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검색조건
좁혀보기
검색필터
결과 내 재검색

간행물

    분야

      발행연도

      -

        검색결과 344

        41.
        2022.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논문은 조선시대 오대산에 설치된 왕실원당을 중심으로 조선 왕실의 오 대산 신앙을 고찰한 연구이다. 조선시대 오대산에는 태종대부터 고종까지 총 9차례에 걸쳐 왕실의 원당과 원불이 조성되었다. 태종대 태상왕 이성계의 사자암 중수, 세종대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의 월정사 중창, 세조대 세조의 상원사 중창, 의숙공주의 원불 조성, 상의조씨의 영감암 중창, 선조대 영감사의 실록수호사찰 지정, 인조대 소현세 자를 위한 제석천상 중수, 고종대 국태민안을 발원하는 불상의 이운 등이 이어 졌다. 오대산에 설치된 왕실원당의 성격은 세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오대산에 대한 조선 왕실의 깊은 신앙심이 원당 설치의 기저에 깔려 있다는 점이다. 명산에 기도처를 세우고 국가의 안녕을 발원하던 오랜 전통은 불교의 유입 이후 보살상주 신앙으로 변화하였고, 이 전통을 이어받은 조선 왕실은 국가와 왕실의 안녕을 발원 하는 기도처를 오대산에 지속적으로 설치하였다. 둘째, 천재지변을 극복하기 위한 기도처가 계속 이어졌다는 점이다. 고대부터 국가에 천재지변이 발생하거나 왕실에 환란이 있을 때마다 산천단묘에서 제사를 지내던 전통은 불교의 유입 이후 대부분 사찰로 흡수되었다. 특히 오대산과 금강산, 태백산과 같은 명산들은 국가 주도의 소재법석이 벌어지는 대표적인 명소였다. 셋째, 요절하거나 병든 왕실구성원을 위로하기 위한 원당과 원불이 계속 조 성되었다는 점이다. 조선중기 이후 대부분의 왕실의례가 유교식으로 전환된 이후에도 조선 왕실에서는 왕실 차원의 추천불사를 계속 이어나갔다. 특히 젊 은 나이에 요절하거나 안타까운 사연으로 사망한 왕실구성원을 위한 원당은 조선말까지 계속 이어졌다. 오대산은 신라시대에는 문수보살의 상주처로, 고려시대에는 국가의 비보사 찰로 숭앙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대표적인 기도처로 유지되었다. 조선 왕실은 고대부터 이어진 오대산 신앙을 계승하여 왕조가 지속되는 내내 국가 와 왕실의 안녕을 발원하는 기도처를 운영하였다.
        8,000원
        45.
        2022.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study analyzed food poisoning articles in the Joseonwangjosillok to acquire historical evidence. The study method used case studies from the textual content of the Joseonwangjosillok. In all, there were fifteen cases of food poisoning in spring (60%), four cases in summer (16%), five cases in fall (20%), and 1 case during winter (4%). Most cases of food poisoning occurred during spring, followed by fall, then summer, and the least during winter. Foods that caused poisoning were as follows: twelve cases of seafood (48%), three cases of vegetables (12%), two cases of meat (8%), and eight cases of poisonous food (32%). Maximum cases pertained to seafood poisoning, which also spiked during spring. This could be attributed to the increased number of planktons as the sea temperature rose during spring. Due to the increased plankton, shellfish absorbed more toxins. The consumption of increasingly toxic shellfish resulted in more cases of food poisoning. The food poisoning frequency was the most severe during the 18th century, followed sequentially by the 15th, 16th, and 17th centuries, and was the least severe during the 19th century. Joseonwangjosillok showed that food poisoning cases happened most during social events where many guests or family members gathered to eat.
        4,000원
        46.
        2022.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thesis is a study to Haengnang(行廊, a series of buildings) of Sijeon(市廛, licensed markets), which was built along with palaces, Jongmyo(宗廟) and roads in order to establish Hanyang(漢陽) as the capital of Joseon (朝鮮). Sijeon, built on Jongno and Namdaemun-ro, the main roads in Hanyang, created two-row lands on both sides of the road, and formed Pimat-gil as an inner road between the Jeonbang and Doga. The formation of the city proceeded along with the maintenance of the water path, and the situation of the water path parallel to the flow of Sijeon was achieved. The Sijeon building was a spatial structure managed by independent rooms as a result of reflecting the unique operation method of Sijeon. The Sijeon of Hanyang had an impact on the formation of land, architecture, roads, and waterways, and acted as a major factor in determining the urban spatial structure of Hanyang City.
        4,900원
        47.
