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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곽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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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

叢書 18 (2010년 11월)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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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 견훤이 대량과 구사를 공취한 다음에 나아갔다는 진례는 구사가 창원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김해의 진례로 보아야 하며 진례성을 중심으로 하는 호족의 발호는 여러 가지 기록을 검토한 결과 9세기말에서 10세기 초반 경에 있었다고 판단되었다. 또한 진례성주로 기록된 김인광과 소충자와 소율희 등은 당시 진례를 대표하는 권력자로서 대외적으로도 잘 알려진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이들의 세력기반이었던 진례성은 학자들의 의견이 다르기는 하지만 조사결과 진례산성은 조선시대의 석축성으로 확인되었므로 통일신라시대의 진례성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통일신라시대의 진례성은 김해로부터 거리가 부합되며 통일신라시대의 토기가 출토되었고, 그 위치 또한 진례를 기반으로 하는 호족세력이 위치하기에는 적합한 곳이라고 생각되는 송정리토성으로 비정하였다. 그러나 송정리토성은 아직 정식으로 조사된 바가 없어 정확한 축조시기와 성격을 알지 못하는 상황인데 이를 몇몇 출토유물이나 고고역사학적인 상황만으로 비정하는 것은 문제점이 있어 차후 본격적인 조사가 필요하다. 한편 기록에는 김해로 비정되는 금관고성을 匝干 忠至가 공취하여 성주장군이 되었다고 하는데 충지는 진례 출신이므로 진례의 세력이 결국 김해까지 차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신라하대에 선승들은 모두 진례로 가서 김인광, 소충자, 소율희를 보았다고 하였지 김해 금관경에 갔다고는 하지 않았다. 이 점은 결국 진례와 김해의 정치적 성향 또는 역사적 환경이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양동산성은 신라가 김해지역을 정복한 다음 맨 처음 축조한 성으로 알려져 있다. 진례지역과 김해와 진례의 교통로와 진례 중심을 조망할 수 있는 양동산성을 먼저 축조한 것은 신라와 가까운 김해와는 반대세력이 자리하고 있는 진례를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가야시대 김해의 대표세력이 양동고분 축조세력에서 대성동고분 축조세력으로 변하는 것도 이와 같은 김해와 진례의 세력 이동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이는 점도 차후의 연구에서는 진례와 김해의 관계에 대하여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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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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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에 위치한 황산진지 유물산포지는 4대강 살리기 사업의 대상지로 자건거 공원 건설이 예정된 곳이다. 이에 한국물물연구원에서는 2009년 2월~4월 동안 지표조사를 거쳐 2009년 9월~2010년 2월까지 표본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시굴조사에서 확인된 석축유구는 남북으로 총 연장 2.8㎞에 달하였고 이에 2010년 4월~8월까지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본 연구는 이 석축유구의 축조수법과 구조 그리고 성격 규명을 위해 기획되었다. 석축유구가 발견된 지역은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 일원으로 낙동강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형성된 사주로 활주사면에 해당한다. 조사지역의 동쪽은 경부선 철도 너머 배후습지가 발달해 있으며 대규모 시설작물을 재배하는 밭과 논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총 길이가 2.8km에 달하는 석축은 대략 해발 1.6~2.2m 내외의 지형을 편평하게 정지한 갈색 사질점토층 위에 모래를 성토한 후 조성하였으며 1구역에서는 모래성토층 없이 갈색 사질점토충 위에 바로 축조하였다. 잔존하고 있는 석축은 폭 3m 내외, 높이 1.5~1.8m 내외이다. 석축은 증산과 오봉산의 암반을 절개한 할석을 사용하여 축조되었는데 수법은 협축의 허튼층쌓기이다. 석축의 외부 면석에 사용된 돌은 크고 내부는 적심석과 흙을 섞어 쌓았다. 