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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
        2019.08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의 주요 목적은 T. S. 엘리엇의 비평에세이인「종교와 문학」을 면밀히 점검함으로써 문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한 그의 견해를 해명하는 것이다, 1935년에 발표된 중요한 이 에세이에서 엘리엇은 자신이 시대를 세속화가 전면적으로 이루어진 시대로 진단하며, 동 시대의 신학자인 폴 틸리히의 ‘궁극적 관심’과 주목할 정도로 의미적인 유사성을 지닌 것으로 엘리엇이 ‘근원적 관심’이라고 불렀던 것은 이 시대에는 거의 완전히 잊어져버렸다. 엘리엇은 세속화의 주요 원인으로 오락의 명에 따라 고급문화를 탈구를 이끌고 있는 대중문화의 파과적인 힘을 지적하고 있다. ‘근원적 관심’의 회복을 추구하는 엘리엇은 문학 작품의 윤리적 종교적인 가치를 명확히 하는 것뿐만 아니라 대중문화와 오락에 탐닉하는 일반 사람들에게 ‘근원적 관심’을 파종시키는데 있어서 문학 비평이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102.
        201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Purpose -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lucidate the limelight question ‘why India should open arms for Islamic banking?’. Research design, data, and methodology - The paper is theoretical and conceptual in nature and provides results based on significant literature review. Results - This paper will start with the discussion why Islamic name does not make it only for Muslims?, then its features and how it can improve India’s current economic situation. Also this study will analyze the ability of Islamic finance to act as Micro-finance tool by including people who does not participate in economic activities. This paper also concludes that why religious issue should be sidelined in order to accept Islamic finance for empowerment of Muslim and non-Muslim minorities which live in abject poor conditions. Conclusions - Islamic finance has lot of merits which cannot be ignored by only looking at the name and believing that it is only for Muslims. Indian economic system needs a financial system which will work for welfare and not for profit to help poor communities in coming out of poverty. Interest free loans and micro-finance tools are the only way to help below poverty line population to raise their income level.
        103.
        2017.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그리스도교와 헬레니즘의 관계란 관점에서 유대교의 한 종파 인 예수 운동이 이방인 선교를 통해 세계 종교로 발전하는 제1차 유다이아 전쟁까지의 원시 그리스도교의 발전 과정을 역사적으로 규명하였다. 이를 위해 우선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관계를 팔레스티나와 디아스포라를 나누 어 간략하게 고찰하였고(II), 그 다음에는 언어, 유대계 그리스도교와 이방 계 그리스도교의 구분, 유대교 율법과 이방인 선교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III). 결론적으로 이 연구는 첫째, 예수와 그 제자들은 아람어를 사용하고 헬 레니즘을 수용하는데 소극적이었지만, 헬레니즘 유대계 그리스도인(“헬라 파”)들은 예수 전승을 그리스어로 번역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그리스 세 계에 맞게 변용시키고 사마리아인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 교가 그리스 문화를 매개로 지중해 세계 전역으로 전파되는데 핵심적인 역 할을 수행했으며, 둘째,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율법에서 자유로운 이방 인 선교를 주도하고 처음에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율법이 필요하지 않다고 보았지만, 후기에는 온 이스라엘의 구원을 확신하고 다른 형제자매를 위해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강조하여 율법 이해에서 변화를 보여주었고, 셋째,바울은 주체와 인격의 구별, 개인의 결단과 보편적인 사회의 전망을 강조 했다는 점에서 헬레니즘 정신에 부합되는 새로운 종교를 제시했으며, 마지 막으로 가정 교회가 이러한 새로운 현실을 실현하고 경험하는 모판이 되었 다는 것을 밝혔다. 예수 운동이 이방인 선교를 통해 세계 종교로 발전하는 과정을 추적함 으로써, 본고는 그리스도교와 헬레니즘의 관계를 규명하며, 유대교와 그리 스 문화 사이에서 원시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이 해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앞으로 역사적 차원뿐만 아니라 신학적 차원에서 이 주제를 다룬 연구가 진척되기를 촉구했다.
