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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
        2016.04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대한민국 헌법 제20조는 “①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②국교 는 인정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한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그래 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하지만 한국에 서 정치와 종교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며 심지어 모호하다. 기본적으로, 그 런 조항은 미국헌법의 절대적 영향 하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1945년 이후 전개된 한국근대사의 혼돈 속에서, 그런 헌법조항에 근거한 정치와 종교의 관계는 지속적으로 불안정하고 문제가 많았다. 특히, 한국의 보수적 복음 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유동적인 정치적·종교적 환경에 따라 이 문제를 전략 적으로 다루어왔다. 이 논문은 1945년부터 2013년까지 보수적 복음주의자 들이 정교분리의 의미를 이해하고 재구성하며 그것에 적응해 온 복잡한 역 사를 추적하는데 목적을 둔다. 1945년부터 1960년까지, 한국교회는 정교분리에 대한 헌법의 규정과 상 관없이 기독교에 특혜를 베풀어준 정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예를 들어, 그 기간 동안 미군정은 미국선교사들의 조언에 따라서 한국개신교인 들이 다양한 정치영역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했다. 종교정책 면에서, 미군정은 다른 종교들을 배제한 채, 한국교회에게 많은 특혜를 베풀었다. 그런 특혜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으로, 한국교회는 정부정책에 열정적으로 협조했다. 특히, 제1공화국에서 대통령선거 기간 동안, 한국교회는 감리교 장로이자 한국개신교에 대단히 우호적이었던 이승만을 거의 맹목 적으로 지지했다. 그 기간 동안, 한국교회는 정교분리의 의미를 정확히 이 해하지 못했다. 1961년부터 1986년까지, 한국은 군사독재기간을 통과했다. 그 동안, 한 국교회는 두 부분으로 분리되었다. 즉, 군사정부를 신실하게 지지했던 보 수주의자들과 그 정부에 저항했던 진보주의자들로 말이다. 그 결과, 독재 자들은 두 진영을 정부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 따라 다르게 취급했다. 예를 들어, 군사정부는 보수교회들이 ‘액스플로 74’ 같은 일련의 대규모 집회들을 개최하고 ‘전군신자화운동’ 같은 전도활동을 전개할 수 있도록 후원함으로써, 이들이 빠르게 성장하는데 결정적 도움을 주었다. 이런 종교적 특 혜에 대한 반응으로,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진보진영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그 정권의 충실한 동맹자가 되었다. 하지만, 진보주의자들의 경우, 군사정 권에 저항한 것에 대해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1997년부터 2007년까지, 한국교회는 처음으로 정부와 부정적 관계를 맺게 되었다. 진보적 정부가 남북간의 적대적 관계를 개선하기 시작하고, 사립학교법 개정을 통해 기독교사립학교들의 부정을 개선하려고 노력하자, 한국교회는 반정부세력으로 돌변했다. 그들은 진보적 정부를 종북좌파세력 으로 규정하고 이 정부의 거의 모든 정책에 반대했다. 이 기간 동안, 교회 들은 정교분리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을 수정했다. 그들은 이전에 종교가 정치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제는 종교가 자신의 정치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정치적 저항이 헌법 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믿으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음 정부를 위한 새로운 대통령 후보로 보다 보수적이고 친기독교적인 후보를 선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최근에는 보수적 기독교인들이 이런 주제와 관련해서 정부와 이중적 태 도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여전히 친기독교적인 이명박 정부의 강력하고 신실한 후원자들이었다. 같은 정치적·경제적 신념 에 기초해서, 그들은 이 정부를 지속적으로 지지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적극적 정치참여가 정교분리라는 헌법조항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 했다. 그러나 때때로 그들은 동일한 정부가 타종교들, 특히 불교와 이슬람 에 대해 우호적 조치를 취하자 강력하게 저항하고 비판했다. 그들은 정부 의 그런 태도가 기독교를 배제한 채 다른 종교들에게 특혜를 베풀어 정교 분리의 원칙을 위반했다며 불법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은 정부와 자신들의 관계에 따라 “정교분리”란 개념을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해왔다. 그들과 정부의 관계가 우호적이었을 때, 그들은 “정교분리”를 “종교가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것” 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그들과 정부의 관계가 불편했을 때, 그들은 그런 이 해를 뒤집고 강력한 반정부세력이 되었다. 한편, 그들이 정부로부터 우호 적 지원을 받았을 때, 그들은 그런 특혜가 정교분리의 헌법적 조항을 위반 한 것이라고 해석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정부에 의해 차별을 받는다 고 느꼈을 때는 정부가 헌법을 위반한다고 주장하며 반정부적 투쟁에 나섰 다. 이토록, 한국에서 보수적 복음주의자들과 정교분리의 관계는 복잡했다.
