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父母山城은 단면 사다리꼴 모양의 협축식 전면 석축성벽, 편마암계의 성돌을 장방형으로 가공하여 10m 정도 높이로 정교하게 쌓은 체성벽, 높이 4m에 달하는 단면 삼각형의 보축성벽,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성안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만든 懸門式성문 등의 축성기법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축성기법은 5-6세기의 新羅城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지만 동시기의 고구려성이나 백제성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요소 들이다. 부모산성 주변에는 4개의 堡壘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필자는 부모산 정상부에도 보루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작은 성을 확장하여 쌓는 경우는 있지만, 큰 성을 쌓은 후 그 안에 다시 작은 보루를 쌓는 사례는 없기 때문에 이는 父母山城보다 보루가 먼저 축조되었음을 입증하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부모산 일대에 구축된 여러개의 작은 堡壘는 백제가 쌓은 성이며, 父母山城은 6세기 중엽 이 지역으로 진출한 신라가 쌓은 성으로 추정된다. 부모산 제1보루와 학천산성 등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보루는 모두 版築技法으로 토축부를 먼저 쌓고 외벽을 석축으로 마감하는 ‘土芯石築工法’으로 쌓았음이 확인되었다. 토심석축공법은 토성과 석성의 장점을 결합한 축성기법으로서 원래 고구려의 축성기술이었지만 고구려의 남진과정에서 백제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로부터 새로운 축성기술을 받아들인 백제는 6세기 초부터 扶蘇山城의 일부 구간과 부여 나성 등 都城뿐만 아니라 부모산 일대의 보루처럼 국경 지역의 성곽도 전통적인 土城공법 대신 이러한 토심석축공법을 적용하여 石城을 쌓기 시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장성은 5세기 후반 이후 본격적으로 구축되기 시작하는 신라 석축산성의 가장 발전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문무왕12년(672) 신라는 해발 500m가 넘는 남한산에 대규모 산성을 쌓고 당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였다. 당시 신라는 이미 둘레 8km가 넘는산성을 1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쌓을 수 있는 조직력과 기술력을 갖추고 있었다. 성돌도 주변에 있는 편마암 석재가 아니라 최소한 11km 이상 떨어진 원거리에서 운반해온 화강암 성돌을 하나 하나 옥수수알 모양으로 치밀하게 가공하여 쌓았다. 보축(保築)으로 성벽을 보강하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현문식(懸門式) 성문을 만들었으며, 성벽 위에는 돌로 쌓은 평여장(平女墻)을 쌓았다. 당나라와의 장기전에 대비하여 성 내에는 대형 창고를 지어 많은 군량미와 병장기를 비축하였다. 길이 53m가 넘는 대형 건물에는 기와 한장의 무게가 20kg에 달하는 특대형 기와를 사용하였다. 기와 무게로 인한 엄청난 지붕의 하중을 견딜 수 있도록 돌과 흙을 교대로 판축하여 견고하게 대지를 조성하고 벽체는 두께 2m가 넘도록 하여 기둥이 받는 하중을 분산시키는 등 이 대형건물은 당대 최고 수준의 건축기술로 구축되었음이 밝혀졌다. 인조2년(1624) 조선은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남한산성을 수축하였다. 주장성의 옛터를 따라서 성을 쌓고, 주장성 성돌을 재활용하기도 하였지만 현문식 성문을 평문식(平文式)으로 바꾸고, 12개의 암문(暗門)을 새로 만드는 등 남한산성에는 조선중기의 새로운 축성기술이 반영되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화포공격에 대응할 수 있도록 옹성과 포루가 새롭게 구축되었으며 한봉성과 봉암성, 신남성 등의 외성(外城)이 보강되었다. 성돌의 크기도 커지고 돌로 쌓았던 여장도 벽돌과 석회(石灰)로 다시 쌓아 포탄을 맞아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여장을 만들었다. 이처럼 남한산성은 고대의 축성기술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각 시기 축성기술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우리나라 축성기술사의 교과서와 같은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