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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2017.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조선후기 실학자의 일본인식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선행연구가 있지 만 조선통신사의 일본 왕래가 저조해진 19세기에 활약한 실학자에 대한 그것은 비교적 양이 적은 것으로 보인다. 본고에서는 그 중에서 최한기 (崔漢綺)와 이규경 (李圭景)의 일본인식에 초점을 맞춰서 살펴보았다. 최한기의 일본관은 세계 각국의 지리, 제도, 산물, 역사, 종교, 풍토, 문화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지구전요 (地毬典要)󰡕에 집중적으로 나 타나 있다. 그 저본은 세계지리서인 『해국도지 (海國圖志)』와 『영환지략 (瀛環志略)』이지만 두 책의 일본 기술이 미비한 부분을 신유한 (申維翰) 의 『해유록 (海游錄)󰡕에 의거해서 보충했기 때문에 그의 일본에 관한 지 식・이해는 신유한에 의거하고 있다. 최한기는 일본의 세습제도에 대해 “어찌 인간의 재능에 한계가 있겠 는가? 실로 정교 (政敎)의 구속에 의한 것이다”라고 비판하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냉정하고 공평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의 일본 정보・지식은 상대적으로 한정되어 있었으나 ‘기학 (氣學)’이라는 새로운 사상체계를 구축함으로써 전통적 유교의 화의사상이나 역사적인 적개심, 멸시관도 극복할 수 있었다. 한편 이규경은 규장각검서관 (奎章閣檢書官)이자 『청령국지 (蜻蛉國 志)󰡕라는 일본에 관한 저술도 있는 실학자 이덕무 (李德懋)가 할아버지 였으므로 일본에 대해서는 최한기보다 풍부한 문헌과 지식・정보와 접 할 수 있었다. 그는 실제로 그것을 활용해서 일본의 신화, 역사부터 생활 문화와 속신 (俗信)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지식을 그의 저서 󰡔오주연문 장전산고 (五洲衍文長箋散稿)󰡕 속에서 기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규경은 일본인을 가리켜 ‘도이 (島夷)’, ‘왜이 (倭夷)’, ‘흑치 녹정 (黑齒綠頂)’ 등의 멸칭을 거리낌 없이 쓰고 그 방대한 지식을 가지 고도 일본이나 일본인에의 멸시관, 차별의식을 고치고 극복하기에 이르 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나 사고전서 (四庫全書)에도 수록된 일본의 유학 자 야먀노이 테이 (山井鼎)의 『칠경맹자고문 (七經孟子考文)』의 고증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듯이 이규경은 그러한 차별의식을 옆에 두고 일본의 문물이나 학술의 좋은 것을 평가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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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2017.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While going into troops for writing in the vignette style(小品文) in opposition to the Classical Chinese(古文), Yi Ok stopped by Songgwangsa Temple in Wanju. The things he felt during this stop were recorded in the Temple Chapter ( 寺觀) written in 1795. Therefore, the present dissertation evaluates the Songgwangsa Temple of the time based on this Temple Chapter . Data in the Temple Chapter draws attention to the fact that it records the layout of the temple in detail. Thus the study was able to confirm the change in layout by reviewing relevant records about repair. This reveals that the form of layout in general has been maintained although there were changes involving the relocation of the buildings and their names. Furthermore, the original Buddhist building was changed to a quarter for the monks. Also, in terms of layout after the 18th century, there are frequent name changes of the Myeongbujeon(冥府殿) and Nahanjeon(羅漢殿). After two repairs, in order to find the appearance of a Daeungjeon(Main Buddhist hall) with a two-storied structure of five bays at the front, the study evaluated the Geugnakjeon at Muryangsa Temple and the Daeungbojeon at Magoksa Temple. The evaluation revealed that the ‘Jeol’ used in the Temple Chapter were small pillars erected on a ridgepole just like the Geugnakjeon at Muryangsa Temple, and that the angle rafters were installed to corner bays in rectangular form. The intellectual Yi Ok left behind invaluable architectural data that reveals the Songgwangsa Temple of the 18th century.
