명 조식과의 정신적 교감이 정서적인 축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는 29세부터 33 세까지 수차례 지리산을 방문하면서 「入德門賦」를 비롯하여 「頭流記行二十五 篇」, 「後頭流記行三十篇」이라는 연작을 남겼거니와, 이 일련의 작품 속에는 남 명 조식을 추념하고, 도학의 맥락을 구성하려는 정신적 경향이 농후하였다. 이 에 본고는 「入德門賦」를 통하여 곽종석의 지리산 기행이 지닌 의미를 탐색하였 으며, 2차에 걸친 頭流記行 연작을 통해 그의 한시에 투영된 巡禮山水志로서의 성격, 看山看水 看人看世의 雙觀的 경향, 朱子에서 南冥으로 이어지는 道學區 구축의 성향을 조명할 수 있었다. 본고에서 간추린 이러한 성격들은 남명 조식에 대한 19-20세기 경상우도 지 식인의 지적 풍토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으며, 덕천 일대의 지리산이 어떤 상징적 의미를 축적하게 되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32.
        200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에서는 주로 조선의 사대부들이 남긴 지리산 한시를 통하여 지라산에 대한 그들의 사상적 인식이 어떻게 드러나 았는가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비록 유학자 내지는 유학척 교양과 식견, 그리고 그러한 분위기에 젖어 살았던 사람들이 남긴 시이가는 하지만, 그들이 지리산과 관련지어 말한 사상의 폭은 외 형적으록 매우 포괄적으로 나타나 보였다. 하지만 이면적인 성격을 살펴보면 이들 의 유가척 안식도 매우 폭이 좁고, 불교나 도교 그리고 민간신앙에 대한 인식은 매우 자신틀의 편의에 맞추어져 있음을 볼 수 있는데 다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유가적인 인식은 ‘존현’ 정신으로 특정지을 수 있다. 도가적 인식은 ‘유선’ 사상 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불가적 인식은 ‘향도’ 의식으로 특정지을 수 있다. 민간신 앙적 인식은 ‘불배’ 의지로 특정지을 수 있다. 이들이 지리산을 가는 동안, 그리고 지리산 위에서 보고 겪은 것에 지리산에 대 한 인식이 다양하게 드려나 었는데, 지리산을 다녀온 뒤의 생각에도 또한 유가적인 생각을 바탕으후 한 감회를 피력한 것이 많다. 지리산에 오르거나 다녀오니 현 설의 막힌 것 흑은 물든 것이 터지거나 씻어졌다고 감회를 밝혔다. 한마디로 마치 신선세계에 오른 것 같다고도 하였으나, 이들이 현실로 돌아올 때의 사상적 지향 점은 역시 유가로 선회하고 었음을 볼수있다. 유학적 현실에 담갔던 몸을 빼어 지리산으로 향함에 그것에 대한 인식이 유불도 및 민간신앙에까지 미쳤지만 유가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다시 현실로 돌 아옴에 유가적 본연으로 회귀함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신선세계의 하나로 일컬어 지고 하고, 가장 많은 절을 안고 있으며, 그 꼭대기에 민간신앙의 대상이 자리잡고 았는 지리산을 읊은 사대부들의 한시들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한계 그것이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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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e poems of Wangsogun. had been written by many Korean, Chinese, and Japanese poets in ancient time. Today we can discover several different aspects from the their contents. On this parer, I would like to introduce the particular points of three nations' poems in which Wangsogun's life was divided in six terms. The first, I am interested in how poets of each nation described Wangsogun, before she left the court of Han(漢) in old time of China. In the poems, poets of three nations commonly told it very sadly at that time. However Japanese and Chinese poets did not say about it as sad as Korean do. It is very interesting thing that Korean poets sang the fact distinctly. Probably, in Korea the birth and growth of someone are accepted as an important thing than any other country. The second. Wangsogun had lived unhappily in the court of Han, because she didn't be recognized by Woenhe(元帝), the Emperor of Han. Among the poets of Japan and China, this problems were not accepted as a large issue except of Korea. The third, it was really miserable thing for the poets of three countries in ancient East Asia to describe the fact that Wangsogun departed for Hyungno(匈奴). Especially, In Japan, this subject of Wangsogun's poem, was accepted more serioulsy than the other countries. The fourth,it caused variety problems why Wangsogun had to be married to Hohansa(呼漢邪), the king of Hyungno. The poets of three nations generally explained that Wangsogun wanted to go there by herself, but that reason was different from each other country. The fifth, the life of which Wangsogun had lived in Hyungno, implicated lots of means in Chinese poems. In historical materials, it was treated very importantly whether Wangsogun was married to his son or not. But, in the poems, many poets of three countries criticized about incapability of Han dynasty. The sixth, at this part, I try to understand the reaction of poets who wrote the Cheongchong(靑家), Wangsongun's tomb. Many Korean, Chinese and Japanese poets sang the Wangsogun's conduct through description of Cheongchong. Especially Korean poets described the mood of Wangsogun's tomb less than Chinese poets. This aspect was caused from Korean poets had not have many opportunities to see the Cheongchong. On the above, Icompared three nations ancient poems which told the life of a woman who lived in the court of Han, and was married to Hohansa. We realize the fact that poets of three nations described the life of Wangsogun in various sides of hteir various versions. In many cases, Chinese poets sighed at the tragic fate of their own country, Korean expressed the sorrow of themselves through the Wangsogun's poems, and Japanese sang the grief of Wangsogun who had to go to Orangkae(胡)'s reg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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