        104.
        2017.08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은 부르디외의 사회자본 이론과 그라노베터의 연결망 이론을 통해 종교가 어떻게 미군정기의 행정 관료 채용에, 또한 이를 통해 이후 한국 사회의 방향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았다. 1) 부르디외에게 종교는 상징자본으로서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때로는 사회자본으로서의 기능을 감당할 수 있음을, 2) 종교적 배경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할 수 없었 던 그라노베터의 연구와는 달리, 종교가 미군정기 노동시장에서 중요한 접 촉 연결망으로 작용하고, 나아가 ‘확장된 내부노동시장’의 장치를 통해 지 속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본 연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이러한 과정을 네트워크에서 1차 결절점(node)으로서 기능한 3명의 선교사 2세(윌 리암스, 언더우드, 윔스)와 2차 결절점으로서 기능한 1차 등용 관료(조병옥, 정일형, 이묘묵)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105.
        2016.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 S. 엘리엇은 20세기 시인 중에서도 여타의 시인과 확연하게 구별 되는 사상적 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시인이었다. 엘리엇의 시학과 사상 에 대해서 행해진 기존의 연구는 철학적, 문화적, 종교적, 인류학적, 그 리고 심리학적 관점에서 접근한 것들이 상당하다. 엘리엇은 당시의 심 리학, 철학, 인류학, 그리고 신비주의와 같은 종교적 사상의 방대한 학 문적 배경을 토대로 “자신의 종교적인 신념과 문학적 지표”를 형성하게 된다. 특히 엘리엇과 활동연대가 상당부분 중첩되는 지그문트 프로이트 (Sigmund Freud)와의 연관성은, 이 두 사람의 시기적 문화적 중첩성을 고려해 볼 때, 직간접적인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0세기 초부 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사회, 문화, 예술 다방면에 걸쳐서 영향력이 줄어 들지 않고 있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엘리엇의 사상 및 그의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엘리엇이 문화와, 문명, 그리고 종교에 대해서 매우 깊고 진지 한 성찰을 행했던 것처럼, 프로이트 역시 다양한 저술을 통해 인류의 역사와 문명, 종교와 문화에 대한 많은 저작을 남겼다. 이런 점에서 본 논문은 엘리엇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인류의 문화, 문명, 종교라고 하는 아주 근원적인 요소에 대해서 각기 어떤 변별적 차이점을 지향하 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06.
        2016.04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대한민국 헌법 제20조는 “①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②국교 는 인정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한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그래 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하지만 한국에 서 정치와 종교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며 심지어 모호하다. 기본적으로, 그 런 조항은 미국헌법의 절대적 영향 하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1945년 이후 전개된 한국근대사의 혼돈 속에서, 그런 헌법조항에 근거한 정치와 종교의 관계는 지속적으로 불안정하고 문제가 많았다. 특히, 한국의 보수적 복음 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유동적인 정치적·종교적 환경에 따라 이 문제를 전략 적으로 다루어왔다. 이 논문은 1945년부터 2013년까지 보수적 복음주의자 들이 정교분리의 의미를 이해하고 재구성하며 그것에 적응해 온 복잡한 역 사를 추적하는데 목적을 둔다. 1945년부터 1960년까지, 한국교회는 정교분리에 대한 헌법의 규정과 상 관없이 기독교에 특혜를 베풀어준 정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예를 들어, 그 기간 동안 미군정은 미국선교사들의 조언에 따라서 한국개신교인 들이 다양한 정치영역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했다. 