        2022.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study aims to investigate and reveal the spatial structure of Boryeonghyeon by examining the geographical status of its Eupchi (Local administrative center:邑治) through an analysis of the location, tracing locations of governemnt offices including Dongheon(東軒) and Kaeksa(客舍) in the walled town, and checking the lot numbers of Sajikdan(社稷壇), Yeodan(厲壇), and Cheongyeonyeok(靑淵驛) outside it. Buildings of Boryeonghyeon in the walled town in the Joseon Dynasty were almost lost and now, part of the city wall and Haesanru(海山樓) just remains as relic. The walled town consisted of several buildings of government offices as well as Dongheon and Kaeksa which are government organs. Altar and shrine(壇廟) facilities including Shrine of Confucius(文廟), Altar of Land and Grain, and Preceptor's Shrine were placed outside the walled town and Cheongyeonyeok were operated as the facilities for transmission of royal orders. Therefore, the government office facilities in the walled town, altar and shrine facilities outside the fortress, and the location of the post station were required to trace and check each of them. For the checking method, the lot numbers could be checked by checking the original cadastral maps and the then land categories and owners, analyzing the records and circumstances of the relevant township annals(邑誌), and examining analyses on the locations by using a numerical map of one to 5 thousands. The study estimated the locations of government facilities including Dongheon and Kaesa placed in the walled town and was grasped to be the east and west gates with the south gate which remains now in the fortress. And the lot numbers of Sajikdan, Yeodan, Cheongyeonyeok.
        4,300원
        48.
        2022.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article introduces the Korean “vulgar characters” recorded in the “Jaseo Jibyo” (《字書輯要》) written in the late Joseon Dynasty with the addition of Dong-vulgar corrupt characters (referred to as “Dong-su characters”), and to clarify its academic significance for the purpose. The article contains a total of 117 vulgar Chinese characters, which were probably written in the late 19th or early 20th century. It includes various common and special characters that were seen at that time, so that we can understand the use of common characters in the late Joseon Dynasty. For this reason, this article has made the “Popular Characters”, and compared with the square-printed edition “Shiwencuo” which preserved the alien society at that time, and obtained the universal use of the common characters. The “vulgar words” are divided into four categories: “①omit, ②add, ③replace, and ④symbolize”. Then, taking the characters (國guo), 伩(儒 ru), and (聖sheng) as seen in the “Dong-vulgar characters” as examples, the cultural awareness hidden behind the characters is analyzed in detail, in order to navigate the cultural research of variant characters. Attached is the “Popular Character Catalog” attached to the “Manuscript Addition and Deletion of Yeomlag Pung-a”(《增删濂洛風雅》) collected by the author for comparison and reference.
        9,000원
        49.
        2022.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논문은 조선시대 수장과 수장가에 대해 그동안 단편적으로 논의되었던 수장가의 개념과 수집행위로부터 파생된 여러 양상을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그 의미를 탐색하는데 중점을 둔 것이 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생각한 진정한 수장가란, 수집을 이용해 재력이나 인맥을 과시하는 사람 이 아닌 작품의 가치를 분별할 줄 아는 진정한 감식가이자 작품의 훼손을 방지하는 보존가로 해 석된다. 당시 수장가들은 작품의 보전을 위해 별도의 보관처인 장서루나 수장처를 마련하였고, 수장인을 찍거나 수장목록을 작성해 수장품의 소유를 증명하고 출납과 현황을 파악하였다. 이러 한 현존 수장목록은 개인의 취미를 보여주는 사례를 넘어서 한 시대의 지성사와 예술사의 흐름을 보여주는 또 다른 자료라는 점에서 미술사적 의의가 있다.
        7,700원
        51.
