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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곽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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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

叢書 32 (2025년 3월)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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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읍성 체성은 동,서, 북벽은 사직선기단으로 축조되어 있으며 남벽 체성은 수평기단 으로 축조되어 있다. 이 중 남벽 체성은 기저부 조성시 바닥에 판석을 깔아서 그 위에 지대 석과 성석을 축조하는 반면에 동, 서, 북벽 체성은 기반암을 정지하고 그 위에 자갈과 할석 으로 다진 후 할석으로 기저부를 축조하는 차이가 있다. 기장읍성 체성 내벽은 기본적으로 계단식으로 축조하였으며 이후 내탁식으로 개축되었으며, 체성 너비는 초축은 6-7m 사이, 이후 내탁부까지 포함하면 10m 전후에 이른다. 초축 당시부터 외벽기단보축을 설치하였으 며 서벽 체성 일부에서 여장 기단부가 잔존하는 것이 확인된다. 기장읍성에서 확인되는 부대시설은 옹성문지, 치성, 해자, 수로 등이 있다. 이 중 옹성문 지는 기록에는 3개소로 이 중 동문, 남문 2개소가 확인되었다. 반원형 편문식 옹성이 덧대어 져 축조되어 있으며 옹성 규모는 조선 전기 연해읍성에서 확인되는 것과 대동소이 하다. 개구 부 및 성문 너비 역시 3.5m 전후로 성문 평면은 초축에는 체성 육축부 좌우가 돌출한 “┍ ┑” 형 개석식으로 축조되었다가 수축 시 “∥∥”으로 축조되었으며 동, 남문이 동일한 양상이 다. 다만 남문은 기장읍성 정문인 관계로 평지에 설치된 반면 동문은 구릉 정상부에 위치하 고 있어 전체적으로 경사지게 축조되어 있다. 따라서 세종조 연해읍성 축조 시기에는 옹성 체성과 읍성 체성이 같은 너비로 축조되다가 문종조 이후로 갈수록 옹성 체성 너비가 읍성 체성 너비보다 넓어지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기장읍성 옹성은 세종조 년간에 축조가 이루 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기록과도 부합되는 것이다. 기장읍성 치성은 기록에는 6개소로 알려져 있다. 이 중 동벽에서 2개, 동남성우 1개 등 총 3개소가 확인되었다. 세종조 규식으로 정한 150척(70m) 마다 1개소를 설치하는 것에는 부 합하지 않는다. 또한 규모는 당대 규식인 17척×20척 방대형에 부합하는 치성과 적대가 동 벽에서 확인되고 있다. 특히 동벽 적대는 규모에 있어, 동남 치성은 축조수법에 있어 여타 연 해읍성에서 확인되는 치성과 대동소이하여 세종조 년간에 축조된 것으로 파악해 볼 수 있다. 기장읍성 해자는 동, 서, 남벽 바깥에서 모두 확인되고 있다. 이 중 남벽 해자는 체성으로 부터 약 9~12.6m 떨어져 축조되었고, 남문지 옹성 지대석을 기준으로 6.4m정도의 이격 되어 있다. 서벽체성과 해자 이격거리는 약 8~10m 이다. 동벽 체성과 해자 이격거리는 11m로 체성과 문지 주변 해자 이격거리는 1:0.5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기장읍성 해자 역 시 남벽과 서벽, 동벽에서 확인된 이격거리가 9~12.6m, 8~10m, 11m로 여타 경상도 연 해읍성 및 영진보성과 대동소이함을 알 수 있다. 다만 남벽과 서벽 사이 간격차가 1~2m 가 량 확인되고 있다. 기장읍성 서벽 해자 너비는 3~4.6m, 깊이 42~100cm 내외이다. 남벽 해자 너비는 5.5~6m 내외이다. 이 중 남벽 해자는 거제 고현읍성과 웅천읍성 동남벽 해자, 전기 동래읍 성 해자 너비와 유사하거나 일치한다. 이것은 세종 16년(1434)에 축조된 웅천읍성 동북벽 해자는 너비가 7m에 이르는 반면 문종 이후 축조된 것으로 파악되는 동남벽, 남벽 해자 너 비는 5m 전후로 축조되고 있다. 따라서 기장읍성 해자는 문헌기록을 참고하면 문종 1년 이 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남벽 체성 축조수법과 동, 서, 북벽 등 의 축조수법에 차이가 있음에도 참고점이 될 수 있다. 기장읍성 해자 내부에서 확인되는 목 익(木杙)은 극소수가 확인되었다. 남해안 연해읍성 해자에서 확인된 잔존 목익 크기가 50cm에서 1m 전후로 확인되고 있으며 기장읍성에서 확인된 목익 역시 대동소이 하다. 