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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울릉도 수토에 관한 연구는 다양한 방면에서 진행되어 왔다. 우선은 조선후기 울릉도 搜討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대한 현황의 사실 관계와 제도적 정착에 대한 연구를 비롯하여 울진 지역의 수토 관련 越松浦鎭城과 待風軒 등에 대한 연구, 그리고 수토사가 그려 온 울릉도 지도 및 대풍헌 현판 등 자료에 대한 연구나 사료에 대한 해제 등도 있으나 수토사와 관련하여 포괄적인 측면에서의 관련 유적에 대한 연구는 없었다. 본 논문에서는 여러 기록을 통하여 수토사 관련한 유적지를 연구하였다. 삼척지역에 소재하는 울릉도 수토 관련 유적지는 삼척 수군 관련 유적지, 수토 수행과정에서의 대풍소나 祭儀 神堂, 수토에 참여한 인물 관련 유적지, 기타 관련 유적지가 있는데 이를 각각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삼척수군진이 설치되어 있던 삼척포진과 관련된 유적지인데, 이와 관련하 여서는 軍船을 정박시키는 포구였던 삼척포와 수군의 각종 장비와 물자를 보관하 고 첨사가 군관을 거느리고 주둔하였던 삼척포진성이 그 핵심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유적에 대한 조사에서 수군진성의 하부가 지하에 매립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된 바 있다. 둘째는 삼척에서 울릉도로 항해하는 과정과 관련된 유적이다. 삼척에서 출발하는 수토군들은 먼저 모든 장비를 갖추고 營下에서 바람을 기다리다가 적당한 바 람이 불 때 바다로 나가서 출발하였는데, 이 때 바람을 기다리는 대풍소와 안전 항해를 기원하는 여러 가지 제사를 곳이 있었다. 특히 1872년에 만들어진 지방지도의 삼척부 지도를 보면 삼척수군진성으로부터 오십천 건너편 고성산(오화리산성이 있는 곳) 근처에 붉은 선 안에“東海”라고 표시해 놓은 것이 있는데 이곳이 동해신제를 지낸 곳으로 추정된다. 세 번째 삼척의 수토 관련 유적으로는 후망소, 수토사 인물 유적, 울릉도 유적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울릉도 수토가 실시되는 동안 바닷가에 위치한 마을에서는 임시의 거처를 만들고 바다를 감시해야 했는데, 그러한 후망소가 어느 곳에 설치되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체로는 울릉도에서 돌아오는 선박이 표류할 경우 동해안 지역에서 도달할 가능성이 있는 곳에 설치되었을 것이며, 대풍소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척후가 있었다고 하는 삼척의 藏吾里浦(근덕면 장호리), 그리고 『陟 州志』(上)에 바닷가의 망대인 海汀候望으로 기록된 介谷, 宮村, 馬頭, 窟岩, 龍場 이 그와 관련된 곳일 가능성이 크다. 아을러 고려시대에 삼척 지역에 설치된 戍所 인 桐津戍․臨遠戍가 있던 곳도 바다를 감시하고 방어하는 중요한 요충지였으므로 이곳도 후망 장소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수토를 수행한 인물과 관련된 유적지(혹은 유물)는 삼척지역에서 현재 뚜렷하게 확인되는 곳이 없다. 삼척영장으로 울릉도 수토를 수행한 장한상은 경북 의성에 묘가 있고, 이준명은 경기도 성남시에 묘가 있으며, 구억은 충남 공주에 묘가 있다. 여타의 수토를 수행한 것으로 확인된 삼척첨사의 관련 유적은 확인되지 않으며, 육향산에 있는 삼척영장송덕비 가운데 울릉도 수토를 수행한 삼척영장 송덕비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월송포 만호가 수토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월송만호의 上官은 삼척영장이었기 때문에 삼척영장송덕비 자체는 관련 유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조선전기에 울릉도를 세 번씩이나 왕래하며 수토 임무를 행한 삼척사람 김인우의 유적은 앞으로 확인될 가능성이 있는 바, 향후 적극적으로 자료를 발굴하여 선양할 필요가 있다. 이외에도 울릉도에 소재하는 수토 관련 암각문이나 표석, 김인우와 관련된 태하리 성하신당 등도 관련 유적지에 해당하나 본 논고에서는 삼척지역에 소재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였으므로 여기서는 다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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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3.05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한계산성에 대해서는 그간 정확한 규모나 상성, 하성의 구조와 접근로, 기타 내부 건물지나 부대시설물지에 대한 현황이 분명하게 파악되지 못하였는데, 지난 2010년부터 필자가 조사하여 새롭게 확인된 사항은 대략 다섯가지이다. 첫째는 상성과 하성의 구분이 명확하게 확정되었다는 점이다. 