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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곽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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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

叢書 21 (2012년 5월) 6

1.
2012.05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신라왕조(BC57∼AD935)는 초기의 느린 발전과정을 극복하고 독특한 성벽을 축조하는 전통을 확립하였다. 5세기 후반에 성립된 새로운 성곽축조의 기법은 이후 6세기 중엽에 낙동강 유역과 한강유역까지 영역이 확대됨에 따라 보급되고, 7세기 후반에는 한반도의 서남부와 이어 북부지역의 옛 고구려 영토 남부 지역으로도 확산되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신라의 산성들은 대략 5세기 후반 독특한 석축 기술에 의한 가장 견고한 구조의 석축성벽의 축조 이외에도, 독특한 양식의 치성, 성벽의 중간을 통과하도록 만든 배수구조, 뿐만 아니라 성문의 바닥 높이를 높이고 출입 차단시설을 이용해 방어력을 향상시킨 독특한 현문양식을 채택하였다. 이 글에서는 현문구조에 대한 중세의 문헌기록부터 확인하기 위해 조선왕조 초기와 고려왕조의 현문과 현교 등의 자료를 검토하였다. 그리고 소급하여 고고학적 자료에 나타난 현문구조의 성문을 유형별로 구분하고, 그 분포양상을 살폈다. 신라의 석축 성벽과 함께 축조된 현문양식은 동일한 형식의 성문이 신라 영역의 전 지역에 걸쳐 선택적으로 채택되어 확산되었다. 그 시기는 6세기 말부터 7세기 전반에 이미 이웃 백제왕국의 변경에도 적용된 사례가 있다. 대략 7세기 후반 삼국통일 이후에는 더욱 분포범위가 확대되어 병합된 지역의 일부에서는 종래의 성문이 현문양식으로 개축되어 사용된 사례들이 조사되었다. 신라에서 성립된 현문양식의 성문구조는 그 변형된 모습이 공간적으로 더욱 확대된 분포로 나타난다. 시간적으로는 신라왕조에 이어 다시 지속된 중세의 고려왕조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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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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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먼저 문무좵신문왕대 축조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주좵소경의 성을 구체적으로 비정하고 그 특징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신라-당 전쟁기에 축조된 漢山州晝長城,國原城(옛 薍長城)은 각각 남한산성과 대림산성에 비정할 수 있었고, 신문왕대에 축조된 주좵소경의 성 역시 평지 시가지 인근의 산성으로 파악하였다. 이들은 입지와 규모로 보았을 때 삼국 시대에는 거의 요구되지 않았던 지방 도시 거주 지배층의 피난성 기능을 염두에 둔 것으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성벽의 양상은 오히려 기존의 거점성에 비하여 정연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는데 따라서 이 시기 성벽 축조의 표준을 보여주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한편 소경의 중심 지역에 나타나는 평지 토성은 신라 말이나 대체로 고려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통일기의 坊구획과 잘 맞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것이 무의미해진 시점에, 상시적인 방어 시설이 필요해진 상황에서 조영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신라-당 전쟁기에 축조된 한산주 주장성이나 국원성(옛 완장성)은 실제로 한산주 및 국원소경에 거주하고 있었던 왕경인들의 장기적인 입보처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전쟁의 위협이 사라지면서 다시 평지를 중심으로 시가지가 정비되었을 것인데, 한산주의 경우에는 8세기에 들어 기존의 거점성인 이성산성이 새로이 정비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국원소경의 경우에는 현 충주시내에 새로운 시가지가 조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만 한산주에서는 9세기에 들어 이성산성보다는 다시 남한산성이 활성화되는 양상이 나타나며, 그보다 늦은 시기에 국원소경에서는 평지 시가지를 둘러싼 부정형의 토성이 조영된 것으로 보인다.
5,700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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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에의하면신라文武王13년(673) 9월에 둘레 2,592보의 국원성(國原城)을 쌓았다고 하였다. 국원성 추정지는 지금의 충주 중심부 외곽 사직산∼만리산∼충주 성심학교를 연하는 구릉성 능선과 평지를 에워쌓은 외성(外城)이 말각정방형(抹角正方形)으로 둘레가 약 6km 의 흔적을 남기고 있고, 그 안쪽의 내성(內城)은 조선후기까지 경영된 충주읍성터가 위치하고 있어 이중복곽(二重複郭)의 나성구조(羅城構造)이다. 외성의 한 변의 폭은 대략 1.6km 정도로서 남북 중심축이 약 48° 정도 서향하고 있는데, 이는 주변의 자연지형을 활용하여 계획적인 구상을 하여 축조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성터의 입지는 성곽의 규모가 크면서 북쪽의 남한강(南漢江)과 서쪽의 달천(達川) 사이에 위치하고, 전면에 하천을 끼고 뒤에 산을 배경으로 하여 축조되고, 낮은 구릉을 배경으로 축조되어 있음은 한국의 다른 읍성(邑城)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 성터는 당초 신라가 이 지역을 장악하면서 국원성이라는 큰 성을 쌓아 중원경(中原京)의 치소(治所)로서 기능하였다고 여겨지며, 이 성터는 고려시대(高麗時代) 충주성(忠州城)으로서 기능(機能)하여 고려후기 몽고침입기(蒙古侵入期)를 즈음하여 대대적인 개축(改築)이 이루어졌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 방치되고 내성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개축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성터는 충주의 사직산 서쪽 사면 구간과 만리산 동쪽 구간 능선 외연(外緣)에 잔존하는 성벽 구조가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만리산 구간 토루 주변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은 대략 6세기 중엽에서 7세기 때의 신라계 산성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기와편으로서 인접한 충주산성에서 출토된 것들과 같은 유형의 유물이며 내성에서도 출토되고 있어 국원성의 축조(築造)와 관련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신라의 국원지역 대한 성곽 경영(經營)은 진흥왕 때에 먼저 남쪽의 충주산성(忠州山城) 및 평지에 작은 읍성(邑城)을 먼저 축조하고, 이후에 외곽에 대규모 평지성을 축조한 것이다. 