끝으로 기장읍성 내 수로가 확인되었다. 이 수로는 서부천으로 명명된 하천이 통과하는 곳으로 기장읍성 고지도에도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최근 조사결과 추정 입수구와 덮개돌, 수로 호안석축이 중복되어 확인된다. 이 호안석축은 석축방향에 따라 기존 알려진 서부천 복개구역보다 더 남쪽에서 확인되거나 연접하고 있다. 아울러 이 호안석축과 대칭되 는 석축이 확인되고 있어 이것이 기장읍성 초축 성벽과 해자일 가능성과 증개축으로 인한 것인지는 기장읍성 남벽 체성, 해자 초축 및 증개축과 수로 축조 등에 대한 보다 명확한 양 상을 확인 한 후에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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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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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읍성은 둘레 1,527척 규모의 연해읍성(沿海邑城)으로 1425년(세종 7)에 축조되었 다. 현존 기장읍성은 초축 이후 1451년(문종 1)을 전후한 시기에 증축되어 3,197척으로 규 모가 변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시대의 요구에 따라 수축과 증축을 거듭하면서 폐성 된 이후 현재의 모습으로 변모하였다. 그동안 기장읍성의 발굴조사를 통해 600여년 전 이곳에 자리 잡은 기장읍성의 정확한 범위 확인과 잔존 성벽유구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문헌과 고지도, 지적도 등을 통해 유교적 이념에 충실한 전형적인 읍성의 공간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연구성과는 기장읍성과 관련한 문헌기록과 부합하고 있으며, 기장읍성의 축조기법은 임진왜란 직전의 읍성의 축조기법과 이후 읍성의 축조기법의 변화를 알 수 있는 중요한 가치를 지닌 읍성으 로 평가되고 있다. 대부분의 읍성유적은 성벽의 완결성을 강조하여 보기 좋게 복원하려고 하지만 원래의 축 성 모습을 온전히 복원해 내려면 발굴조사 결과를 반영한 정확한 고증의 시간이 필요하다. 기장읍성에서 지금까지 발굴조사 된 성곽 유구는 구간마다 성벽의 축조수법도 차이가 있고 기저부에서 상부까지 남아 있는 성벽도 잔존 부위가 달라 구간별로 성벽의 축조과정과 변천 과 정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시간과 경비를 절감할 수 있는 성곽유적박물관으로 정비하여 다른 읍성유적과 차별화를 도모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기장읍성에 대한 보존과 활용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역사·문화적 환 경에 대한 주민들의 관심과 기장지역이 지닌 역사와 전통을 바로 알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활동을 통해 우리 고장의 역사를 찾아 탐구하면서 기장읍성이 과거 외적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스스로 지키려 했던 선조의 얼과 숨결이 스미어 있음을 느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기장읍성에 대한 이러한 역사에 대한 인식의 출발이야말로 기장읍성의 보존과 활용에 있어 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옥체험관 조성 및 옛길을 중심으로 한 탐방로 개설, 벽 화 및 안내판 정비 등 주민들과 지자체가 합심하여 기장읍성을 가꾸어 나간다면 새로운 역 사문화자산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기장읍성 고유의 성격에 맞는 역사적인 스토 리 및 다양한 성곽 관련 체험프로그램의 지속적인 개발과 활용, AR·VR을 중심으로 한 최 첨단 시스템을 구축하여 다른 읍성과 차별되는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여야 할 것이다. 나 아가 기장읍성을 중심으로 기장의 역사를 보여줄 수 있는 기장읍성 전시관의 건립도 추진되 어야 한다. 