종래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는 바, 상성(上城)과 하성(下城)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구분이 분명하지 않아 막연하게 천제단 근처가 상성이라고만 여겨져 왔으나 이번 조사에서 상성의 구조와 위치가 명확해 지게 되었다. 둘째는 하성의 새로운 건물지가 확인되었다는 점이다. 기존에 하성내에서는 계곡부 동측에서만 건물지가 확인되었으나 이번 조사에서 그 계곡 반대편에도 여러 건물지와 바위그늘 주거지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셋째는 상성내에서 새로운 유물 출토지를 찾았다는 점이다. 기존에 상성내에서의 유물은 대부분 대궐터에서 수습되었으나 이번 조사에서 여러 곳에서 새로운 유물이 채집되었다. 넷째는 산성 원성(元城)과 별개로 축조된 돈후(墩堠) 시설물이 2개 지점에서 확인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교통로에 대한 근접 감시는 물론 일시적인 차단을 통한 지연전을 전개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다섯째는 산성으로의 다섯가지 출입로가 정확하게 파악되었다는 점이다. 산성의 운용과 관련하여 출입로 파악은 매우 중요한 사항인 바, 이번 연구를 통하여 산성으로의 접근로가 명확하게 파악되게 되었다. 한계산성은 초축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려사(高麗史)에 기록되어 중세시기 활용에 대한 명확한 역사기록을 가지고 있다. 특히 대몽항전(對蒙抗戰)의 마지막 단계에서 승전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1259년(고종 46) 몽고에 투항한 조휘 일당이 몽고 군사를 끌고 와서 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점령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산성을 지키고 있던 방호별감(防護別監) 안홍민(安洪敏)이 야별초군(夜別抄軍)를 거느리고 나아가 습격해 모두 섬멸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중부내륙 지역이 몽고의 약탈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이 전투에서 승전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 공민왕 당시 반원정책을 추진하면서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자 한계산성을 확장하면서 크게 개축한 것은 바로 대몽고전에서 승전하였다고 하는 사실과 직접 관련이 있다. 그러한 역사적 의미 뿐만 아니라 한계산성은 중세시기 험지위주 산성의 전형적인 사례로, 성곽의 확장, 별설의 돈후(墩堠) 시설물 축조 등 중세 산성의 특징적인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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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0.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전근대 시대의 군사활동이나 방어에 있어서 성곽이라고 하는 존재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대부분의 전투가 攻城이나 守城戰이라는 것에서도 그러한 상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전쟁이 상시화된 삼국시대의 경우 수많은 성곽이 건설되고 또 폐기되었다. 삼척지역에 소재하는 성곽유적에 대한 조사나 연구가 있었으나 아직 명확하게 성격이 밝혀지지 않은 유적도 있고 또 문헌기록에는 나타나지만 그 위치조차 전혀 알 수 없는 것도 있다. 본 연구에서는 여러 史書에 기록되어 있거나 유적으로 남아있는 삼척지역의 성곽과 수군 유적에 대한 역사고고학적 연구를 통하여 삼국 시대 신라의 여러 군사적 활동과 관련하여 그러한 유적들이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를 연구하였다. 아직 고고학적 조사자료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삼척지역에 소재하는 10개의 城址 가운데 오화리산성을 비롯하여 갈야산성, 옥원성, 호산리성지, 광태리고성, 맹방고성 정도는 삼국시대에 이미 성터로 자리잡 았던 곳이라 여겨지며 결과적으로 신라의 북방 진출이나 지방통치체제 정비와 관련된 유적이라고 여겨진다. 특히 오화리산성은 신라의 삼척 점거 초기에 조성된 산성이며 신라의 동해안 지역 군사거점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고 여겨지며, 古代 삼척군의 領縣과 관련되는 것으로 판단되는 호산리성지(혹은 옥원성지), 광태리고성(혹은 맹방고성) 은 小據點이라고 여겨진다. 물론 갈야산성 성벽하부에서 신라고분이 발견된 점에서 볼 때 갈야산성도 신라가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이나 그 시기는 오화리산성 보다는 후대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 싶다. 