        4,000원
        24.
        2016.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Generally speaking, classifiers xie(些) and dian(点) only involve the unspecified quantities of objects, and can not be used to describe the objects’ features and properties. However, when used in reality, xie(些) and dian(点) can co-occur with other classifiers by forming the construction like “(yi) xie(些)/dian(点)+X+N”. Since there is a tendency to make the expression alive, vivid and concrete, this new type of construction can be regarded as the result of this tendency. Along with the wide use of this construction, the relation between “(yi) xie(些)/dian(点)” and “X” becomes more and more tight, and starts to fossilized. Especially the classifier “ge (个)”, it can appears relatively free in this structure, and the function of “ge(个)” is to make the structure of “(yi) xie(些)/dian(点)+N” discrete. Besides, in some circumstance, “ge(个)” in the structure of “(yi) xie(些)/dian(点)+ge(个)+N”is mandatory in the usage; sentence would be ungrammatical without “ge(个)”. Moreover, this paper will discuss the effect of this new construction on “N”and the whole sentence. And also will point out the similarities and differences between “(yi) xie(些)+X+N” and “(yi) dian(点)+X+N”.
        4,000원
        25.
        2016.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의 목적은 서양고지도와 황조일통여지전도를 통해 조선의 북방영토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서양고지도에 표시된 조청경계의 유형을 분석하고, 타당성을 검증하였다. 18세기에 제작된 서양고지도의 경우는 간도와 같이 확실한 정치적 통제가 되지 않았던 지역의 경계 표시는 불명확하다. 따라서 영유권 주장의 근거로 사용하기에는 상당한 취약점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황조일통여 지전도는 1885년의 감계회담에서는 청나라에 의해 토문강과 두만강이 동일한 강이라는 근거자료로 사용되었지만, 1887년 회담에서는 이중하에 의해 두만강 발원지가 홍토수라는 사실을 주장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현재는 홍토수가 북한과 중국과의 경계선으로 설정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결과적으로 고지도를 북방영토의 영유권 주장의 근거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철저한 검토가 필요함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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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2014.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고는 창암의 서론(書論)과 서적(書跡)의 내용을 중심으로 ‘창암체’ 형성 기반으로서의내면적 사유(思惟)와 용필법(用筆法)의 특징을분석 하고 ‘창암체’에 투영된 양상을 논의하였다. 창암은 당대서풍의 문제점을 개혁하고 옛 법을 회복하여 서예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기 위하여 서론(書論)을 저술하였다. 書를 書道로 천명한 창암은 자연의 경지에 계합하는 서를 이루기 위해 음 양(陰陽)의 상반응합(相反應合)의 조형원리를 도입하고 귀어자연 (歸於自然)의 목표를 설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극공(極功)의 연마를 강조하면서 내면적 사유와 실제 글씨와의 일체경계를 지향하였다. 즉 서가의 도정(道程)으로 유법(有法)의 연마에 극공을 기울여 마침 내 무법(無法)의 자연에 계합할 것을 제시하였다. 그가 용필법을 중 시한 이유는 필법의 오묘함을 터득했을 때에야 만물의 형태가 기묘 한 書로 드러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본고에서 논의한 것처럼 창암의 사유(思惟)와 필법적 특징은 ‘창암체 (蒼巖體)’에그대로투영되었다. 창암은내면적 사유와실질적필법이란 두 측면을잘 융합시킨것이다. ‘창암체’는 순수(純粹), 소박(素朴), 졸박 (拙朴), 생동(生動)의 풍격을 띠고 있으며, 자연만물처럼 소박하고 단순 하면서도 무궁한 것을 함유하고 있어 일명 ‘행운유수체(行雲流水體)’라 는별칭을얻기도하였다. 창암이서예를자연물과동일한층차(層次)의 존재물로보고자연을담아냄으로써‘창암체’는자연만물과같은객관성 과 실재성을 지니게 된 것이다. 서예사적관점에서볼때창암의친자연주의적서예관은동국진체(東 國眞體) 서가들의 천인합일적 서예관념을 계승한 한편으로, 자연이 書 의전형이자귀착점이라고인식했던창암자신의미학적사유의결과이 다. 그는 조선의 산천과 조선인의 심상에 부합하는 새로운 풍격의 서예 미학을개척하여한국적고유성의영역을확장함으로써결국19세기동 국진체 서가로 우뚝 선다. 결과적으로 서예로서 시대정신을 대변하고 선도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창암은 조선 후기 예술사에서 서예의 위상을 확고히 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8,700원
        28.