        62.
        201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역사교과서는 사람들의 가치관 형성에 중요하기 때문에 사실에 기초해야 한다. 역사교과서 편찬은 최신 연구 성과를 반영하는 토대 위에서 표준과정과 심의과정을 체계적으로 운영 해야 한다. 그런데 일본은 대내외 정치적 문제 때문에 독도를 포함한 과거 역사를 사실과 다른 역사로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일본은 2014년 기존 교과서에서 독도가 부분적으로 기술된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교과서에 들어갈 내용을 해설서에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다. 일본은 2015 년 독도와 관련하여 일본의 고유영토, 1905년 시마네현의 편입, 1954년 한국의 불법점거, 국제사법재판소의 평화적 해결 등의 내용을 일본 중학교 사회과 교과서에 대폭적으로 강화 되었다. 일본은 중학교 사회과 교과서 검정을 통해서 내셔널리즘을 강조하는 독도 교육을 전면적으로 강조하였다. 이것은 일본이 독도를 영토문제로 제기하는 수준을 넘어, 역사문제로 전면적으로 확대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일본의 사회과 교과서는 동북아의 평화적 미래보다는 아베정권의 정치적 도구로 전락했다. 일본은 독도와 관련하여 초등학교에서 시각적인 측면, 중·고등학교에서 논리적인 측면을 강조하였다. 일본은 주로 근현대사 위주의 독도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일본은 과거 고등학교 지리와 공민 교과서에 독도를 영토문제로 제기하는 수준을 넘어서, 현재 역사 교과서에 내셔널리즘을 강조하는 독도 교육을 전면적으로 실시하였다. 한국은 독도와 관련하여 초·중·고등학교에서 역사적 사실을 강조하였다. 한국은 주로 전근대와 근대사 중심의 독도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한국 사회과 교과서는 독도에 관한 국제법적 측면, 논리적인 측면에 대한 보강이 필요하다. 향후 한국의 사회과 교과서는 근현대 일본이 동북아의 역사 갈등을 유도했다는 서술이 필요하다. 또한 한중일의 근현대 역사 교과서의 공통편찬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유럽과 달리 동북아의 역사 갈등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63.
        201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메노나이트 중앙 위원회(MCC)는 1951년에서 1971년까지 한국에서 구제와 교육 사역을 해 왔다. 메노나이트 중앙 위원회는 1920년 조직된 이후 전 세계의 분쟁지역 사람들을 구제하기 시작하였고,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형태의 구제사역을 펼쳐왔다. 그들이 하는 일은 농업, 물공급, 집 짓기, 보건, 직업 창조, 평화 세우기, 교육 등이다. 이런 활동과 함께 그들은 전 세계의 수많은 다양한 기구들을 파트너로 삼아 지원하고 있다. 그들은 ‘메시야의 평화 선교’ 정책에 기초하여, 인간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종교적인 모든 차원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 메노나이트 중앙 위원회는 한국전쟁 중인 1951년부터 한국과 관계를 시작했다. 휴전 직후인 1953년 7월에는 한국대표부를 대구에 설립하고 경산에 농장을 개발하여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한국 활동 가운데 대표적인 것 네 가지는, 물자구제 사업, 직업학교, 가족/어린이 지원 프로그램, 전쟁 과부들을 위한 재봉기술 교육 등이다. 메노나이트 중앙 위원회의 사역은 제자도에 기초하여 공동체 안에 평화를 세우는 일이었다. 이 사역의 구체적인 모습이 개인과 가정과 마을과 한 국가에 대한 구제와 개발이고, 구제와 개발이 지향하는 바는 평화인 것이다. 이 구제사역은 곧 평화를 주고 나누고 세우는 사역이었다. 구제사역과 평화사역은 서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개념이다. 한국 메노나이트 중앙 위원회는 인간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종교적 모든 욕구를 포괄하는 선교인 ‘메시야의 평화 선교’에 근거해서 한국전쟁 시기 한국에서 그들의 평화사역을 시작하였다. 진정한 평화는 ‘일용할 양식’과 ‘공동체’가 그 기초이다. 그들은 신앙교육은 하되 교파교육은 시키지 않았다. 그들은 교회를 설립하려는 사람들을 지원했다. 그러나 메노나이트 교회를 세우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앞서 들어온 한국의 교회들을 존중했고, 한국교회들이 놓치고 있는 부분들을 묵묵히 감당해 주었다. 그들은 한국교회를 섬겨 준 것이다.