석축유구의 기반부에서 출토된 순청자편과 AD920±} 30년으로 판명된 석축유구의 기반층인 갈색 점질사토층에 대한 OSL 연대측정결과를 참고할 때 석축유구는 대략 11~12세기 즈음에 축조되었다. 단면조사 결과 석축은 한차례 수축을 거쳤으며 14세기 즈음 폐기되었다. 석축유구의 성격은 강변을 따라 일직선으로 뻗어 있고 3구역에서 하도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시설이 추가된 점을 근거로 고려시대 석축제언일 가능성이 언급되었다. 그러나 문헌에 나타나는 물금지역의 군사적 중요성,『동여비고』에 그려진 ‘고장성’의 위치 등을 고려하면 방어시설일 가능성이 짙다. 그러나 방어의 효율성 등을 고려하면 석축유구를 방어시설로 간주하는 데에 의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석축의 정확한 기능은 향후 남겨진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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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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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내동토성은 전라남도 순천시 홍내동에 위치하고 있다. 이 城은 해발 76.1m의 望月山 정상부와 주변의 낮은 봉우리를 연결하여 축성하였고, 내부는 평지와 구릉을 형성하고 있어 平山城으로 분류할 수 있다. 현재 확인된 城의 전체 길이는 1,300m 정도이고, 너비는 하부 9~14m, 상부 2.4~5.6m이며, 토성의 단면은 반원형과 사다리꼴형을 이루고 있다. 확인되지 않는 남쪽부분을 감안하면 城의 전체 길이가 약 2,085m 정도로 추정되는 대규모의 土城이다. 잘 남아 있는 북벽 가운데 2곳을 선정하여 시굴조사한 결과 2가지 축성법으로 축성된 土城으로 밝혀졌다. ‘나’지구는 제1차 순수 판축부와 제2차 판축부로 구성되어 증축되었으며, 제1차 판축부는 순수 판축기법으로 축성되어 백제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제2차 판축부는 내측에 없고 외측에서만 확인되었는데 1차 판축부에서 북쪽으로 약 2.3m 정도 덧대어져 있다. 2차 판축부는 외벽 쪽에만 기단석축이 있는 판축토성이었으며, 통일신라 후기부터 고려 전기에 해당하는 와편들이 많이 출토되어 이 시기에 증축된 것으로 보았다. 이 土城이 있는 낮은 야산을 조선시대에는 ‘海龍山’이라 하였으며, 그곳에 古城이 있다고 하였다. 이 고성이 있는 홍내동에 나말여초 시기 박영규가 君長(豪族)으로 웅거하고 있었다. 朴英規는 나말여초 시기에 順天의 豪族이었다. 그는 후백제의 견훤王 사위와 將軍을 지냈고, 고려 태조인 王建을 도와 후백제를 멸망에 이르게 하여 고려시대에 중용되었다. 처음에 佐丞에 제수되었으며, 후에 三重大匡에 이르렀다. 그의 딸은 왕건과 결혼하여 東山院夫人이 되었고, 이어서 두 딸도 역시 3대 정종의 왕후(文恭王后, 文成王后)가 되었다. 박영규는 후백제와 고려 초기에 왕실과 혼인을 통해 그의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다졌으며, 아울러 그의 본거지였던 순천지역에 대한 장악력도 더욱 높여서 사후에 이 지역의 海龍山神으로 추앙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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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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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충주 견학리 토성의 발굴조사 성과를 중심으로 중부지역의 판축 토성에 대해서 살펴본 것이다. 견학리 토성은 낮은 구릉지역의 선단부에 축조된 방형에 가까운 형태이다. 이 토성은 비교적 작은 규모로 판축 공법이 적용되었다. 유적의 편년은 두 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수습된 대부분의 토기편이 9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특징적 양상을 보여주고 있어, 이른바 호족이 발생하던 시기에 경영되다가 고려시대 이후로는 폐기된 토성으로 추정하였다. 이 토성에서는 대체로 30cm를 전후한 척도가 적용되었다고 여겨진다. 그 밖에 9~10세기 경에 축성되었다고 판단되는 중부지역의 판축 토성을 살펴보았다. 이 시기의 판축 토성은 내외에 석축 기단과 4m 내외의 영정주 간격을 가진 특징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크게 2가지의 기능을 가진 것으로 판단하였다. 먼저 주요 교통로상에 조망이 우수한 곳을 택해 방형 또는 방형에 가까운 형태를 취한 경우이다. 이러한 구분에는 견학리 토성을 비롯하여 목천토성, 수촌리 토성이 해당한다. 대체로 주변의 높은 산지에서 연결된 구릉이 평지와 맞닿는 말단부에 방형의 형태로 축조되어 주변의 이동을 관측하기에 매우 용이한 특징을 보인다. 이들 성곽은 驛站과 관련된 시설로 보이는데, 특히 주위에 역원이 존재하고 있어 고려․조선시대에 역원이 자리하기 이전 역참으로 활용되었던 것이 아닐까 추정해 볼 수 있다. 반면 사산성과 신금성의 경우에는 초기 읍성의 모습으로 복원해 볼 수 있었다. 