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검색조건
좁혀보기
검색필터
결과 내 재검색

간행물

    분야

      발행연도

      -

        검색결과 2

        1.
        2017.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에서는 介庵 姜翼(1523-1567)의 학문 특징을 살펴보고 그의 학문 지향이 문학작품에서 어떻게 표출되고 있는가를 중점적으로 서술 하였다. 강익은 당대 함양 지역의 대표적인 유학자로 평생을 수양으로 일관하였고, 남계서원 건립을 주도하는 등 유학의 사회적 보급에도 힘 을 기울인 인물이다. 이러한 강익의 학문 특징은 그가 남긴 記文에 집약 되어 있다. 강익은 이른 나이에 과거를 포기하고 爲己之學으로 방향을 선회하여 학문에 정진하였는데, 이는 스승 唐谷 鄭希輔(1486-1547)나 南冥 曺 植(1501-1572)의 영향 외에도 자신의 과단한 실천 성향이 그 기저에 자리했다. 과단한 실천 성향이 위기지학을 확고히 실천하도록 만든 요 인이며, 성현의 본지를 ‘自得’하는 학문 방법을 통해 더욱 정교한 실천 을 도모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조식은 강익에 대해 ‘끝을 잘 맺을 것이 분명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하였다. 강익에게서는 문학에 대한 뚜렷한 관점이 감지되지 않는데, 이는 문 학에 대한 고민보다 심신수양에 역점을 두었던 그의 학문 지향에서 기인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그의 학문 지향이 집약된 작품이 「양 진재기」이다. 강익은 「양진재기」에서 양진재를 건립하게 된 경위와 택지의 이유 및 의도 등을 설명하였다. 이 작품에서 강익은 성정의 참됨[性情之眞] 을 기르고자 외부와 격리된 곳에 택지를 하고, 주변의 자연물과 자신의 공부방이 교감할 수 있도록 안배하였으며, 수양을 돕는 물건들도 주위 에 배치하였다. 즉 「양진재기」는 강익의 자기 수양을 위해 자연물·인공 물을 가려서 배치하고 연출한 의도와 그 속에서 성정의 참됨 기르고자 했던 학문적 지향이 담긴 글이다. ‘양진재’가 본인의 학문 정진을 위해 사적 공간을 의도대로 조직한 건물이라면, ‘남계서원’은 학문의 표본을 제시함으로써 지역사회에 유 학을 널리 장려하고자 설립한 건물인데, 이러한 강익의 학문적 지향이 표출된 글이 「남계서원기」이다. 「남계서원기」에서는 一蠹 鄭汝昌을 제 향해야 하는 도학적 당위와 서원의 교육·교화적 기능을 주로 설명하였 다. 인간만이 도를 사회에 실천할 수 있는데 이는 도를 지닌 사람만이 가능하므로 정여창과 같은 선현을 서원에 제향하여 추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선현을 서원에 모시고 제사지내는 의식이 학생들을 고무 시키는 측면이 있으며, 이를 통해 정여창의 도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난다면 유학이 부흥할 거라는 것이다. 강익은 두 편의 記文을 통해 내면으로 학문을 실천하려는 의지와 대외적으로 학문을 장려하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16세기 초반부터 조식·이황과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여 유학자로서의 표상을 정립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일관되게 유학적 가치를 실천하고 보급한 강익과 같은 인물이 등장하여 사림의 자기 정체성이 더욱 뚜렷해졌던 것이다.
        2.
        201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남계서원을 비롯한 대부분의 서원은 지역의 고등 교육기관, 출판사 및 도서관이라는 직접적으로 교육과 관련된 역할 외에, 수많은 부작용 을 불러일으킨 향촌 유림의 지역운영 혹은 지배 기관으로 작용하였고, 중앙 정계와 연결고리를 형성하며 학파와 정파 활동의 지역 거점 역할까 지 수행하였다. 특히 학파와 정파 활동의 지역 거점 역할이라는 측면에 서 남계서원의 경우, 건립과정이나 건립초기에는 남명학파나 북인정권 의 영향아래에 있었지만, 인조반정이후에는 남인계 서원으로, 戊申亂과 갑술환국이후에는 다시 노론계 서원으로 그 성격이 변화했다. 이러한 사실에서 보자면 남계서원이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변화시켜갔는지, 그리고 왜 남계서원이 그렇게 변화해 갈 수밖에 없었는지는 남계서원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주요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점에서 이 글은 남계서원의 성격변화와 그 과정을 살펴보고, 남계 서원에 주향되고 있는 정여창의 위상은 그와 같은 서원의 변화 속에서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논의는 먼저 서원을 세운 인물들을 중심으로 창건 당시 남계서원의 성격을 살펴본 후, 이것을 이어 후대로 내려가면서 남인계 서원과 노론계 서원으로 그 성격이 변해가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고, 마지막 결론에서 김굉필과의 비교에서 정여창의 위상을 살펴보고 있다. 김굉필의 경우 그의 진외증손인 정구에 의해 천곡서원과 도동서원 등에서 정이와 주희를 직계승한 인물로 추존되는 모습과 함께, 고향인 현풍과 성주ᆞ고령 등의 낙동강 중류 지역에서 상당한 위상을 가질 수 있었다. 반면에 정여창은 남명학파의 몰락 이후, 뚜렷한 계승자의 부재와 함께 정파와 학파적 기반마저 상실함으로써 더 이상의 위상제 고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남명학파의 몰락은 남명학의 전승뿐만 아니 라, 남계서원의 성격변화와 정여창의 위상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