종교정책 면에서, 미군정은 다른 종교들을 배제한 채, 한국교회에게 많은 특혜를 베풀었다. 그런 특혜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으로, 한국교회는 정부정책에 열정적으로 협조했다. 특히, 제1공화국에서 대통령선거 기간 동안, 한국교회는 감리교 장로이자 한국개신교에 대단히 우호적이었던 이승만을 거의 맹목 적으로 지지했다. 그 기간 동안, 한국교회는 정교분리의 의미를 정확히 이 해하지 못했다. 1961년부터 1986년까지, 한국은 군사독재기간을 통과했다. 그 동안, 한 국교회는 두 부분으로 분리되었다. 즉, 군사정부를 신실하게 지지했던 보 수주의자들과 그 정부에 저항했던 진보주의자들로 말이다. 그 결과, 독재 자들은 두 진영을 정부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 따라 다르게 취급했다. 예를 들어, 군사정부는 보수교회들이 ‘액스플로 74’ 같은 일련의 대규모 집회들을 개최하고 ‘전군신자화운동’ 같은 전도활동을 전개할 수 있도록 후원함으로써, 이들이 빠르게 성장하는데 결정적 도움을 주었다. 이런 종교적 특 혜에 대한 반응으로,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진보진영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그 정권의 충실한 동맹자가 되었다. 하지만, 진보주의자들의 경우, 군사정 권에 저항한 것에 대해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1997년부터 2007년까지, 한국교회는 처음으로 정부와 부정적 관계를 맺게 되었다. 진보적 정부가 남북간의 적대적 관계를 개선하기 시작하고, 사립학교법 개정을 통해 기독교사립학교들의 부정을 개선하려고 노력하자, 한국교회는 반정부세력으로 돌변했다. 그들은 진보적 정부를 종북좌파세력 으로 규정하고 이 정부의 거의 모든 정책에 반대했다. 이 기간 동안, 교회 들은 정교분리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을 수정했다. 그들은 이전에 종교가 정치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제는 종교가 자신의 정치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정치적 저항이 헌법 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믿으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음 정부를 위한 새로운 대통령 후보로 보다 보수적이고 친기독교적인 후보를 선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최근에는 보수적 기독교인들이 이런 주제와 관련해서 정부와 이중적 태 도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여전히 친기독교적인 이명박 정부의 강력하고 신실한 후원자들이었다. 같은 정치적·경제적 신념 에 기초해서, 그들은 이 정부를 지속적으로 지지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적극적 정치참여가 정교분리라는 헌법조항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 했다. 그러나 때때로 그들은 동일한 정부가 타종교들, 특히 불교와 이슬람 에 대해 우호적 조치를 취하자 강력하게 저항하고 비판했다. 그들은 정부 의 그런 태도가 기독교를 배제한 채 다른 종교들에게 특혜를 베풀어 정교 분리의 원칙을 위반했다며 불법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은 정부와 자신들의 관계에 따라 “정교분리”란 개념을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해왔다. 그들과 정부의 관계가 우호적이었을 때, 그들은 “정교분리”를 “종교가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것” 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그들과 정부의 관계가 불편했을 때, 그들은 그런 이 해를 뒤집고 강력한 반정부세력이 되었다. 한편, 그들이 정부로부터 우호 적 지원을 받았을 때, 그들은 그런 특혜가 정교분리의 헌법적 조항을 위반 한 것이라고 해석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정부에 의해 차별을 받는다 고 느꼈을 때는 정부가 헌법을 위반한다고 주장하며 반정부적 투쟁에 나섰 다. 이토록, 한국에서 보수적 복음주의자들과 정교분리의 관계는 복잡했다.
        107.
