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막성은 운봉고원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다. 성의 평면 형태는 방형이며 둘레는 635.8m에 이른다. 성벽은 편마암 성돌을 장방형으로 가공한 후 바른층쌓기 방식으로 축조되었으며 협축식 축조기법과 보축성벽, 장방형 집수시설이 확 인되었다. 또한, 현문식 성문과 장방형의 치가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된 유물은 6세기 중엽 이후의 신라 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아막성의 축성 방식은 같은 시기의 가야성과 백제성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가야성 은 주로 할석으로 쌓았으며 정교하게 가공된 장방형 성돌을 사용한 사례는 확인되지 않는 다. 백제성 또한 할석으로 축조된 체성벽과 개거식 성문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백제식 축성 법은 아막성 인근의 임실 성미산성과 순창 대모산성에서도 확인된다. 신라의 석축산성은 5세기 후반부터 등장하며 높은 체성벽과 세장방형 성돌, 협축성벽, 현문, 보축성벽, 곡면 치성 등이 특징이다. 이후 축성기법이 변화하면서 성벽의 높이가 점차 낮아졌으며 성돌의 형태는 장방형으로 변하였다. 7세기 중반에는 편축성벽, 지대석, 가공성 돌, 퇴물림쌓기 방식 등의 축성법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아막성은 6세기 중 엽에 축조된 신라의 산성으로 판단된다. 문헌 기록에 따르면, 신라는 대가야 멸망 이후 빠르게 가야 지역으로 진출하여 아막성을 축조하였다. 입지와 축조 시점을 고려할 때, 현재의 성리산성이 곧 아막성일 가능성이 크다. 이후 아막성은 신라의 행정체계에 편입되어 운봉현의 치소성으로 기능하였으며 운봉성, 또 는 모산성으로 불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는 아막성과 함께 소타성, 외석성, 천산성, 옹잠성 등 네 개의 성을 축조하였다. 운봉 고원 일대의 산성 중 가산리산성, 장교리산성, 양지산성, 할미성에서도 아막성과 유사한 신 라의 축성법이 확인되므로 이들 성이 아막성 전투에서 언급된 4성일 가능성이 있다.
청주 父母山城은 단면 사다리꼴 모양의 협축식 전면 석축성벽, 편마암계의 성돌을 장방형으로 가공하여 10m 정도 높이로 정교하게 쌓은 체성벽, 높이 4m에 달하는 단면 삼각형의 보축성벽,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성안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만든 懸門式성문 등의 축성기법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축성기법은 5-6세기의 新羅城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지만 동시기의 고구려성이나 백제성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요소 들이다. 부모산성 주변에는 4개의 堡壘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필자는 부모산 정상부에도 보루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작은 성을 확장하여 쌓는 경우는 있지만, 큰 성을 쌓은 후 그 안에 다시 작은 보루를 쌓는 사례는 없기 때문에 이는 父母山城보다 보루가 먼저 축조되었음을 입증하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부모산 일대에 구축된 여러개의 작은 堡壘는 백제가 쌓은 성이며, 父母山城은 6세기 중엽 이 지역으로 진출한 신라가 쌓은 성으로 추정된다. 부모산 제1보루와 학천산성 등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보루는 모두 版築技法으로 토축부를 먼저 쌓고 외벽을 석축으로 마감하는 ‘土芯石築工法’으로 쌓았음이 확인되었다. 토심석축공법은 토성과 석성의 장점을 결합한 축성기법으로서 원래 고구려의 축성기술이었지만 고구려의 남진과정에서 백제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로부터 새로운 축성기술을 받아들인 백제는 6세기 초부터 扶蘇山城의 일부 구간과 부여 나성 등 都城뿐만 아니라 부모산 일대의 보루처럼 국경 지역의 성곽도 전통적인 土城공법 대신 이러한 토심석축공법을 적용하여 石城을 쌓기 시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장성은 5세기 후반 이후 본격적으로 구축되기 시작하는 신라 석축산성의 가장 발전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문무왕12년(672) 신라는 해발 500m가 넘는 남한산에 대규모 산성을 쌓고 당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였다. 당시 신라는 이미 둘레 8km가 넘는산성을 1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쌓을 수 있는 조직력과 기술력을 갖추고 있었다. 성돌도 주변에 있는 편마암 석재가 아니라 최소한 11km 이상 떨어진 원거리에서 운반해온 화강암 성돌을 하나 하나 옥수수알 모양으로 치밀하게 가공하여 쌓았다. 보축(保築)으로 성벽을 보강하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현문식(懸門式) 성문을 만들었으며, 성벽 위에는 돌로 쌓은 평여장(平女墻)을 쌓았다. 당나라와의 장기전에 대비하여 성 내에는 대형 창고를 지어 많은 군량미와 병장기를 비축하였다. 길이 53m가 넘는 대형 건물에는 기와 한장의 무게가 20kg에 달하는 특대형 기와를 사용하였다. 기와 무게로 인한 엄청난 지붕의 하중을 견딜 수 있도록 돌과 흙을 교대로 판축하여 견고하게 대지를 조성하고 벽체는 두께 2m가 넘도록 하여 기둥이 받는 하중을 분산시키는 등 이 대형건물은 당대 최고 수준의 건축기술로 구축되었음이 밝혀졌다. 인조2년(1624) 조선은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남한산성을 수축하였다. 주장성의 옛터를 따라서 성을 쌓고, 주장성 성돌을 재활용하기도 하였지만 현문식 성문을 평문식(平文式)으로 바꾸고, 12개의 암문(暗門)을 새로 만드는 등 남한산성에는 조선중기의 새로운 축성기술이 반영되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화포공격에 대응할 수 있도록 옹성과 포루가 새롭게 구축되었으며 한봉성과 봉암성, 신남성 등의 외성(外城)이 보강되었다. 성돌의 크기도 커지고 돌로 쌓았던 여장도 벽돌과 석회(石灰)로 다시 쌓아 포탄을 맞아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여장을 만들었다. 이처럼 남한산성은 고대의 축성기술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각 시기 축성기술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우리나라 축성기술사의 교과서와 같은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