이 성터의 구조가 평지에 대규모 방형(方形)의 이중복곽구조 성곽(二重複郭構造城郭)을 이루고 있으면서 배후(背後)에 산성을 두고 있음은 같은 시기의 다른 지역 도시성곽과 차이라고 할 수 있으며, 보다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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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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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경남지역 통일신라시대 토성 중 시굴 및 발굴조사와 발표자가 지표조사상에서 확인된 성곽을 중심으로 이 시기 토성의 특징과 축조주체 및 목적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제까지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통일신라시대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시기 경남지역은 이전 시기와 달리 왜구의 방어를 중점을 둔 축성이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양상은 조선시대까지 변함없이 이어졌다. 통일신라시대 토성의 특징 중 가장 두르러지는 것은 해안가에 집중적인 축성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안정적인 해로의 통제와 대 왜구 방어에 중점을 둔 축성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리고 토성의 규모는 길이900∼2,000m 사이의 토성들이 바닷가와 내륙 등 다양한 위치에 축조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길이 약 900∼2,000m 사이의 토성들이 주로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경남지역 통일신라시대 토성들은 모두 내․외벽 기저부에 기단석렬을 배치한 뒤 성벽을 쌓았다. 기단석렬은 평행한 것과 사직선을 이루는 것으로 나누어지지만 시기성을 적극적으로 반영하지는 못한다. 또한 영정주 간격 역시 정형성을 찾기 힘들 정도로 다양하다. 주목되는 점은 기존에 알려진 것과 달리 영정주를 중심으로 좌․우의 판축토가 동일한 것과 판이하게 다른 것으로 나누어지는데 판축토가 달라지는 양 끝부분을 한 구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것이다. 토성벽의 내․외부 퇴적토에서 출토되는 다량의 기와편들은 성벽의 구조를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는 가정하에 4가지 정도의 가능성을 검토해 본 결과 와적여장 및 성벽 상부 덮을 때 사용하는 개와였음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 토성의 축조주체는 신라사회의 변화 궤를 같이하므로 축조주체 역시 변하였을 것이다. 즉 삼국통일 후에서 9C 전반에서 중반 정도까지는 중앙 정부의 영향력이 강하였다고 생각된다. 그 이후 호족들의 세력이 커지는 9C 후반에서 10C 초반에는 새로운 토성을 축성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기존의 토성을 최대한 활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토성들은 고려시대 초 조운제가 운영되면서 최대한 활용되었으며, 토성이 축조되어 있지 않은 지역은 새로운 축성을 통하여 안정적으로 해로를 통제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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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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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성은 5세기 후반 이후 본격적으로 구축되기 시작하는 신라 석축산성의 가장 발전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문무왕12년(672) 신라는 해발 500m가 넘는 남한산에 대규모 산성을 쌓고 당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였다. 당시 신라는 이미 둘레 8km가 넘는산성을 1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쌓을 수 있는 조직력과 기술력을 갖추고 있었다. 성돌도 주변에 있는 편마암 석재가 아니라 최소한 11km 이상 떨어진 원거리에서 운반해온 화강암 성돌을 하나 하나 옥수수알 모양으로 치밀하게 가공하여 쌓았다. 보축(保築)으로 성벽을 보강하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현문식(懸門式) 성문을 만들었으며, 성벽 위에는 돌로 쌓은 평여장(平女墻)을 쌓았다. 당나라와의 장기전에 대비하여 성 내에는 대형 창고를 지어 많은 군량미와 병장기를 비축하였다. 길이 53m가 넘는 대형 건물에는 기와 한장의 무게가 20kg에 달하는 특대형 기와를 사용하였다. 기와 무게로 인한 엄청난 지붕의 하중을 견딜 수 있도록 돌과 흙을 교대로 판축하여 견고하게 대지를 조성하고 벽체는 두께 2m가 넘도록 하여 기둥이 받는 하중을 분산시키는 등 이 대형건물은 당대 최고 수준의 건축기술로 구축되었음이 밝혀졌다. 인조2년(1624) 조선은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남한산성을 수축하였다. 주장성의 옛터를 따라서 성을 쌓고, 주장성 성돌을 재활용하기도 하였지만 현문식 성문을 평문식(平文式)으로 바꾸고, 12개의 암문(暗門)을 새로 만드는 등 남한산성에는 조선중기의 새로운 축성기술이 반영되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화포공격에 대응할 수 있도록 옹성과 포루가 새롭게 구축되었으며 한봉성과 봉암성, 신남성 등의 외성(外城)이 보강되었다. 성돌의 크기도 커지고 돌로 쌓았던 여장도 벽돌과 석회(石灰)로 다시 쌓아 포탄을 맞아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여장을 만들었다. 이처럼 남한산성은 고대의 축성기술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각 시기 축성기술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우리나라 축성기술사의 교과서와 같은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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