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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Hu Yingji” tripod is a new-found implement of Hu state. The experts have a variety of explanations on “ci 辭” and “幺(玄)布二乙”. In my idea, “ci” should be written as “騂”. “騂” means the red horse. “幺(玄)布二乙” should be read as “幺(玄)布二乙”. When Hu Yingji has an audience with Zhou Zhaowang, she pays the tribute of a precious horse to her monarch. So, the monarch awards her “貝十朋” and “幺(玄)布二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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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7.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왕자오정 (王子午鼎)>은 기물의 모양이 독특하고 문양은 실랍법 (失 蠟法), 명문은 조충서 (鳥蟲書)를 사용하여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선행연구에서는 주로 무덤주인, 제작연대, 내용분석에 치중하였는데, 본 고에서는 이를 토대로 <왕자오정> 명문의 내용과 기물의 주인, 그리고 명문에 나타난 서체미에 대해 집중적으로 고찰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도출해 내었다. 첫째, <왕자오정> 본체의 명문에 영윤자경 (令尹子庚)이란 명칭을 통 해 왕자오 (王子午)가 영윤으로 있던 기원전 558~552년 사이에 열정 (列 鼎)을 주조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그 덮개에 보이는 붕 (倗)은 자 경과 자남 (子南)의 뒤를 이어 영윤 (令尹)이 된 위자붕 (蔿子馮: 楚叔之 孫倗)으로, 어떤 정치적 혼란 속에서 이 기물을 획득하여 덮개를 추가로 만들고, 기원전 548년에 죽으면서 자신의 무덤 (M2)에 부장하였을 것으 로 추정된다. 둘째, 춘추 5패 (覇) 중의 한사람인 초나라 장왕 (莊王)은 9정 (鼎)에 대한 고사로 유명하다. 그의 아들인 왕자오는 자신의 신분보다 한 단계 높은 7점의 열정을 주조하여 당시 초나라의 국력이 막강하였음을 고고 학적으로 증명하였다. 그러나 이후에 <왕자오정>과 같이 화려한 청동기 가 보이지 않는데, 이는 상대적으로 인문정치가 미약하였기 때문으로 추 측된다. 셋째, 조충서는 춘추전국시기에 장강 중하류 지역에서 크게 유행하여 중원 지역에까지 영향을 주었는데, 오 (吳), 월 (越), 초 (楚), 서 (徐), 증 (曾), 채 (蔡), 송 (宋) 등의 여러 제후국에서 주로 발견된다. 춘추시기에 서 조충서는 무기류에서 주로 확인되고 용기에는 극히 드물다. <왕자오 정>은 현재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하는 조충서의 명문으로 그 사료적 가치 뿐만 아니라 서법예술에서도 상당히 수준 높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넷째, 춘추시기 초나라 문화권에서는 세로의 길이가 긴 장방형 결구를 선호하고 있다. <왕자오정>의 명문도 이러한 결구를 취하고 있는데, 본 체의 복부에는 조충서로 14행 84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고, 덮개에는 장 방형의 대전 (大篆)으로 4자가 새겨져 있다. 이는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 이 기물 본체는 왕자오가 만들고 덮개는 위자빙이 만들었기 때문이며, 덮개를 추가로 만드는 과정에서 좀 더 고풍적인 장방형의 전서를 선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왕자오정>은 동시기 청동예기 중에서 기물의 제조방법과 명문의 서사방식이 매우 빼어난 것으로 예술적 가치가 높은 최고의 걸작 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당시 초나라 왕실과 국제정세를 알 수 있는 청동기 유물이며 조충서의 초기적인 형태로 조충서의 형성과 변화양상 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6,000원
        3.
        2016.09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Assisted evidence of Shuo Wen Jie Zi(《說文解字翼徵》)was written by Piao Xuan Shou who is a famous scholar in Joseon Dynasty. This is South Korea's only remaining book that The author was first use of Chinese bronze inscriptions, Seal characters and drum-stone inscriptions to research Shuo Wen(《說文》). By this way, The author want to correct the mistake of Shuo Wen. So it is stand for that the philology researching reached new heights. However, there are still quite a few defects and shortcomings in the book, like follow blindly view of Xu Shen and wrong to knew Chinese bronze inscriptions. For the Chinese scholars, this book have some effects like “Stones from other hills may serve to polish the jade of this one”. As an example with 12 characters from Bronze inscriptions of Yu Tripod (《大盂鼎銘文》) that it had quoted in this book, and the current Academic research Can be checked with the view of correction Shuo Wen. So that this book can be evaluated and inherited.
        4,600원
        4.