        2014.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글은 1894년 갑오농민혁명 이후 무금(巫禁) 정책의 시행을 주목하고, 당시 신문에서 지적한 무속의 폐 단 사유를 밝히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 결과, 이글에서 밝힌 바는 다음과 같다. 무금의 시행은 1895년 3월 10일 시작되었다는 점, 금지내용은 내무아문의 제반규례에 포함되어있다는 점 등이다. 언론에서 제기한 무속의 폐단 사유는 네 가지 주제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는 무사(巫事)가 ‘불법’이라는 점, 둘째는 ‘치료’와 연관된 모든 무사 행위가 의료적 폐단이라는 점, 셋 째는 무사에 드는 ‘비용’이 경제적인 폐단이라는 점, 넷째는 무사행위가 종교적 폐단을 낳는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이글은 그 당시 신문을 통해 무금의 과정을 파악했고, 언론이 무속에 대한 국민적 비판여론을 형성시켰음을 밝혔다.
        5,700원
        29.
        2014.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논문은 이황과 이이의 철학을 사칠론과 리의 자발성이란 측면 에서 검토한 것이다. 이황과 이이의 사유를 비교하자면 이황은 실존 적이라면 이이는 일반적이다. 이황은 실존적 경험과 수양을 중시했 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칠론에 관심을 가졌다. 사칠론은 삶 속에 서 드러날 수밖에 없는 우리의 마음이나 감정의 분류학이기 때문이 다. 또한 사칠론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그는 리발설을 주장하게 된 다. 도덕적 마음으로서의 사단은 인간의 육체적 경향성과 반하는 것 이기 때문에, 그것과는 다른 근거에서 유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 서 그는 사단이란 리에서 발한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 점에서 이황의 사유 과정은 구체적 실존, 사단과 칠정으로 분류되는 현상적 마음, 그리고 사단과 칠정의 존재론적 근거로 진행된다. 만약 사변적 인 관심만을 가졌다면 이황은 기대승과의 논쟁에서 그렇게 자신의 사칠론에 대해 이론적인 변경을 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황은 자신 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실존에 대한 정확한 반성과 인식 은 그로 하여금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틀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지게끔 했던 것이다. 반면에 이이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이황을 비 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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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2014.03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임진왜란은 7년 전쟁이었다. 국토가 황폐화 되었고 백성들은 평화로운 고향을 등지고 피난길에 올랐다. 난세에는 영웅이 탄생하는 것처럼 역사에 길이 남을 이순신 장군도 임진왜란으로 인하 여 명장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전쟁은 승리할 때가 있으면 패배할 때도 있는법, 서로를 견제 하는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모함은 야전에서 적과 싸우는 군인들에게 사기를 떨어뜨리는 작용 을 하게 된다.이순신 장군도 작전에 실패하기도 하였다. 이는 임금과 반대당파에게는 처벌의 구 실을 만들어 주는 결과가 되었고 결국 목숨까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당파의 이익을 떠나 인물됨과 현장 지휘관으로서의 고충을 이해하고 임금에게 용서해주기를 권했던 정 승이 있었다. 정탁은 임진왜란동안 임금을 보필하면서 전쟁을 수행한 노신하(老臣下) 였다. 임 금의 곁을 떠나지 않고 생사고락을 같이 하였으며 이순신이 어명을 어긴 죄명으로 국문을 당할 처지에 놓이게 되자 임금에게 구명상소를 올려 죽음으로부터 이순신을 구해내었다. 우의정으로서 전쟁을 겪으면서 본 이순신의 인물됨과 전쟁 중지휘관의 처벌이 몰고 올 전쟁 실 패에 대해 미리 예견하여 목숨 걸고 임금에게 구명상소를 올린 행동은 오늘날 군인들이 배워야 할 부분이다.
