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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곽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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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

叢書 23 (2013년 5월) 3

1.
2013.05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강원지방에 분포한 중세성곽의 현황과 현재까지 고고학적 조사가 진행된 성곽을 중심으로 문헌기록과 연결하여 강원지방 성곽의 특징을 분석하는데 이 글의 목적이있다. 본고에서 다루는 성곽들은 중세에 신축되거나 수·개축된 성곽을 중심으로 하였으며, 정밀지표조사보고서나 발굴조사가 진행되어 보고서 등이 발간된 성곽을 중심으로 그 현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강원지방은 태백산맥이라는 자연적 경계로 영동지역과 영서지역으로 나눠 볼 수 있다. 단순비교이나 면적상으로 영동지역이 영서지역보다 작은 편이다. 그러나 성곽의 분포수에 있어서는 거의 비등하다. 다시 말해 이는 고려시대 동계로 편입되었던 영동지역은 군사적 목적이 강하고 그에 따라 성곽의 밀집도가 높은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영동지역은 현재까지 진행된 발굴조사나『高麗史』등과 같은 기록으로 볼 때 고려시대 초기부터 해안으로부터의 이민족 침입이 자주 일어났다. 그에 따라 해안성들이 축조되고, 해안성이나 주변 성곽을 통제할 수 있는 거점의 역할을 수행하는 읍성들이 축조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육지를 통해 몽고의 침입이 있었고, 해안을 통해 왜의 침입이 증가함에 따라 험악한 산중에 입보용산성이 축성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것은 전쟁양상과도 관련이 있으며, 점령이 아닌 약탈의 의미가 큰 것으로 생각된다. 영서지역은 문헌이나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아직까지 읍성이나 평지성, 평산성이 조사된 사례가 없다. 현재까지 조사된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운영되던 테뫼식산성을 수축하여 사용하고 몽고의 침입과 더불어 영동지역과 마찬가지로 주변에 대규모의 포곡식산성을 축성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상에서 중세 강원지방 성곽의 시기적 변천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그러나 성곽의 정확한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 발굴조사가 필요하지만 아직까지 발굴조사가 이뤄진 성곽은 많지 않다. 또한 정밀지표조사가 실시되어 70여개소에 달하는 중세성곽에 대한 정확한 현황이 필요한 실정이다. 따라서 앞으로 더 많은 자료가 축적되고 더 많은 연구가 진행된다면 본고는 수정되고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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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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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산성에 대해서는 그간 정확한 규모나 상성, 하성의 구조와 접근로, 기타 내부 건물지나 부대시설물지에 대한 현황이 분명하게 파악되지 못하였는데, 지난 2010년부터 필자가 조사하여 새롭게 확인된 사항은 대략 다섯가지이다. 첫째는 상성과 하성의 구분이 명확하게 확정되었다는 점이다. 종래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는 바, 상성(上城)과 하성(下城)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구분이 분명하지 않아 막연하게 천제단 근처가 상성이라고만 여겨져 왔으나 이번 조사에서 상성의 구조와 위치가 명확해 지게 되었다. 둘째는 하성의 새로운 건물지가 확인되었다는 점이다. 기존에 하성내에서는 계곡부 동측에서만 건물지가 확인되었으나 이번 조사에서 그 계곡 반대편에도 여러 건물지와 바위그늘 주거지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셋째는 상성내에서 새로운 유물 출토지를 찾았다는 점이다. 기존에 상성내에서의 유물은 대부분 대궐터에서 수습되었으나 이번 조사에서 여러 곳에서 새로운 유물이 채집되었다. 넷째는 산성 원성(元城)과 별개로 축조된 돈후(墩堠) 시설물이 2개 지점에서 확인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교통로에 대한 근접 감시는 물론 일시적인 차단을 통한 지연전을 전개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다섯째는 산성으로의 다섯가지 출입로가 정확하게 파악되었다는 점이다. 산성의 운용과 관련하여 출입로 파악은 매우 중요한 사항인 바, 이번 연구를 통하여 산성으로의 접근로가 명확하게 파악되게 되었다. 한계산성은 초축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려사(高麗史)에 기록되어 중세시기 활용에 대한 명확한 역사기록을 가지고 있다. 특히 대몽항전(對蒙抗戰)의 마지막 단계에서 승전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1259년(고종 46) 몽고에 투항한 조휘 일당이 몽고 군사를 끌고 와서 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점령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산성을 지키고 있던 방호별감(防護別監) 안홍민(安洪敏)이 야별초군(夜別抄軍)를 거느리고 나아가 습격해 모두 섬멸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중부내륙 지역이 몽고의 약탈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이 전투에서 승전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 공민왕 당시 반원정책을 추진하면서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자 한계산성을 확장하면서 크게 개축한 것은 바로 대몽고전에서 승전하였다고 하는 사실과 직접 관련이 있다. 그러한 역사적 의미 뿐만 아니라 한계산성은 중세시기 험지위주 산성의 전형적인 사례로, 성곽의 확장, 별설의 돈후(墩堠) 시설물 축조 등 중세 산성의 특징적인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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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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寒溪山城내 天祭壇은 城郭내에 위치한 祭祀遺蹟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다른 지역 산성 내 제사 유적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본 결과 제사 유적이 위치한 곳은 산성 내부, 특히 建物址가 있는 곳과 가까우면서 내부를 잘 볼 수 있으며, 산성외부의 하천이나 주요 교통로 등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다. 寒溪山城내 天祭壇과 가까운 곳에 대궐터라 불리우는 곳에 주거 유적이 발견되었다는 점과 그 주변에서 발견된 土器片은 山城을 유지하였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祭壇으로 기능하였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그리고 한계산성 내 천제단의 명문을 보면 仙○○, 道君子, 上帝, 佛者등 仙思想과 道敎, 佛敎思想이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천제단에 새겨진 명문 내 인물들이 고려시대에 활동한 인물이라면 당시 이와 같은 사상 경향을 국가나 민간 차원에서 수용하여, 祭儀를 행하였음은 醮祭나 八聖堂을 설치한 사례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한계산성을 고려시대에 주로 사용하였다는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종합해 보면 고려시대에 한계산성 내에서 하늘에 제사지내기 위해 설치하였던 天祭壇이었을 가능성도 고려해 볼 수 있다. 또한 한계산성이 관방유적으로서의 기능을 廢한 후 祭壇또한 방치되었다가 이곳을 거점으로 仙思想과 道敎, 佛敎가 習合된 新宗敎를 만든 사람들이 이곳을 하늘에 제사지내는 제단으로 활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공동체를 위한 제단을 설치하는 곳이 마을이나 주변 경관을 잘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설치된 사례가 많으며, 太白山天祭壇이나 삼척 가곡산 봉수ㆍ양야산 봉수의 民間信仰處所化사례 등을 통해 과거에 국가 제장이었거나, 관방 유적이었던 곳이 그 본래의 기능을 廢한 후 新宗敎나 民間信仰의 처소로 활용된 사례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이전의 종교 기능을 廢하더라도 이후에 만들어지는 종교 제장은 이전에 종교 제장이었던 곳에 그들의 祭場을 설치한 사례 또한 많다. 이와 함께 한계산성 천제단이 지닌 가치는 하늘에 제사를 지낸 聖所였다는 점과 산성 유적 내에 제사를 지낸 장소의 위치적 특징이 산성 내부와 외부를 잘 조망할 수 있는 곳이면서 주변에 건물 유적이 있는 곳에 위치한다는 점을 정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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