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상세보기

高麗末 朝鮮初 京畿道 平澤 西部地域의 城郭 變化 硏究

高麗末 朝鮮初 京畿道 平澤 西部地域の 城郭 變化 硏究

고려말 조선초 경기도 평택 서부지역의 성곽 변화 연구

  • 언어KOR
  • URLhttps://db.koreascholar.com/Article/Detail/272143
구독 기관 인증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7,700원
한국성곽학회 (Korea Fortress Academy)
초록

이 글은 평택지역 토성 중 성벽이 조사 된 琵琶山城, 德睦里城, 龍城里城, 武城山城, 農城을 대상으로 삼았다. 이 지역 토성은 축조방식에서 기저부에 점질토를 조성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차이점은 중심토루를 조성하기 위한 기단석축의 유무와 판축공정 및 구성재료가 토성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기단석축은 비파산성과 덕목리성에서 확인되었다. 이들 성은 판축으로 중심토루를 구성하였다. 비파산성과 덕목리성은 축조방식과 출토유물 등을 통해 보면 통일신라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심토루가 판축이 아닌 경우는 용성리성, 농성, 무성산성 등이었다. 이들 성들은 해자 혹은 내측 구를 파며 나온 토사로 성벽을 축조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중 무성산성은 점토보다는 자갈과 석재를 혼합하여 중심토루를 조성하였다. 비파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되어 광종 대에는 크게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파산성은 거성현의 치소로써 자미산성에서 그 역할을 옮겨온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에서의 비파산성은 자미산성과 무성산성과 더불어 안성천 하구변의 해안방어와 해로교통망 확보를 위해 활용되었다. 덕목리성은 통일신라시기 이 지역에 인구가 집중하면서 축조되었다. 새로운 촌락과 행적적인 거점을 위해 축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동성과 서성으로 토성이 붙어있는 특이한 구조이다. 용성리성은 고려후기에 아산만 일대로 진출한 왜구들로 부터 비파산성을 방비하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후기에는 무성과 자미산성, 용성리성은 남북으로 연계하는 구조로 비파산성을 방비하고 있다. 농성은 고려후기 혹은 조선시대 초기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왜구가 습격해 올 때에만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농성의 구조가 인근주민이 장기간 立保하여 전투를 치르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本稿は平澤地域の土城のなかで城壁が調査された琵琶山城、徳睦里城、龍城里城、武城山城、農城を対象とした。当該地域の土城は築造方式において基底部を粘質土で造成するという共通点がある。しかし、相違点としては中心土塁を造成するための基壇石築の有無、版築工程および構成材料が土城により異なるという点がある。基壇石築は琵琶山城と徳睦里城で確認された。これらの城は版築で中心土塁を構成する。琵琶山城と徳睦里城は築造方式、出土遺物などを通して統一新羅時代に築造されたとみられる。中心土塁が版築でない城は龍城里城、武城山城、農城などである。これらの城は垓字あるいは内側の堀を掘って出た土砂で城壁を築造していたことが判明した。このうち武城山城は粘土よりは砂利と石材で中心土塁を造成している。琵琶山城は統一新羅時代に築造され、高麗の光宗代に大いに活用されたとみられる。琵琶山城は車城県の治所として慈美山城からその役割を移してきたものとみられる。統一新羅時代における琵琶山城は慈美山城と武城山城とともに安城川河口の海岸防御と海路交通網の確保のために活用された。徳睦里城は統一新羅時代、当該地域に人口が集中するとともに築造された。新たな村落と行政的拠点のために築造されたと思われる。そして、東城と西城から土城がなる特異な構造である。龍城里城は高麗後期に牙山湾一帯に進出した倭寇から琵琶山城を守るために築造されたとみられる。高麗時代後期には武城山城、慈美山城、龍城里城は南北につながる構造をとり琵琶山城を防御していた。農城は高麗後期あるいは朝鮮時代初期に築造されたと推定される。倭冦の襲撃のたびに使用されたとみられる。それは農城の構造が、近隣住民が長期間維持し、戦闘するには適していないことから分かる。

목차
Ⅰ. 머리말
Ⅱ. 평택 서부지역의 성곽
 1. 비파산성 2. 덕목리성 3. 용성리성
 4. 무성산성 5. 농성
Ⅲ. 평택 서부지역 성곽의 축조과정
Ⅳ. 고려말 조선초 평택지역의 성곽
Ⅴ. 맺는말
저자
  • 김호준((재)한백매장문화재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