        5,700원
        32.
        2013.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논문은 미디어 속에 내포된 복지철학적 이슈, 즉 클라이언트(client, 예컨대 사회 적 약자나 취약계층)의 주체화 문제를 복지이론적으로 고찰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이 논문은 푸코(Michel Foucault)의 권력이론—대표적 비판사회이론의 하나로 꼽히는—에 입각하여 영화 <완득이>를 분석한다. 이 논문에서 영화 <완득이> 를 분석대상으로 삼은 건, 이 영화가 클라이언트를 ‘시혜의 대상’(객체)으로만 인식하 는 기존의 인식(주류사회의 시각)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논문은 주로 미디어 에 대한 비판사회복지학적 분석을 수행하고 있는데, 그 핵심 주장은 주류사회의 비가 시적이고 미시적인 권력 작용이 복지서비스에서 클라이언트의 객체화를 야기하고 있 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복지서비스가 본디 클라이언트를 위해 존재함에도 정작 복지 서비스의 제공과정에서 클라이언트는 자기결정권과 선택권을 거의 갖지 못한 채 주변 적 존재로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이 논문은 이 같은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대략 두가지 실천전략을 제시한다. 첫째, 권력은 잘 사용할 경우 부조리한 현실을 조금이라도 개선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는 만큼, 실천현장에서 사회복지사의 권력이 클라이언트를 옹호하고 클라이언트의 자기결정권·선택권을 강화하는 데 쓰일 수 있도 록 윤리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둘째, 미디어를 통한 사회적 인식의 재 고와 변화를 꾀함으로써 단기적으로는 실천현장에서 클라이언트의 주체화를 도모하 고, 장기적으로는 우리사회에서 사회권의 실체적 권리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사회 적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
        6,100원
        33.
        2013.01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明心寶鑑』이 ‘고려말 조선초 이후 가정과 서당에서 아동들의 기본교재로 널리 쓰였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는 견해는 전문연구서를 비롯한 교양서 등에서 쉽게 확인된다. 그러나 『明心寶鑑』이 아동들의 초학교재로 사용된 구체적인 사례를 확 인하기는 쉽지 않다. 그 실상을 확인하고자 각종 문헌을 조사하였다. 18세기 이전에는 『명심보감』의 보급이 충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특히 초 학자의 교재로 사용된 예는 확인하지 못했다. 다만 일부 자료를 통해 불교와 『명심보감』의 친밀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1850년 이후에는 일반인들이 『명심보감』 을 생활의 지침으로 삼거나, 어린 아이가 『명심보감』을 읽는 사례, 『명심보감』을 抄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렇지만 許傳, 李源祚, 曺兢燮 등의 언술과 기타 자료를 종합할 때, 20세기 초 까지 『명심보감』이 아동들의 학습 교재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한 것으로 판단된다. 때문에 『명심보감』에 대한 현재의 열기에 대해 그 원인을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7,800원
        34.