        64.
        2014.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한국 기독교 선교의 기원에 관해 관심을 갖고 있는 몇몇 개신교 단체들은 최근 올해 2014년을 한국기독교 130주년으로 정하고, 이를 기념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중대한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기 전에, 우리는 1) 용어 사용의 문제, 2) 역사관의 중요성, 그리고 3) 첫 번째 선교사에 대한 논쟁 등과 같은 문제들을 주의 깊게 연구해 보아야 한다. 가장먼저 우리는 ‘기독교(Christianity)’의 의미를 고려한 후,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가 과연 적절한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기독교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나 그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기독교는 로마 카톨릭 교회, 동방정교회, 성공회, 그리고 개신교회를 모두 다 포함하는 매우 포괄적인 용어이다. 만일 한국에서 가장먼저 선교역사가 시작된 천주교의 역사의 시작점인 1784년을 한국기독교의 시작점으로 본다면, 올해는 한국기독교 130주년이 아니라 230주년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올해 2014년도를 한국 기독교 전체가 아닌 개신교 차원에서만 기념하려 한다면, ‘한국기독교 130주년’이 아닌, ‘한국개신교 130주년’이라는 슬로건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들은 역사를 이해함에 있어서 역사관의 중요성에 관해서 반드시 인지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한국에서는 한국교회사 혹은 한국선교역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크게 ‘선교사 중심의 역사이해’와 ‘한국인 중심의 역사이해’라는 두 개의 역사관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인 중심의 역사이해를 하려는 사람들은 1884년 이전에 주로 중국이나 일본에서 초기 선교사들과의 만남을 통해 개신교 신앙을 접한 초기 한국인들(예를들어, 백홍준의 아버지, 이응찬, 김진기, 서상륜, 서경조, 이수정)에게 관심을 많이 갖고 있다. 물론 이들 한국인들은 한국 개신교 신앙의 개척자들로서 한국개신교 선교를 위해 다방면에서 공헌을 한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한 기독교인 이었는지, 그리고 한국에 교회를 설립한 것이 맞는지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바로 이런 점들 때문에 어떤 이들은 한국개신교 역사의 시작은 외국 선교사들의 한국입국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에 온 첫 번째 개신교 선교사가 누구인가에 관해서는 여전히 논쟁점들이 존재한다. 찰스 귀츨라프는 1832년에 그리고 로버트 토마스는 1866년에 한국에 처음 도착한 것은 역사적으로 분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과연 진정한 선교사였는가에 대해서는 명확한 입장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한국에 올 때, 서구 제국주의 혹은 식민주의자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의 조력자로 한국에 왔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한국 교회사학계와 교회들에서는 1880년대에 한국에 온 선교사들 가운데에서 그 첫번째 선교사를 찾으려고 한다. 한국감리교의 초대 총리사였던 양주삼은 1880년대 한국에 온 선교사들 중에 로버트 매클레이를 첫 번째 개신교선교사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매클레이가 1884년에 고종으로부터 감리교를 포함한 모든 개신교 선교사들의 선교(의료, 교육)에 관해 공식적으로 허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매클레이가 보여준 한국정부와 한국 사람들을 대하는 정중한 태도는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들에게 매우 긍정적인 교훈을 주기 때문에, 우리는 매클레이를 한국에 온 첫 번째 개신교 선교사라고 고려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65.
