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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茶山의 朱子 『論語集注』 批判(7) KCI 등재

Tasan(茶山)'s arguments against Zhu Xi's Collected Annotations on the Analects(論語集注)

정다산의 주자 『논어집주』 비판(7)

  • 언어K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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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茶山의 나이 52세 때인 1813년에 완성된『論語古今注』는 실로 二千年 論語學史에 있어서 획기적인 저작이 아닐 수 없다. 비록 당세와 후세에 끼친 영향력에 있어서는 주자의 『논어집주』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 탐구의 깊이나 철저한 고증 력에 있어서는 『논어집주』의 수준을 훨씬 넘어선 大作이라 해도 전혀 과언이 아 닐 것이다. 이에 대한 다각도의 분석과 검증은 茶山 論語學의 성격을 더욱 명확히 하고 가치를 밝히는데 있어 굳건한 토대를 만들어 줄 것이다. 본고에서는 [質疑 68]에서 [質疑76]에 대해 검토하였다. 그 대강은 다음과 같다. [질의68]은 주자의 仁在心內說을 부정한 것이다. 다산은 여러 저술에서 마음 속에 있는 것은 측은․수오․사양․시비지심이고 理가 밖으로 발현되어 行事에서 이루어 지는 것이 인의예지라고 생각하였다. [질의69]는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의 ‘歸’에 대해 주자가 집주에서 “歸, 猶與也”라고 한 것에 대해 이의를 표시한 것이다. 주자에 의하면 여기서의 ‘歸’는 ‘허여하다’․‘칭찬하다’․‘칭탄하다’ 등의 의미가 된다. 다산에 의하면 ‘歸’는 ‘歸化’ 의 의미가 된다. [질의70]은 주자가 “爲之難, 言之得無訒乎?”의 句에 대한 주자의 풀이가 공자 의 원뜻과 합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다산이 이의를 표시한 것이다. [질의71]은 “膚受之愬”에 대한 주자 注에 이의를 표한 것이다. 주자의 해석에 의하면 “부수지소”는 현재 극심한 고통을 느끼는 것이고, 앞의 “浸潤之譖”은 현 재는 그 현저한 효과가 없으나 서서히 그 효과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다산은 “침윤지참”과 “부수지소” 모두 그 효과가 서서히 드러나는 것으로 종국에는 엄청 난 파국을 낳는 것으로 보았다. [질의72]는 “足食, 足兵, 民信之矣.”에 대한 주자의 주에 다산이 이의를 표한 것이다. 주자는 足食과 足兵이 民信의 선결조건으로 보았다. 그러나 다산은 이 세 가지가 각각 하나의 일로, 서로 연관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질의73] 역시 (12-7)의 “去食. 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에 대한 주자의 주에 동의할 수 없음을 밝힌 것이다. 주자는 임금과 백성이 지배와 피지배라는 수직적 관계를 중시하여 이 구절을 이해하였다. 그러나 다산은 백성과 지도자는 신뢰를 가운데 두고 대등한 관계에서 상호 작용하는 존재로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질의74]는 “惜乎夫子之說君子也駟不及舌”의 句에 대한 주자의 독법에 대해 다산이 이의를 표한 것이다. 주자에 따르면 이 구절의 표점은 “惜乎! 夫子之說, 君子也. 駟不及舌.”이 된다. 다산은 “惜乎夫子之說君子也.”를 9자 一句로 보았 다. 다산에 따르면 표점은 “惜乎! 夫子之說君子也.”가 된다. [질의75]의 논의는 文質論의 일단이다. 경문에 따르면, 극자성은 重質輕文論者 에 속하고 자공은 文質幷重論者에 속한다. 주자는 文質을 本末 관계로 보았기 때 문에 자공의 문질론은 공자의 문질론과 어긋나는 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다산은 자공의 뜻이야말로 공자의 문질론과 일치하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질의76]은 “誠不以富, 亦祗以異.”에 관한 程子의 착간설에 이의를 표한 것이 다. 다산은 정자나 주자처럼 착간으로 보지 않고 본문 가운데서도 단장취의로서의 의미로 충분히 성립되는 것임을 증명하였다.