        2012.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하윤(1906~1974)은 1926년 시 <일허진 무덤>을 발표한 이후 한국적인 운율과 서정성을 담은 시편(詩篇), 서구지향적인 시편, 그리고 유행가 가사로 사용된 가요시(歌謠詩) 등 다양하고도 이색적인 시편들을 모아 한 권의 시집으로 묶어 간행하는 등, 1930년대로서는 매우 독특한 활동 영역을 보여준 시인이다. 바로, 1939년에 간행된『물네방아』는 이와 같은 이하윤 시의 특성이 고스란히 담긴 중요한 시집이다. 이 논문은 이하윤 시집『물네방아』를 대상으로 하여 1930년대의 한 시인이 지향하고자 한, 시의 전통성과 근대성의 표출 방식을 살펴보고, 서로 상반된 두 성향이 어떻게 한 시인의 시집 안에서 반영되고 드러나는지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특히, 1930년대에 새로운 시 장르로 편입된 ‘가요시’의 형성을 이하윤의 시세계를 통해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주지하면, 시집『물네방아』에는 총 109편의 많은 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 시집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물네방아’란 소제목으로 묶인 67편의 서정시와 ‘가요시초(歌謠詩抄)’란 소제목으로 묶인 42편의 가요시가 그것이다. 그러나 물리적인 형식이 아닌 내용상 특징으로 재분류하면, 시집『물네방아』는 세 가지의 서로 다른 시세계를 엿볼 수 있다. 즉, 시집 전반부에 수록된 67편의 서정시는 ‘물네방아’로 대변되는 토속적인 제재와 고향, 자연 등 전통세계로의 회귀를 보여주는 전통지향적인 시와, 도시적 감성과 외래적 시어 등을 근간으로 하여 창작된 근대지향적 시로 다시 나뉜다. 시집 후반부는 1930년대에 유성기음반에 취입된 노랫말(가요시)을 시집 안에 포함시킨 것들이다.이 논문은 이러한 서로 다른 세 가지 방식의 시적 특징이 어떻게 한 권의 시집『물네방아』에 구현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그 의미를 ‘1930년대’의 시대상에서 되짚어 보고자 한다.
        6,700원
        35.
        2012.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aim of this study was to comparatively analyze the differences in Jinseol (ritual table-setting) and Jesu (ritual food) from the cultural perspective of ancestral ritual formalities regarding Bulcheonwijerye of Admiral Yi Sun-Sin, which is being held in Asan-hyeonchungsa shrine, Tongyeong-changnyangmyo and Namhae-chungyeolsa. The results are summarized as follows. A total of 32 types of Jemul (ritual food) in 6 rows in Asan-hyeonchungsa shrine, a total of 30 types of jemul in 6 rows in Tongyeong-changnyangmyo, and a total of 12 types of jemul in 2 rows in Namhae-chungyeolsa were prepared for the ritual table. In the Asan-hyeonchungsa shrine and Tongyeong-changnyangmyo, cooked foods have been used for jesu, whereas raw, uncooked foods have been used for jesu in Namhae-chungyeolsa. In the Asan-hyeonchungsa shrine, Gaeng (Kook) for liquid soup of Tang (stew) and Tang (5-tang) for the solid ingredient of stew have been prepared for a ritual table. In Tongyeong-changnyangmyo, fish Kook for Gaeng and So-tang (tofu stew) for Tang have been prepared for the ritual table. In Asan-hyeonchungsa shrine, Yukjeok (beef slices broiled on a skewer), Gyejeok (chicken jeok) and Eojeok (fish jeok) have been stacked together as Dojeok on a ritual table whereas in Tongyeong-changnyangmyo, Yukjeok, Sojeok and Eojeok have been placed on the ritual table as Pyunjeok (one by one). In Namhae- chungyeolsa, raw pork meat has been placed on the ritual table. As Po (a dried meat or fish), dried fish and dried seafood have been used in Tongyeong-changnyangmyo, whereas raw beef meat has been used in Namhae-chungyeolsa. Although Namul (cooked vegetables) and Mulkimchi (watery plain kimchi) are placed on ritual table for Asan-hyeonchungsa shrine, only Namul and Saengchae (raw vegetables) is used in Tongyeong-changnyangmyo and Namhae-chungyeolsa, respectively. Bulcheonwijerye for the same person, Admiral Yi Sun-Sin, has different characteristics according to the shrines. Accordingly, there is a need to preserve and succeed bulcheonwijerye of Admiral Yi because it is a traditional culture in ancestral rituals.
        4,000원
        36.