        201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9세기에 중국에서 활동한 개신교 선교사들은 가톨릭교회의 선교에 비 해서 그들의 선교가 여러 측면에서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음을 인식하 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교현장에서 의도적으로 개신교회가 ‘성서의 종교’ 임을 강조하고, 성서를 번역하는 일에 최우선 순위를 두었으며 성서를 보 급하는 일에 노력하였는데 이는 개신교 선교부의 가톨릭교회와의 차별화 전략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가톨릭교회가 초기에는 ‘선교보호권’(宣敎保 護權)을 중심으로, 1622년부터는 포교성성(布敎聖省)을 중심으로 하여 국 가 및 교황청을 중심으로 하여 아시아 및 중국선교를 수행하였던 것과는 달리 개신교 선교사들은 대체적으로 자발적 선교회 등을 중심으로 하여 국 가 또는 강력한 교회중심체제로부터 벗어나 선교를 수행하였다. 일부의 현 상이나마, 가톨릭교회가 기독교를 선점한 중국에서 그리고 당시 직접적 복 음전도의 자유가 없던 중국에서 개신교 선교사들의 최선의 전략은 성서원 문으로부터의 성서번역과 보급이었으며 이는 종교개혁의 후예로서 자신들 의 정체성과도 일치하는 일이었다. 로버트 모리슨의 번역본을 시작으로 첫 100여년동안 8개의 다른 중국어번역본을 출판한 개신교의 열정이 그들의 성서에 대한 관심을 증거한다. 그러나, 대립되는 성서판본을 출판할 수밖에 없었던 개신교회의 불일치성은 오늘날 진지한 성찰을 요구하기도 한다.
        108.
        201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조선 말기에서 일제 초기는 국내외적으로 혼란과 격변의 시기였다. 서양의 종교가 국내로 유입되어 날로 확장되는 반면 유교는 나날이 위축되어 가고, 조선은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을 상실하는 암울한 시기다. 이 시기 조선의 유교 지식인들은 위기감과 함께 유교를 부흥시켜 국권회복의 돌파구로 삼고자 하는 孔敎運動을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일제시기 경남지역에서 공교운동을 가장 활발하게 전개한 곳은 진주 硯山의 道統祠와 산청 丹城의 培山書堂이다. 도통사 孔敎支會 설립은 惠山 李祥奎(1846-1922)가, 배산서당 朝鮮孔敎會 설립은 眞庵 李炳憲(1870-1940)이 각각 주도하였다. 그러나 주자학 일변도의 성리학 이념과 체제에 젖어 있던 당시 유림계에서는 도통사와 배산서당의 성현 숭상 방식이나 공교운동 추진 방식, 주자학을 비판하고 금문경학을 수용하는 데 대해 큰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도산서원에서는 도통사와 배산서당의 성현 봉향 방법상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지지를 철회하고, 또 경남지역 서원과 향교에도 배산서당 공교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섬으로써 당초 혜산과 진암이 추구하고자 했던 유교부흥운동이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비록 경남지역에서 공교운동은 실패하였지만, 일제시기 경남지역의 공교운동은 경남지역의 학문적 역량과 문화적 자신감을 전국 및 동아시아에 충분히 과시한 활동이었다. 혜산과 진암이 그 선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일제시기 경남지역 공교운동을 유교부흥을 통한 독립운동의 한 방법으로 인정하고, 그 역사적 의의를 더욱 심도 있게 지속적으로 재조명 하여야 할 것이다.
        109.
        2015.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전지전능한 절대적 존재에 대한 믿음은 T. S. 엘리엇의 인생을 통하 여 드러나는 것이다. 악의 존재와 인간의 근본적인 불완전함에 대하여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었던 엘리엇은 자신이 유니테리언 교리가 상징하 는, 진보의 이상에 바탕을 둔 낙관주의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러한 낙관 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엘리엇은 종교와 문학을 통합시킬 수 있는 길을 찾으려 하였다. 문학에서 종교가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그의 생각은 「종교와 문학」이라는 에세이의 서두에서 잘 드러난 다. 엘리엇은 이 에세이에서 문학 비평은 윤리적, 종교적 관점을 통해 보완되어야 하며, 윤리적인 관점과 종교적인 관점이 조화를 이룰수록 문학이 더 풍부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엘리엇은 문학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그 가치를 바르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외부에 있 는 절대적인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종교가 문학에 대한 도덕적 또는 윤리적 판단에 대한 기준을 제공할 수 있다고 본다.