        2022.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연구는 유학의 큰 프레임에서 역동적인 자기 변환의 모습을 담고 있는 조선후기 실학을 분석함으로써 ‘지금, 여기’의 한국유학을 재고하려는 시도다. 조선후기 실학의 변증법적 전환은 ‘초월(超越)의 유학’에서 ‘지상(地上)의 유학’ 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이 연구에서 조선후기의 실학이 ①유학의 실제성 ②개방적ㆍ경험적ㆍ과학적 탐구 ③맥락 의존적 가치관 ④도 덕적 가치에 대한 ‘행위’의 우선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확 인할 수 있다. 이는 실학의 이론적 흐름이 성리학의 ‘초월적ㆍ관념적 탐구에 서 현실적ㆍ경험적 탐구로’ 전환되어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실 학이 한국유학사에서, 그리고 ‘지금, 여기’의 유학을 재고하는 데 빠뜨릴 수 없는 중요 담론인 까닭이다. ‘실학의 비조’로 평가되는 반계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은 정주(程朱)의 리(理)를 법ㆍ제도의 사회 원리로 재해석함으로써 현실의 차원에서 적용될 수 길을 제시했다. ‘실학의 중조’로 불리는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은 노ㆍ장,불교, 서학 등 여타 학문에 대한 적극적 개방과 함께 과학적 학문 방법을 도입, 실증적 합리성을 견지했다. 또한 그의 국가관에는 형세[勢]에 근거를 둔 ‘맥락 의존적’ 가치관이 함축되어 있다. ‘실학의 집대성자’인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도덕 ‘행위’의 우선성을 강조하고, 경험적 인식 방법을 제안함으 로써 과학적 탐구의 단초를 제공했다. ‘실학과 개화사상의 가교자’ 혜강 최한기 (崔漢綺, 1803~1879)는 태양중심설을 비롯하여 뉴턴의 물리학, 기계론적 신체관 등의 자연과학적 탐구를 자신의 기학(氣學)에 적극적으로 포함시켰다. 이렇듯 조선후기 실학은 선진유학의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정신을 시대의 변화에 맞게 새롭게 재조직함으로써 변증법적 전환을 이루었다. 비록 실학이 초월의 영역에서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추구했던 경험과학적 지식의 이론화는 다양한 관점을 비판적으로 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철학적 진화임에 분명하다. 이러한 탐구는 실학을 건너뛰고 ‘지금, 여기’의 유학으로 올 수 없음을, 그리고 왜 실학에 주목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6,600원
        58.
        2022.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1970년대 북한 조선화 형식론의 주요 특징으로는 기법과 수법의 상위개념으로서 ‘화법’ 개념의 정립, 색채의 주관적 인식(일반성)과 객관적 지각(개별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서 ‘제 색(본색)’ 개념의 부상, 예술적 형상화의 높이에 올라선 ‘예술적 필치’ 개념에 대한 강조 등 으로 요약할 수 있다. 1970년대 북한 조선화 형식론은 대립하는 것들의 중재, 또는 갈등의 봉합을 추구했다. 그들은 ‘화법’, ‘제색(본색)’, ‘예술적 필치’ 등을 내세워 선과 색, 본색과 반사색, 몰골법과 구륵법 등 대립으로 이끌어지기 쉬운 것들을 담론 체계 안에 효율적으로 통합하고자 했다. 그들은 이것이 조선화의 개조발전과 현대화의 길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 렇듯 조율과 중재, 봉합과 화해를 지향하는 개념들은 차이들, 곧 서로 다른 입장들이 경쟁하 면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담론장의 역동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1970년대에 구축된 조선화 형식체계는 이후 큰 변화 없이 유지되면서 조선화 창작과 수용에 절대적인 영 향력을 행사했다. ‘화법’, ‘제색’, ‘필치’ 등의 개념들은 모두 조선화를 제작하는 예술가들의 능동적 관여를 강조했지만 그 관여는 언제나 지배체제의 이념이 정해준 길을 따라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1970년대 조선화 형식론은 궁극적으로 형식 문제를 이념 문제에 종속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됐다고 말할 수 있다.
        5,800원
        60.
        2022.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글은 선조 17년(1584)과 18년(1585)에 개최된 기영연(耆英宴)을 그림으로 기록한 <선조조기영회도(宣祖朝耆英會圖)>를 중심으로 16세기 사연용(賜宴用) 화준(花樽)과 주 준(酒樽)의 조형 특징을 구명하고, 사연에 있어서 두 종류 준(樽)의 진설 방식과 및 진설 의 미를 고찰하였다. 연회에 등장하는 여러 기물 가운데 준화(樽花)를 꽂기 위한 화준(花樽)과 선온(宣醞)을 담았을 것으로 보이는 주준(酒樽)은 16세기 관요에서 제작된 좋은 품질의 백 자․청화백자로 추정된다. 사연용 화준은 조선 전기 국가 의례서(儀禮書) 및 조선 후기 궁 중연(宮中宴) 관련 기록에서 확인되는 호(壺)와 재질․기형․품질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장식에 있어서 문양을 생략하거나 청화(靑畵) 문양이 장식되었을 경우 소재 는 대나무․매화․화당초문 등 화훼문(花卉文) 계통을 채택함으로써, 사연의 설행(設行) 목적을 투영하는 동시에 궁중연 용준(龍樽)과 차별화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선조조기영회도> 에 묘사된 주준용 뚜껑은 입구의 가장자리가 위로 살짝 들려 있는 특징에 기인하여 연엽(蓮 葉)형 뚜껑으로 명명하였다. 연엽형 뚜껑은 국가 의례용기, 가마터 출토품, 전세품 등에서도 공통으로 확인되고 있는 만큼, 뚜껑의 사용처와 용도에는 왕실 및 사연용 주준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16세기 <선조조기영회도>의 화준․주준 진설 방식과 사연도(賜宴圖) 속 진설 방식 을 종합해보면, 16세기 화준은 다양하고 유연한 방식으로 진설 되지만, 주준의 경우 획일화 되고 고정된 진설 방식을 보인다. 화준․주준의 진설 방식은 연회의 주최자인 왕의 교체, 임 진왜란으로 인한 제작 여건 및 관련 기록 소실로 인한 고증의 어려움 등으로 인하여 17세기 이후 점차 변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16세기 사연용 화준․주준의 진설 방식은 18세기 이후 양상과는 상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불어 16세기 기영연에 화준․주준이 모두 진설 되 었다는 사실은 이 연회가 문헌에 기록된 바와 같이 우대된 사연임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근 거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6,900원
        1 2 3 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