        2014.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아시아 기독교사에 대한 한국에서의 연구를 총 정리한 것이다. 신학 및 교계 잡지에 발표된 글과 단행본, 그리고 일반 역사학 관련 잡지를 검토하여, 가능한 모든 글을 소개하려고 애썼다. 한중일 3국을 주요 범위로 하였지만, 그 밖의 아시아 전체국가를 대상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동남아나 인도, 서아시아 국가의 기독교사에 관한 국내 연구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본문을 통해서, 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기 시작한 1960년대 이후 1970년대와 1990년대, 2000년대 등 각 시기별 변화에 따라 연구의 주제와 내용이 민족, 선교, 세계화 등의 관심사를 반영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I장에서는 한국 기독교사의 기원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경교 연구사, 그리고 한국 천주교의 기원과 국제관계, 중국과 일본, 그 밖의 아시아 천주교 연구를 소개하였다. II장은 만주선교와 기독교 민족운동, 한국 개신교의 유래에 대한 연구가 중국개신교사에 대한 관심을 일으켰고, 개혁개방 이후 중국선교에 대한 관심이 반영된 이후, 점차 중국 기독교사 자체에 대한 관심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밝혔다. III장은 식민지 시기 한국에 미친 일본기독교의 영향에 대한 관심이 일본개신교사에 대한 연구를 일으켰고, 오늘날까지도 일본기독교의 국내외 영향관계를 중심으로 연구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IV장을 통해서는, 근동지역과 인도에 대한 연구자들의 관심이 아직 부족하지만, 동남아에 대해서는 1990년대 이후 활발한 선교, 국내 이주민의 급증으로 새로운 관심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남아 기독교사 연구는 선교사들의 자료 수집, 번역서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한국에서의 아시아 기독교사 연구는 그동안 한국 기독교사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났고, 따라서 한국 기독교사 전공 학자들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 이후 선교를 위한 관심으로 옮겨갔고, 최근에는 주체적인 또는 통합적인 서술로 발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시아 각국 기독교사에 대한 개별 연구와 통합적인 조망은, 아시아 기독교사 전체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한국 기독교사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작업이기도 하다. 본 논문에서 빠진 것이 보충되고 좀 더 세밀한 분석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66.
        2014.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is study is conducted to monitor the morphological developmental features of the egg development, larvae and juvenile of Epinephelus septemfasciatus, the fertilized eggs were gotton using artificial insemination. Matured parents are collected from marine caged fish farms in Geomun-ri, Samsan-myeon, Yeosu-si, Jeollanamdo Korea in June 2012. The fertilized eggs were pelagic eggs containing one oil globule, and measured 0.81~0.89 mm (0.85±0.04 mm, n=50) in diameter. In regard to rearing environment, the water temperature is 21.0~23.0℃ and the salinity is 32.0~33.2‰. Hatching was observed from 48 hours after fertilization, the mouth and anus of prelarvae was not opened but had egg yolk at newly hatched. 4 days after hatching, the mouth and anus of postlarvae was opened and began to eat Rotifer and was measured 2.40~2.49 mm (2.45±0.03 mm n=10) in total length. 12 days after hatching, postlarvae was measured 3.77~4.67 mm (4.27±0.33 mm) in total length, its the second pole tide of dorsal fin and the first pole tide of pelvic fin was extended longitudinally. 71 days after hatching, juvenile was measured 40.5~45.4 mm (42.6±2.04 mm) in total length. Seven bands were observed in body, and pole tides of dorsal and pelvic fins were shortened.
        67.
        2012.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is study tries to illustrate that oral history can open a new prospect in the field of a Korean church history, a modern history of Korea, and World history. Firstly, this paper deals with theoretical approach about oral history. A basic direction of oral history is to supplement establishing materials and to make people’s memories be historical. Furthermore, oral history aims at new historical fields through enlargement of interviewees and reflection on philosophy of history and historical theory. General historians overlook a religious inner side easily. However that is a mistake of ‘process-reduction.’ Oral history is an alternative overcoming that kind of mistake. Especially oral history of religion is a historical method to discover new histories by their own confess-language differed from the fact-language and the interpret-language. Secondly, this paper suggests that the oral history of religion probes many varieties of historical layer, focusing on the Christians who were participated in the Korean pro-democracy. Christian democratizers played a leading role under the military dictatorial government. Moreover, they consolidated not only people in many fields such as religion, press, student, judicial officer circles and so on nationally, but also compatriots overseas. Outside of those, this paper prefigures a possibility of enlargement of oral history by illustrating examples of various historical layers. Finally, the present writer finishes, giving discourse assignments to the readers. One is to reflect the way of sharing memory. If the survivors passed away, their experiences become extinct. In order to overcome that crisis, a oral history needs to be investigated, searched for the way of sharing memory. Another is to reflect on a position of a oral history between micro-history and macro-history. A oral history is located in the context of micro-history. Nevertheless, it is important to work a oral history having a mind to criticize individuality and generality in micro and macro dimension.
        68.