        110.
        2014.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9세기 중국개신교의 중국종교에 대한 이해는 사실 그 제국주의적인 선교관점에서 시작되었다. 서방선교사들은 중국종교를 이교문화로 규정하고 중국인을 개화시켜야할 선교적 대상으로 바라다보았다. 그러나 중국문화의 강렬한 반기독교적 정서를 체감하면서 선교사들은 본질적인 면에서 다시금 중국종교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런 이해는 중국인의 종교정서 등을 발견하게 했고 보다 복음이 중국문화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와 더불어 중국신도는 자신의 고유한 토대문화 위에서 기독교를 수용하려고 노력하면서 좀더 적극적인 중국종교에 대한 이해를 개진시켜 나갔다. 우리는 19세기 중국개신교의 노력을 통해 오늘날 단편적인 자신의 이해를 넘어 복음전도를 위해 폭넓은 자신의 이해의 지평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111.
        2012.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ntroduce and evaluate Rodney Stark’s Theories of Rational Choice in Religion. To this end, chapter I identifies some foundational issues related to the historiography of the writing of church history after Ranke, including the work of Max Weber, Ernst Troeltsch, and H. Richard Niebuhr. Chapter II describes the formation of the sociology of religion and surveys Stark’s attempt to combine sociology and church history. Stark emphasizes a sociological approach to church history over traditional approaches involving psychology or doctrinal interpretation. His approach uses sociological elements such as demography, in addition to social, political, and cultural interpretative models. Chapter III delineates Stark’s position with regard to Theories of Rational Choice in Religion. He first defines these theories by arguing that they suggest “people are as rational in making religious choices as in making secular decisions.” He further qualifies this, claiming that “within the limits of their information and understandings, restricted by available options, guided by their preferences and tastes, humans attempt to make rational choice.” In short, people usually attempt to pursue what they perceive to be the best option for achieving their goals in religion. The major content of such Rational Choice theories is that subjects adopt a cost-benefit assessment before adopting a new religious product such as a church or a denomination. These theories do not apply in the case of state churches but to free churches in the context of a religious economy. He defines this economy as “consist[ing] of all the religious activity going on in a society; a ‘market’ of current and potential adherents, a set of one or more organizations seeking to attract or maintain adherents, and the religious culture offered by the organization(s).” Thus, Stark proposes that religion is necessarily pluralistic in such a religious market. Chapter VI of the present study concludes with an emphasis on the a critical evaluation of Stark’s theory and the possibility of applying these doctrines to Korean churches. This paper also emphasizes the urgent necessity of dealing with new sects or churches in Korea.
        112.
        2009.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is paper is designed for examining the Christian religion and the Christian social thought of the early Rhee Syngman (1875-1920). Rhee Syngman is a leading figure on modern history in Korea. He is an activist for national independence; a fighter, a statesman, an educator, a diplomat, etc. In particular, as the first President (1948-1960) in the Republic of Korea (ROK), he made great contributions to the founding as well as to the developing of ROK. To our surprise, such activities were on the basis of the Christian religion of Rhee Syngman. Having converted to Christianity in a jail, he lived in a Christian for about seventy years. After his conversion, Rhee Syngman was sure that Christianity is the only way for a national salvation. This standpoint appears to his Christian social thought; a national salvation idea by Christianity, a western civilization theory, the conception of the people’s rights and the equality, a practical theology thought of participating realistic affairs. These thought were mostly formed about the same time of his prison life and had an influence on his life and multifarious activities after that time. Being considered his position as the pivotal leader and Governor of a nation, therefore, it is certain that his Christian ideas filtered into the various fields of social in Korea. For that reason, this paper is focused to above theme.
        113.