        2012.08 구독 인증기관·개인회원 무료
        “Myeongsimbogam” is an aspect of the present during Yi Dynasty era. We think about Myeongsimbogam as the following. After a beginner learned the «Cheonjamun», they are following «Dongmongseonseup» and “Myeongsimbogam” for basic process was used widely like a textbook. At the end of the Goryeo era and early Yi Dynasty era, Myeongsimbogam had been used in the home and seodang. Later it was widely used as children’s primary textbook; people read hundreds of years while enjoying our nation's spiritual values, which play an important part in the formation. National culture, including the encyclopedia research book is almost identical. However, little data to support this view is not confirmed. Therefore, I researched the Josun Dynasty’s collections of work and several anthologies of literature by examining the articles associated with Myeongsimbogam. In the 18th century, the old data is part of Myeongsimbogam, which is shown in"(座隅自警语)". There were not enough readers, yet the readers ages were of the elderly. Monks studied Myeongsimbogam and in Ansimsa(安心寺) they published Myeongsimbogam. Buddhism showed a close relationship to Myeongsimbogam. Myeongsimbogam was published a couple of times, but was never very popular or used for children’s text books before the 18th century. After 1850 years reviewing the material, rather than professional scholars, writers and ordinary people read Myeongsimbogam as a guideline for their life, young children read Myeongsimbogamas a textbook. Nevertheless, scholars never really studied Myeongsimbogam. There was no information about scholars studying Myeongsimbogam. Myeongsimbogam may not have been important in our ancestors’ lives. Myeongsimbogam was not much of an important part in the seodang education.
        37.
        2010.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关于对中国文学的研究,其领域已不只限于中国大陆,还波及到香港、台湾、东南亚及北美地区。本论文要研究的是杨逸的作品《浸着时光的早晨》,这部作品于2008年在日本出版,是以日语为创作方式的,同一年被授予芥川赏。杨逸并非土生土长于日本,而是在中国接受完中等教育以后才去的日本。赴日后才学习日语的杨逸,虽然其以日语进行文学创作,但在其作品中仍然渗透着中国式的传统、情绪和文化。到目前为止,杨逸的一生一半生活在自己的故乡-中国,另一半生活在他国日本,所以,更能从客观的角度来观看中国,并且在陌生的地方开始思考自己的身份认同问题。这一点在她的作品中被原封不动地显现了出来,尤其是,其作品是以在中国处理困难的历史性事件为中心进行叙述的。本论文就从如何接近多少带有敏感性的中国历史、居住于海外的中国人身份认同问题以及中国作家以日语进行创作的文学作品对现今的中国文学起何种影响等方面进行探讨,以求对文学超脱特定区域文学领域的限制、确立新的文学范畴领域有所帮助,同时,这样的研究又和中国文学的范畴区分和连关性有关联,这不仅和前面提到的中国文学的范畴问题相衔接,也为审查21世纪中国文学提供了机会。
        5,100원
        38.
        2007.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왕안이가 ≪弟兄們≫에서 우리에게 주는 회답은 비관적이다. 이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여성의 비극은 바로 물질적 현실생활(문화가 규정한 삶의 양식)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사람은 물질적 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고, 작가는 이런 상황을 완전히 수긍할 수만은 없기에, 여성의식 실현의 가능성에 대한 모색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라오따、라오얼과 라오싼은 여성의식의 정도가 각기 다른 세 여성을 대표한다. 그 중 라오얼의 여성의식이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다. 라오얼은 의기소침한 적도 있지만 생활 속에서 자신의 생각을 추구하고자 노력한다. 라오얼의 강인함과 여성의식이 가장 잘 표현된 것은 그녀가 라오따 남편과 충돌하는 장면에 잘 드러난다. 라오따의 남편이 라오얼에게 아이가 다친 책임을 지우며 그녀에게 당장 그의 집을 떠나라고 할 때, 라오얼은 떨리는 목소리로 “나는 가지 않을 것이다. 이 집은 당신 혼자만의 집이 아니야”라고 반격한다. 이 한마디 말은 남성의식을 향한 반격이라 할 수 있다. 여성이 가정에서 동등한 발언권과 결정권이 있음을 이야기 한 것이다.
        5,200원
        39.
        2006.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4,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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