        2015.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는 쿠로스와 코레로 대표되는 아르키익기의 대형 인물상의 형성과 그것에 새겨진 명문과의 상관 관계를 다루고 있다. 초기 그리스 조각에서 명문은 조각상의 몸에서 주로 관찰된다. 니칸드레가 봉헌한 코레, 사모스의 초대형 쿠로스상, 메가라 히블라이아의 쿠로스, 프토온의 쿠로스, 사모스의 케라미에스코레상들과 게넬레오스의 군상이 그러하다. 받침대에 명문이 남겨지는 가장 이른 사례는 에우티카르티데스의 받침대로, 후에 아티카 지역에서 제작된 프락시클레이아의 코레의 받침대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이들 받침대의 명문은 조각가의 조형적 성취를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도록 삼차원적으로 배치되어 독립상의 조형미를 감상하도록 유도된다. 아르카익기 이후에는 받침대에 명문을 새기는 것이 일반화되는데, 명문은 문자가 독립상의 조형적 요소에서 분리되어 ‘읽는 대상’으로 한정되고 조각상이 응시와 감상의 대상으로 인식되는 현상을 반영하는 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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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3.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고는 선행연구의 연구 성과들을 토대로 본기물의 銘文에 대한 여 러 이견을 정리함과 동시에 새로운 각도에서 글자를 隷定하고 현대어 역과 역주를 진행하였다. 그 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새로운 의견을 도 출해 내었다. 먼저, 기물의 명칭은 그동안 < 比鼎>․<鬲攸从鼎>․<鬲攸比鼎> ․ <鍋攸从鼎>․ < 攸从鼎>․ < 攸从鼎>․< 攸從鼎>․ < 傱鼎>․ < 从鼎>․< 攸比鼎>․< 攸比鼎>․<攸比鼎> 등과 같이 다양하 게 불러졌는데, 본고에서는 자형분석을 통해 < 攸比鼎>으로 비정하 였다. 둘째, 기물의 연대에 대해 선행연구에서는 대체로 厲王․宣王․西周후 기로 분류하고 있는데, 기물의 기형과 문양, 명문의 내용과 서풍을 토 대로 < 攸比鼎>을 西周후기 厲王 32년에 제작된 기물로 추정하였다. 셋째, ‘ ’자의 해석에도 ‘鬲’․‘鍋’․‘ ’․‘ ’․‘ ’․‘ ’ 등으로 다양한 이견이 존재하였는데, 자형을 근거로 ‘ ’자로 예정하고, 商周시기 기 물과의 비교를 통해 이 글자가 ‘盉’의 初文임을 새롭게 증명해 내었다. 넷째, 比는 攸衛牧과의 소송에서 승소하고 이미 ‘攸’땅을 돌려받 았기 때문에 ‘ 攸比’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돌아 가신 할아버지 丁公과 아버지 惠公을 위한 존귀한 鼎을 만들게 되었 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섯째, 皇祖는 商代의 유풍과 같이 干支를 사용하여 ‘丁公’이라 하고, 皇考는 周代의 풍습을 따라 ‘惠公’이라고 호칭하였다. 어쩌면 比의 조상은 상나라 계통으로 서주 초․중기에는 殷遺民으로 상의 풍습을 계승해 오다가 아버지 때에 와서 주나라 방식으로 시호를 바 꾸어 완전히 서주에 동화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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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2.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백제의 위덕왕(昌王)은 선왕인 성왕(聖王)의 무덤과 함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을 조성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능산리사원은 능이 조성된 뒤 창사(創寺)가 시작되어 사리가 공양되던 위덕왕 13년경(567) 거의 완공단계에 이르렀는데, 수도 사비[부여]의 최후 방어성인 나성(羅城)과 가장 가까운 곳에 왕실의 능묘가 조성되고 나성과 묘역 사이에 왕실의 선조를 위령하는 절 및 부속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능의 관리와 각종 상장의례는 물론 불교행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백제에서는 중국의 남북조에 빈번히 사신을 파견하였다. 위덕왕은 중국 남조로 편중되던 기존의 대중국관계에서 벗어나 북조국가들과도 교류를 하였다. 백제에서는 점복에 대한 관심이 커서 중국의 송나라로부터 식점(式占)을 요청하여 받아들였다. 이러한 중국의 식점을 통해 백제에서는 길례 즉, 혼인과 흉례 즉, 상장(喪葬)의 날짜를 잡기도 했을 것이다.불교가 전래된 이후 백제에서는 사찰․탑의 건립과 조상(造像) 등의 신앙행위, 즉 공덕 행위가 매우 중시되었다. 특히 웅진시대 이후 백제에서는 중국 사서에 ‘승려(僧尼)․절(寺)․탑(塔)이 매우 많다고 기술될 만큼 사회 전반에 걸쳐 불교에 대한 신앙이 매우 컸다. 불교 사찰 내에는 불상과 함께 반드시 탑이 세워지게 마련인데 여기에 부처의 사리를 안치함으로써 탑은 일종의 분묘 역할을 하게 된다. 따라서 백제에서는 이러한 사리봉안이 매우 중요한 불교의식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백제의 역법과 관련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백제본기의 일식(日食) 천문(天文)과 관련한 기록에 의해 간지역일(干支曆日)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전하는 관련 기사를 통해 백제에서는 역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관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에서는 송의 원가력(元嘉曆)을 사용하였는데 백제에서 사용한 원가력은 비유왕(毗有王)이 재위 24년째인 원가 27년(450)에 송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식점 등을 구한 사실을 통해서 이무렵에 들여온 것으로 보인다.목성을 세성(歲星)이라고도 하며 태음(太陰)․세음(歲陰)․청룡(靑龍)․천일(天一)․섭제(攝提) 등 다양한 이름으로도 불린 태세는 춘추전국시대부터 매년 홍수(水災)나 가뭄, 농업의 풍흉 등을 점치는 점성술에 이용되었다. 태세는 12지간을 담당하는 천신이 되었고 태세의 방위에 따라 행사의 길흉이 결정되었는데 매 4개월마다 자(子)․유(酉)․오(午)․묘(卯)의 방위를 따라 운행하였다. ��논형(論衡)��난시(譋時)편에는 거주나 이사․여행․제사․상장․혼인 등에 있어서 태세를 주의해야 한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그런데 백제의 창왕명석조사리감 명문에 의하면 매형공주가 불사리를 공양한 시점은 바로 위덕왕이 재위한 지 13년이 되는 태세의 정해(丁亥)다. 따라서 백제왕실에서는 중국에서 수입한 역법과 식점 등에 의거하여 위덕왕 13년이 되는 태세에 흉신인 세월(歲月)을 피해 정해에 능산리사지에서 사리공양 등의 불교식 제사를 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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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8.0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4,6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