        2011.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For the reconstruction of the past vegetational changes in Jeju Island, Korea, pollen analysis and radiocarbon dating on the sediments obtained from the Mulyeongari fen were carried out. By the results, the vegetational changes around the Mulyeongari fen from ca. 3,300 cal. yr BP to the present can be interpreted and reconstructed. The pollen record from the Mulyeongari fen was divided into two local pollen assemblage zones and three sub-pollen assemblage zones. Zone I (Quercus-Carpinus-Herbs Zone) was characterized by the predominance of Quercus(30~63%), Carpinus(9~35%) and herbs(40~424%). Zone II was characterized by three sub-pollen assemblage zones and the high occurrence ratio of the tree layer in comparison with Zone I. In Zone IIa (Quercus-Carpinus Zone), herbs(3~161%) were drastically decreased in predominance of Quercus(28~56%) and Carpinus(14~31%). In Zone IIb (Carpinus-Quercus Zone), Carpinus(36~48%) was preferentially increased but Quercus(29~39%) was slightly decreased. In Zone IIc (Quercus-Carpinus Zone), Carpinus(26~38%) was decreased inversely but Quercus(36~50%) was increased. In addition, Cyperaceae was also increased to 52%. Consequently, it is suggested that cool temperate southern/sub-montane vegetation composed of Quercus and Carpinus which was physiognomy of deciduous broad leaved forest was distributed around the Mulyeongari fen from ca. 3,300 cal. yr BP. In addition, Cyclobalanopsis(4~23%), Castanopsis(1~12%) and Myrica(under 1%) which are warm-temperate evergreen deciduous forest components were constantly appeared from this period. Accordingly, it can be inferred that the present vegetation type around the Mulyeongari fen was formed from ca. 180 cal. yr BP.
        69.
        200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A major history textbook for high schools, A Modern History of Korea for High School (Seoul: Kumsung Publishing House, 2007) described that Protestantism in Korea supported Japanese invasion to Korea. The text book has been used for many years by more than 50% high schools in South Korea. The argument of this book is very important because it might influence over high school students who think that the text book should always be correct. However, Protestantism in Korea was not the supporter of the Japan Empire in the turn-of-twentieth century Asia. In reality, Korea Protestantism had been appeared by Korean people as defender of Korean people against Japanese power. At that time Korea protestantism had been closely related to America which send their missionaries to Korea and helped its modernization. When Japan tried to put Korea in her power, King KoJong sent his envoy to the president Roosevelt of USA for help to maintain his independence. In reality, Japan government had considered Korean Protestantism as big obstacle for its rule over Korea. Japan had always be afraid of Korean Christianity and spied over it. Japanese army in 1911 arrested 105 important Christian leaders to destroy Korean churches. Also, in the last years of Japan imperialism, Japan governor-general of Korea expelled American missionaries from Korean peninsular to disconnect Korean Christian relationship with America. Finally, missionaries tried to maintain the principle of separation between church and state in Korea. They did not involve in political matter either on Korean nationalism or Japanese imperialism. This attitude of missionaries could not be satisfied with Japanese as well as Korean. However, they thought that their original mission in Korea is evangelization, but not independent movement of Korea.
        70.
        2006.01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포항시에 위치한 송도해안은 오랜 기간 동안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하여 해안침식이 진행되었다. 송도해안의 해안침식 문제와 관련하여 논쟁의 이슈로 되어 있는 문제 중 하나는, 해안침식에 대한 주변 해안구조물의 영향 범위이다. 본 연구에서는, 이를 검토하기 위하여 송도해안의 침식특성과 관련된 기존자료 및 항공사진자료 등을 통하여 재분석하였다. 특히, 주변지역의 인위적인 해안개발 상황을 토대로 실험안을 구성한 후, 3차원 지형변동모델을 이용하여 송도해안의 해빈변
        71.
        200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일본에 있어서 18세기말기로부터 19세기 초두의 自他認識과 아시아 침략에 귀 결되는 근대 내셔널리즘의 생성 과정을 검토하는데 있어서 무시할 수 없는 것은 러시아의 접근에서 시작된 서양 세계와의 ‘만남’이다. 그것은 그 이전까지 ‘오랑캐’ 로 여겨져 인식의 범위 밖에 벗어나 있던 서양 세계의 현실적인 등장이 華夷思想 的자타인식에 결정적인 동요와 해체를 야기 하여 그 구조에 근본적인 변용을 초 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아시아에 있어서 공통된 상황이었다. 일본의 경우 유학적 思惟․화이사상적 자타인식의 해체가 비교적 용이하게 진 전되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에 있어서는 일본과 다른 길을 걷게 되었는데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것은 한일 사상사를 생각하는데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지만, 간단하게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본 발표에서는 일본의 후기 미토학(水戶學)과 한국의 許 愈(1833-1904)사상과의 사상의 비교로부터 부상되는 사상적 특징을 지적하는 것으 로 그 一端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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