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양읍성 북문주변 성곽정비사업 일환으로 발굴조사한 지역에서 체성, 북문지와 옹성 1개소, 치성 2개소, 성 외측에 전체적으로 조성된 해자, 수혈유구 등 다양한 유구가 조사되었다. 이번 발굴조사에서 북문지와 옹성의 구조, 체성부와 치성의 축조방법, 규모 등이 명확하게 확인되었다. 특히 체성의 축조방법에 있어서 내벽의 경우 계단식 축조수법이 아닌 내탁부와 성 안쪽과 내벽 내탁부를 구분하는 경계석열이 확인된 것이 가장 큰 성과이다. 해자의 평면형태, 규모, 내부시설을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으며, 또한 체성, 치성, 옹성과의 축조에 있어서 선후관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즉 체성과 치성은 동시기에 축조되었으며, 북문지의 옹성은 체성보다 늦은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조사지역에서 해발고도가 가장 높은 북서쪽 모서리에서 암거시설 형태의 입수구가 확인되었다. 그리고 해자와 만나는 구상유구가 확인되었는데, 입지조건, 내부시설 등으로 볼 때 해자쪽으로 물을 공급하는 용도의 구로 생각된다. 언양읍성은 문헌에서 확인된 읍성(석성)의 축조시기(1500년)와 이번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자기류, 기와류)의 편년을 비교해 볼 때 연대가 비교적 일치하는 것으로 생각되며, 이번 발굴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북문주변 성곽 정비복원 시에 문헌자료와 함께 고고학 자료를 검토, 보완하여 정확한 정비복원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 진하해수욕장 서편 야산 구릉에 위치한 서생포왜성(西生浦倭城)은 임진왜란 시기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 의해 축성되었다. 서생포왜성은 남․동해안 각지에 현존하는 30여개의 왜성 가운데 보존상태가 가장 뛰어나 왜성 연구의 최적지가 되고 있으며 임란 중 사명대사가 가토 기요마사와 4차례에 걸친 평화교섭을 진행하여 많은 외교적 성과를 거둔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임진왜란 직후부터 1895년까지 약 300년 동안 조선 수군(水軍)의 동첨절제사영(同僉節制使營)으로 사용되었기에 근세기 한일간 축성법의 비교연구뿐만 아니라 성곽이용방식에 대한 상호 고찰도 가능하다. 이에 본 연구는 지금까지 주로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연구가 진행되었던 서생포왜성에 대한 조사연구를 진행함으로써 일차적으로는 왜성의 성곽구조와 체성 축조기법상의 특성을 밝히고 이차적으로 한국성곽과의 비교연구를 위한 기초 자료를 제공하고자 하였다. 연구방법으로는 일차적으로 문헌조사를 실시하고 이를 토대로 현장실측조사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입지 및 평면형태, 성곽 내부의 공간구조, 虎口와 해자 등의 방어시설물, 체성 및 隅角部축조수법, 성벽의 기울기 등 서생포왜성의 제반 특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본고는 울주군에 소재하는 연변․내지봉수의 현황과 특징을 고찰한 글이다. 울주군에는 총 4기의 봉수가 소재한다. 이들 봉수의 設置目的은 여말선초 동남해안 지역으로 극심한 침입을 하였던 왜구의 방어 목적에서 축조되었다. 初築時期는 조선 전기 이전의 연변봉수 2기와, 조선 전기 축조의 내지봉수 2기로 구분된다. 路線과 性格上제2거 직봉의 내지봉수 2기와 제2거 간봉(1)의 연변봉수 2기로 구분된다. 따라서 동일 지역임에도 각기 다른 2기 노선의 봉수가 지나는 곳이었다. 봉수의 설치목적과 초축시기가 성격에 따라 다르며 노선이 다른 만큼 구조․형태적으로도 다양한 특성을 보인다. 즉, 연변봉수 2기는 거화시설인 연대를 공통적으로 갖추고 있으며 방호시설인 방호벽과 호가 이길봉수에서 확인된다. 내지봉수 2기는 방호벽을 공통적으로 갖추고 있으며 거화시설인 연조가 부로산봉수에서 유일하게 확인된다. 海拔高度또한 차이가 뚜렷한데, 전체적으로 100~400m이내의 높이에 위치한다. 울주군 소재 4기 봉수의 평균 해발높이는 222m이다. 세부적으로 직봉 2기 내지봉수의 평균 해발높이는 317m이며, 간봉(1) 2기 연변봉수의 평균 해발높이는 126m이다. 對應烽燧간 距離는 직봉의 2기 내지봉수 대응거리가 평균 12.75km인 반면, 간봉(1)의 2기 연변봉수 대응거리는 평균 5.5km이다. 아울러 울주군 소재 4기 봉수의 전체 평균거리는 9.1km로서 10km이내의 근거리에서 상호 대응하였다. 築造形態는 하산봉수를 제외한 3기 모두 석축이다.