        2003.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 S. Eliot owed the Unitarian belief of his family for his early interest in the Orient. He was introduced to Indian religion and philosophy by George Santayana and Irving Babbitt in his undergraduate years at Harvard, which led to his serious studies of lndian religion and philosophy in his graduate years under Char1es Rockwell Lanman and James Woods. My concern here, however, is why be could not accept lndian religion and philosophy. lt is apparent that Eliot's interest in Indian religion and philosophy remained much later after completion of his graduate studies. N aturally enough, Indian religious and philosophical speculations are echoed in his various poems, particularly in The Waste Land and Four Quartets. While he worked as editor of The Criterion from 1922 to 1936, he allowed space for the forum of debate on the culture of the East and the West. By this time his early view of Indian religion and philosophy had been very much discolored, reveaIing that his position was quite similar to Henri Massis’s negative attitude towards the Oriental philosophy, which is representative of the c1assicist’s view of Action Française based on the concept of sin. Because of "a Catholic cast of mind, a Catholic heritage, and a Puritan temperament," Eliot’s interest in Indian religion and philosophy, which does not allow the concept of Original Sin, could not be permanent. The three points, among others, count for the reasons for his having not fully involved in Indian religion and philosophy. One is that he left his studies of Indian religion and philosophy half done and completed his doctoral dissertation on the Westem mystical philosophy of F. H. Bradley. Another is that he became an Anglo-Catholic in 1927, whose belief is based on the concept of Original Sin. The third is that he chose to become a man of letter rather than a philosopher by profession and declared on several occasions that he could not become a Buddhist. Eliot’s belief in Original Sin prevented him from being fully involved in Indian religion and philosophy for the emotional or practical reasons. He was simply responsive to it intellectually. His East was always next to the West and was partly appropriated to support his own poetic ideas, which shows a phase of the general Westem prejudice against the East.
        114.
        2002.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하버드대학교의 로만스 언어학과 교수였던 어빙 배빗(Irving Babbitt)은 1924년에 􋺷민주주의와 지도력􋺸이란 저서를 출간하였다. 이 저서는 배빗이 오랫동안 주창해왔던 휴머니즘에 관한 사상을 이론적으로 정립한 것인데 출간 즉시 배빗의 대표작으로 주목을 받았다. 특히 당시 영미문단에서 비평사상을 주도하기 위해 출발한 􋺷크라이테리언􋺸이란 계간지는 배빗의 제자였던 T. S. 엘리엇이 런던에서 편집을 하고 있었는데, 배빗의 휴머니즘 사상을 쟁점화하여 점검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본 논문은 배빗의 􋺷민주주의와 지도력􋺸이 출간된 이후 10여 년에 걸쳐 지속된 그의 주된 사상인 휴머니즘에 관한 논쟁에서 배빗이 주창한 핵심사상이 무엇이며, 􋺷크라이테리언􋺸지를 통하여 이 논쟁에 참여한 기고자들이 배빗의 휴머니즘에 대하여 어떤 입장을 취하였는지를 추적한 것이다. 특히 본 논문은 배빗의 휴머니즘에 대하여, 그의 제자였던 엘리엇이 어떤 견해와 입장을 취하였지를 고찰하여 엘리엇의 휴머니즘에 대한 사상의 일면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두었다. 부연하면, 엘리엇이 그의 사상을 형성해 가는 초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배빗의 사상은 엘리엇이 영국의 철학자 F. H. 브래들리와 특히 T. E. 흄의 사상을 전폭적으로 공감하여 수용하고, 자신의 인생에 결정적인 전환의 계기가 된 영국 국교로의 개종과 뒤이어 영국 신민으로 귀화함으로써 배빗의 휴머니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따라서 엘리엇의 배빗에 대한 비판은 그의 종교적․신학적 입장에서 배빗의 불가지론적 입장에 기초한 휴머니즘과 상이함을 드러낸다. 그렇다고 엘리엇이 근본적으로 휴머니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배빗이 주장했던 것처럼 윤리적 가치에 기초한 휴머니즘을 높이 평가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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