1813年,時年52歲的茶山完成的論語古今注,在兩千年的論語學史上,不能不說是一部劃時代的卓著。雖然這部書在當時以及後世的影響力不及朱子的論語集注 ,但其研究的深度和考證的力度比起論語集注,可以說是有過之而無不及。多角度的分析和考證將會使“茶山論語學”的脈絡更加清晰,使其價值得到體現。本文即考察了[質疑68]至[質疑76],要點大致如下: [質疑68]否定了朱子的“仁在心內說”。茶山在許多著述中闡述了“心內之物爲惻隱․羞惡․辭讓․是非四端之心, 理發於外成於行事是爲仁義禮智”的觀點。 [質疑69]對朱子在集注中將“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中“歸”的注釋(“歸, 猶與也”)表達了不同見解。根據朱子的解釋,這裏的“歸”帶有“許與”․“稱讚”․“稱歎”的意思. 茶山則認爲“歸”是“歸化”的意思。 [質疑70]認爲朱子對“爲之難,言之得無訒乎?”句節的解釋和孔子的原意不一致,對此表示異議。 [質疑71]對朱子對“膚受之愬”注解持有異議。根據朱子的解釋,“膚受之愬”如切膚之痛可立即覺察,之前的“浸潤之譖”則是慢慢才能感覺出來。但是茶山認爲“浸潤之譖”․“膚受之愬”如典故“病入膏肓”中的病理症狀,二者是由輕入危過程中的階段表現。 [質疑72]對朱子對“足食, 足兵, 民信之矣”的解釋持有異議。朱子把“足食”和“足兵”看做是“民信”的先決條件。但是茶山認爲三者各自爲一,並無聯系。 [質疑73]依然不贊同朱子對“去食. 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12-7) ”的解釋。朱子推崇君主和百姓是統治和被統治的垂直關系,以此來理解這一句節。茶山則從百姓和君主在相互信任的基礎上,是平等的可以相互作用的存在的角度出發來理解。 [質疑74]對“惜乎夫子之說君子也駟不及舌”這一句朱子的讀法表示異議。根據朱子的解釋,這句應斷爲 “惜乎! 夫子之說, 君子也. 駟不及舌”,茶山認爲 “惜乎夫子之說君子也”這9個字是一句,應斷爲 “惜乎! 夫子之說君子也”。 [質疑75]的評議是“文質論”的一部分。根據經文,棘子成屬於“重質輕文論者”,子貢屬於“文質幷重論者”。因爲朱子將“文質”看做是“本末”關系,因此將子貢的“文質論”和孔子的“文質論”看成是相悖的。但是茶山認爲子貢的“文質論”和孔子的“文質論”恰恰是一致的。 [質疑76]對“誠不以富, 亦祗以異”的程子的“錯簡說”表示異議。茶山不像程子․朱子等那樣將其視爲“錯簡”,證明了其即使作爲斷章取義的意思,在文中也可以充分成立。

The Past and Present Annotation of Analects(論語古今注) written by Chung Yak-yong(丁若鏞) which was completed in 1813 is an epochmaking work in the history of researching analects. Though it is true that the Collected Annotations on the Analects(論語集注) written by Zhu-Xi(朱熹) cast a long shadow to us, this work is especially remarkable in the part of ascertaining and elaborating. Therefore, we need to read this work carefully to prepare the ground for understanding Chung Yak-yong. In this paper, I analyzed several discussing articles about Zhu Xi’s opinion from Chung’s writing. I suggest several examples like following. Question No. 68) He denied the theory of ‘benevolence locates in one’s mind’. Chong thought that the four basic senses(the sense of compassion, the sense of shame and disgust, the feeling of humility and deference, and the sense of right and wrong) locate in human mind. And Humaneness, Justice, Propriety, and Wisdom are the manifestation form of those senses. Question No. 69) Chung interpreted the meaning of ‘歸’ as naturalization, while Zhu Xi read it as ‘allowance’, ‘compliment’, and ‘admiration’. This was a kind of objection to Zhu Xi’s opinion. Qusetion No. 72) Chung regarded the King and the people as horizontal relationship, while Zhu Xi thought them as subordiates and superiors.

목차
Ⅰ. 序言
Ⅱ. 本論
Ⅲ. 小結
저자
  • 김언종(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Kim, Eon-j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