이미 신금성의 보고자는 治所로서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으며, 역사적 배경을 통해 통일신라 말기 혹은 고려 초의 縣城으로 비정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점차 포곡식으로 전환하는 판축 토성은 지방통치의 거점으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권위의 상징으로 규모를 갖춘 문지를 조성하고, 방어적인 요소가 고려되면서 점차 대형화한 것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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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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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산성은 현재 청원군 문의면에 있는 성터로 축조된 시기가 신라 자비마립간 17년(474)인 신라산성으로 그 중요성이 알려졌다. 양성산성은 현재 남아있는 상태로 보아 석축된 성벽, 曲城, 문터, 水口, 큰못, 遮斷壁, 그리고 건물터가 확인되고 있다. 성벽은 내외겹축을 기본으로 축조한 것으로 보이며, 석축의 기초를 보강하여 축조한 기초보축이라는 독특한 구조가 확인되었다. 또한 양성산성의 문터는 계곡 방향의 좁은 협곡을 이룬 지점에 마련된 것으로 삼년산성의 문터와 유사함을 보인다. 양성산성 성벽에서 확인된 성벽 통과식 수구는 충주산성, 단양 온달산성, 보은 삼년산성, 청주 부모산성, 문경 고모산성 등 신라계 산성에서 주로 보이고 있다. 그러나 입수구와 출수구가 형태가 ‘ㅁ’자 형태이여서 이들 산성들의 수구 형태와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양성산성 내에서 조사된 연못은 원형의 평면형태를 가진 圓池로 확인되었다. 3차에 걸쳐 축조되어 사용된 연못은 수위에 따라 3개 이상의 수구를 이용하여 水位에 따라 배수시키는 특수한 기술이 사용되었다. 산성 내에서 확인된 유물은 신라 토기편 등 삼국시대의 토기편이 일부 수습된다. 유물 중에서 가장 많이 수습되는 것은 9세기대 보편적 유물인 경질 대옹편이다. 이는 豪族과 관련 시기로, 그 시기에 경영된 사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려 초기에서 후기까지의 청자류가 수습되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전반에 걸쳐 이 산성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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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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昧谷山城은 忠淸北道 報恩郡 懷仁面 富壽里 산 443번지 일원에 위치하고 있다. 이 산성은 三國時代에 견고하게 初築된 石築山城으로서 新羅末~高麗初 이 지역의 豪族인 龔直의 活動 根據地로서 지속적으로 經營되었다. 昧谷山城이 위치한 懷仁은 淸州平野의 남쪽을 가로막는 山麓의 매우 험준한 계곡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하지만 이 지역은 중북부에서 嶺南 ․ 湖南地域을 있는 直路로서 地理的으로 삼국시대 이래 중요한 交通의 要衝地이자 軍事的 要衝地로써 後三國時期에 後百濟와 高麗 사이의 國境地帶로 인식되어 歷史地理的 위상이 크다. 昧谷山城은 單郭構\造으로서 각종 지리지의 기록에 따르면 둘레가 1,152尺이고, 높이가 8尺이다. 실측 조사한 길이는 내측의 둘레가 635m이고, 성벽의 높이는 외측의 무너진 부분이 6m 이상이다. 성벽 북쪽과 동쪽의 외향으로 돌출된 角雉 혹은 曲城의 흔적이 50~55m의 간격을 두고 모두 7개소가 배치되어 있음은 특징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昧谷山城은 三國時代 高句麗․百濟․新羅가 쟁탈전을 벌이던 무렵에 축조되었다. 성벽의 축조에 있어서 板石을 이용하여 수직에 가깝게 쌓아올린 점이나 基壇補築 등의 축조기법은 특징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5세기 후반경에 新羅에 의해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新羅末 高麗初에 昧谷山城은 城主將軍 龔直이 강력한 土着勢力을 바탕으로 根據地로 삼고 있었다. 매곡산성에서 출토되는 대표적인 줄무늬병편 등의 유물은 대략 10세기를 전후한 것으로서 주목된다. 羅末麗初의 昧谷山城은 삼국통일 이전의 성곽을 지속적으로 활용하면서 성곽의 立地는 주요 都市의 외곽 혹은 交通의 要衝地에 위치하고 있어 城郭戰術의 큰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城主將軍 龔直은 昧谷山城을 根據地로하여 처음에 甄萱에 歸附하였고, 高麗 太祖 15년(932) 王建에 歸附하여 報恩 ‧ 淸州 ‧ 文義 등 중서부지역의 쟁패에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결정적인 轉機를 마련해주었다.
5,4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