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충주 견학리 토성의 발굴조사 성과를 중심으로 중부지역의 판축 토성에 대해서 살펴본 것이다. 견학리 토성은 낮은 구릉지역의 선단부에 축조된 방형에 가까운 형태이다. 이 토성은 비교적 작은 규모로 판축 공법이 적용되었다. 유적의 편년은 두 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수습된 대부분의 토기편이 9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특징적 양상을 보여주고 있어, 이른바 호족이 발생하던 시기에 경영되다가 고려시대 이후로는 폐기된 토성으로 추정하였다. 이 토성에서는 대체로 30cm를 전후한 척도가 적용되었다고 여겨진다. 그 밖에 9~10세기 경에 축성되었다고 판단되는 중부지역의 판축 토성을 살펴보았다. 이 시기의 판축 토성은 내외에 석축 기단과 4m 내외의 영정주 간격을 가진 특징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크게 2가지의 기능을 가진 것으로 판단하였다. 먼저 주요 교통로상에 조망이 우수한 곳을 택해 방형 또는 방형에 가까운 형태를 취한 경우이다. 이러한 구분에는 견학리 토성을 비롯하여 목천토성, 수촌리 토성이 해당한다. 대체로 주변의 높은 산지에서 연결된 구릉이 평지와 맞닿는 말단부에 방형의 형태로 축조되어 주변의 이동을 관측하기에 매우 용이한 특징을 보인다. 이들 성곽은 驛站과 관련된 시설로 보이는데, 특히 주위에 역원이 존재하고 있어 고려․조선시대에 역원이 자리하기 이전 역참으로 활용되었던 것이 아닐까 추정해 볼 수 있다. 반면 사산성과 신금성의 경우에는 초기 읍성의 모습으로 복원해 볼 수 있었다. 이미 신금성의 보고자는 治所로서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으며, 역사적 배경을 통해 통일신라 말기 혹은 고려 초의 縣城으로 비정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점차 포곡식으로 전환하는 판축 토성은 지방통치의 거점으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권위의 상징으로 규모를 갖춘 문지를 조성하고, 방어적인 요소가 고려되면서 점차 대형화한 것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