이러한 작업들이 기장지역 주변의 역사문화 관광자산과 연계된다면 또 하나의 지역 명소 가 탄생되고 그것의 활용을 통해 다시금 기장의 원도심 지역에 또 다른 활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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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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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막성은 운봉고원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다. 성의 평면 형태는 방형이며 둘레는 635.8m에 이른다. 성벽은 편마암 성돌을 장방형으로 가공한 후 바른층쌓기 방식으로 축조되었으며 협축식 축조기법과 보축성벽, 장방형 집수시설이 확 인되었다. 또한, 현문식 성문과 장방형의 치가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된 유물은 6세기 중엽 이후의 신라 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아막성의 축성 방식은 같은 시기의 가야성과 백제성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가야성 은 주로 할석으로 쌓았으며 정교하게 가공된 장방형 성돌을 사용한 사례는 확인되지 않는 다. 백제성 또한 할석으로 축조된 체성벽과 개거식 성문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백제식 축성 법은 아막성 인근의 임실 성미산성과 순창 대모산성에서도 확인된다. 신라의 석축산성은 5세기 후반부터 등장하며 높은 체성벽과 세장방형 성돌, 협축성벽, 현문, 보축성벽, 곡면 치성 등이 특징이다. 이후 축성기법이 변화하면서 성벽의 높이가 점차 낮아졌으며 성돌의 형태는 장방형으로 변하였다. 7세기 중반에는 편축성벽, 지대석, 가공성 돌, 퇴물림쌓기 방식 등의 축성법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아막성은 6세기 중 엽에 축조된 신라의 산성으로 판단된다. 문헌 기록에 따르면, 신라는 대가야 멸망 이후 빠르게 가야 지역으로 진출하여 아막성을 축조하였다. 입지와 축조 시점을 고려할 때, 현재의 성리산성이 곧 아막성일 가능성이 크다. 이후 아막성은 신라의 행정체계에 편입되어 운봉현의 치소성으로 기능하였으며 운봉성, 또 는 모산성으로 불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는 아막성과 함께 소타성, 외석성, 천산성, 옹잠성 등 네 개의 성을 축조하였다. 운봉 고원 일대의 산성 중 가산리산성, 장교리산성, 양지산성, 할미성에서도 아막성과 유사한 신 라의 축성법이 확인되므로 이들 성이 아막성 전투에서 언급된 4성일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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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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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최근(2020~2023) 발굴된 부소산성 추정 서문지 일원 성벽에 대해 검토한 것이 다. 지금까지 부소산성 성벽 연구는 백제 성벽의 판축 구조물에 집중되었고, 백제~고려시 대 전체 성벽의 변천을 검토해 역사적 의미를 파악하였다. 그러나 부소산에서 가장 중요한 백제 성벽의 구조와 공정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확립되지 못하였다. 이 같은 현황 속에 추정 서문지 일원에서 조사된 포곡식 백제 성벽은 구조와 공정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확보되 었고, 백제 멸망 이후에도 통일신라시대까지 사용된 현황이 새롭게 확인 되었다. 먼저, 포곡식 성벽 조사 결과 백제~통일신라 성벽의 축조 공정과 변화가 확인되었다. “1.포곡식 성벽 백제(1~2단계): 1)기반층 정지–2)기저부 조성층–3)성벽(판축·내외 보 강층)–4)성벽 내외시설(1단계 완료)–5)증축시설(2단계)” → “2.포곡식 성벽 통일신라(3~4 단계): 1)1차증축(3단계)-2)2차증축(4단계)” → “3.포곡식 성벽 페성(5단계)”순이다. 그리고, 백제 성벽의 세부 축조 공정은 “1)기반층(원지반) 정지-2)기저부 조성층–3)성벽 조성(①목주용 내·외 구 굴착 및 목주 등 판축 구조물 설치+②내외부 보강층→③체성 판 축→④판축 구조물 해체 및 설치+내외부 보강층+체성 판축 등 2~3회 반복)→4)성벽 내외 시설(내부 석축 배수로, 외부 구상유구)” 순으로 파악된다. 