본고는 하동 두우산에 소재하는 봉수에 대한 소개글이다. 하동군 금성면 두우산 정상부에서 확인된 봉수 3기는 남-북 능선을 따라 위치하며, 추정 건물지 1기도 함께 확인되었다. 특이한 것은 봉수의 구조ㆍ형태가 각각 다르다. 이들 중 연대(煙臺)형 봉수를 추정 계화산봉수(1호 봉수), 방호벽 내부가 빈 평면 원형의 봉수를 두우산봉수1(2호 봉수), 두우산봉수2(봉수 3호)라 명명하였다. 1호 봉수는 방호벽이 확인되지 않고 연대만 확인된다. 연대의 평면형태는 타원형이다. 1호 봉수 주변에서는 채석지와 음각으로 새겨진 劍모양이 확인된다. 이 검모양은 당시 봉수군이 휴대하고 다녔던 고리칼(還刀)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두우산 정상부 쪽에서 1호 봉수와 관련된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추정 건물지 담장석축 주변으로 우물로 추정되는 석축 2기와 말굽형 석축, 채전지로 추정되는 석축 3기가 확인된다. 2호 봉수의 평면형태는 중앙이 비어있는 도넛형태로 축조된 것이 특징적이다. 봉수대는 방호벽, 방호벽 내 배수시설로 추정되는 호와 출입시설, 석곽형태로 조성된 추정 창고시설 등이 확인된다. 봉수 3호는 1호 봉수와 2호에 비해 훼손이 심해 정확한 구조를 알 수 없지만, 연대의 북동쪽과 남서쪽에서 가공한 석재의 면을 맞추어 놓은 석렬이 확인되어 관련 시설로 추정된다. 본고에서는 그동안 봉수의 조사사례가 미흡했던 하동지역 봉수의 형태, 규모, 구조등을 파악하는데 치중하였다. 향후 대상 지역 봉수의 정밀한 조사와 기능적 접근을 통해 봉수의 통시적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사료된다.
읍성은 조선시대 500여 년간 각 지역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일제강점기와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대다수가 해체․철거되었다. 이미 많은 읍성이 사라졌지만, 고려 공양왕 2년(1390)에 토성으로 처음 축조되어 조선시대 연산군 6년(1500)에 석성으로 개축되었던 언양읍성은 일제강점기에 남천(현재의 태화강)의 제방 축조를 위하여 동남쪽 일부 성벽이 훼철된 것을 제외하고는 현재까지 비교적 양호한 보존상태를 유지해 오고 있다. 특히 언양읍성의 남문지는 2002년 도로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발굴조사가 수행되었고, 근현대기의 건물 아래에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잔존하고 있던 남문지의 전체적인 구조가 확인되었기 때문에 원형 복원의 가능성이 그 어느 부분보다도 높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복원이 이루어진다면, 상징성이나 파급효과, 역사․교육적 활용도 및 도시경관 개선, 관광자원으로서의 가치재고 측면에서 큰 기여를 할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남문에 대한 건축적인 측면에서의 고증작업이나 복원적 연구는 미흡한 실정이었다. 본 연구는 언양읍성의 정문이었던 남문(영화루)에 대한 복원적 연구를 진행하여 지금까지 연구가 미진하였던 언양읍성의 문루건축의 건축적 특성을 규명함으로써 복원에 대한 기초 자료를 제공하는데 목적이 있다. 연구 결과 조선시대 조영되었던 언양읍성 남문 일곽은 전면에 반원형의 옹성을 두른 개거식의 성문이었으며, 그 문루인 영화루는 중층(2층) 5량가구에 초익공을 둔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