이를 통해 볼 때 백제 성벽 구조 는 “기저부[1)~2)]–체성부[3)]–성벽 내외시설[4)]” 등으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곡부구간의 2구역 성벽에서 1·2차 기저부층 중간에 ‘목주용 구와 할석 부 석, 석축암거 및 주변 석축, 체성 하부 다짐 및 외벽 일부 석축’ 등을 시설하여 유수 및 침투 수로부터 붕괴를 막기 위한 수준 높은 작업 공정과 기술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3구역 판축 성벽 내외벽면에서 점토+기와로 미장(피복) 처리한 현황이 확인되었고, 이를 통해 백제 토 축 성벽의 내외 벽면 마감 방식에 대한 새로운 기법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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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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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사에서 마립간기는 ‘新羅國王’으로 표방되는 지증왕대 이후 신라 사회의 급격한 성 장과 질적 변화를 추동한 시기이다. 특히 마립간기에 본격화된 영역의 확장은 신라 국가 성 장의 중요한 배경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자비·소지마립간 재위기에는 축성 기록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며 이는 당대 신라의 영역 확장 과정을 잘 보여준다. 신라 중앙의 의지와 계획에 따라 축성된 신라성은 신라의 영역을 실체적으로 파악하는데 유효한 자료이다. 또한 문헌사료에 기록된 성을 현재 남아 있는 성[城址]과 타당하게 일치시킬 수 있다면 신라의 영 역 확장과 그 운영 방식에 대한 더 구체적인 이해가 가능해진다. 자비·소지마립간기의 축성은 앞선 시기 영남권역을 확보한 신라가 소백산맥 일원까지 영역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축성 지역은 한강 (최)상류와 소백산맥 서북부 일원 에 집중되어 당대 신라 영역의 북서쪽 경계[北邊]를 반영한다. 각 성은 기본적으로 확대된 영 역의 방어를 위한 목적으로 축성되었으며 서로 가깝게 위치한 성은 긴밀한 관계를 이루며 일 정 권역의 방어체계를 형성한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몇몇 성은 축성 지역 일원을 신라의 지 방으로 운영하는 거점의 역할[地方據點城]을 병행한 것으로 판단되며, 그러한 축성 목적과 역할에 따라 성의 입지와 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공간의 구성에서 일정한 차이가 나타난다. 5세기 후엽인 신라 자비·소지마립간기 축성의 가장 큰 특징은 石築山城의 본격화이다. 석재를 이용하여 높게 쌓은 체성벽과 이를 보강한 보축성벽, 현문식 성문, 성벽을 돌출시킨 (곡면)치성, 성벽 통과식 수구와 그 안쪽의 집수시설 등 공통적 구조를 갖춘 석축산성은 이 시기에 典型을 이루고 이후의 축성에서 탄력적으로 變容된다. 한편 신라 축성 사업의 원활 한 전개는 축성 지역의 親新羅化를 전제로 가능하다. 축성 지역의 재지세력은 신라 중앙의 축성 의지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자기 안전을 보장받고 발전의 동력으로 삼았다. 신라성에 인접한 대단위 고분군의 조영과 중심 고분의 高塚化가 이를 반영한다. 그러나 신라 중앙의 영향력 투사가 점차 심화되면서 지방의 신라 고분군은 각각 특정한 시점에 조영이 중단되며 이는 신라 지방 운영 방식의 질적 변화를 암시한다. 비교적 짧은 시기 동안 여러 지역에서 진행된 축성은 신라의 인적·물적 자원의 관리와 동원 체계가 상당히 높은 수준에 도달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축성과 같은 국가적 사업 의 수행을 위한 대단위 인력 동원은 신라 사회 구성원의 동질감과 정체성 형성의 주요한 계 기가 되었을 것이다. 나아가 당대 신라 축성의 결과인 보은 삼년산성 등 거대 석축산성은 신 라의 확대된 영역과 내적 역량을 과시하는 표상으로서 역사적 기념물의 의미를 함께 갖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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