신라는 일찍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선박 운영 제도를 확립하였고, ‘船府’라는 관 청을 두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상당한 규모의 수군과 병선제조 능력, 운용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아마 신라의 북상과 함께 동해안 곳곳의 주요 요충지가 신라 선박의 기항지로 활용되었을 것이며, 그 가운데 삼척의 오십천 하구 와 오분항은 신라의 군사거점과 연계하여 가장 중요한 기항지였다고 여겨진다. 異斯夫가 우산국 정벌을 앞두고 하슬라군주로 임명된 사실을 중시하여 이사부 가 통제하던 신라군이 모두 하슬라(강릉) 지역으로 거점을 옮겨가서 우산국 정벌에 임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나 이 문제에 대한 어떠한 명확한 史料도 없지만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여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합리적인 판단을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본래 하슬라(강릉)지역을 포함한 신라의 북부 동해안 지역이 ‘실직주’라는 명칭하에 관리되고 있었던 것을 州의 명칭과 그 중심지를 하슬라 지역으로 바꾸어 정한 것에 불과하다. 이미 여러 해 동안 실직군주를 지내면서 건설해 놓은 군사거점을 옮긴다는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하슬라주를 설치하였으면서도 지방 주둔 신라군 가운데 가장 중요한 군단인 停(悉直停)을 곧바로 하슬라로 옮기지 않고 하서정을 무열왕 때에 와서야 비로소 강릉으로 옮겨 설치한 것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따라서 삼척에 상당기간 주둔하며 육성한 수군을 우산국에 대한 군사작전을 목전에 두고 군주의 이동과 함께 완전히 이전하여 간 것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더구나 우산국으로 향하기 훨씬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는 삼척지역을 완전히 배제하고 단지 군주 명칭이 바뀌었다고 옮겨간다는 것은 여러 가지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여 볼 때 합리적인 해석이 아니라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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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0.0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우리나라는 연해와 島嶼地域이 많고 또 바다와 연결되는 하천이 많아 일찍부터 물자와 사람을 운송하는데 선박을 이용하였으며, 자연히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활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수군에 대한 연구는 주로 軍制, 軍役, 兵船, 營鎭, 수군활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고, 특히 비교적 사료가 많이 남아 있는 조선시대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수군 유적에 대한 연구는 주로 고려말 이후의 浦鎭이나 水營에 대한 것이 이루어졌으나 연구 논저가 많지 않다. 특히 강원도 동해안 지역의 수군 유적과 관련하여서는 조선시대 수군진성에 대한 것과 최근 이루어진 異斯夫 관련 심포지움에서 발표된 연구논문 이외에는 없는 실정이다. 이 논문에서는 삼국시대 이래 수군의 운용과 배치, 그리고 강원도 동해안 지역의 유적 가운데 이와 관련 지울 수 있는 浦鎭(병선 정박처나 수군의 鎭)이나 성곽 유적에 대해 연구하였다. 기록을 통해 볼 때 이미 삼국시대부터 수군을 전투에 활용하고 있으며,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이는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신라는 船府를 두었고, 고려시대에는 船兵都部署․司水寺가 있었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군사체제에 수군이 완전히 정규군으로 편제되어 수군 병종을 따로 설치하였을 뿐만 아니라 각 도별로 수군절도사를 두고 예하부대를 배치하여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조선초기 강원도 동해안 지역에는 6개 水軍萬戶鎭이 설치되어 병선 17척, 군병 1,103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특히 이 가운데 삼척포에는 병선 4척에 수군 245명이 배치되어 강원도 지역에서는 가장 중요한 수군기지였다. 이후 『경국대전』에 규식화된 수는 병선 16척(無軍小猛船 2척 포함) 수군 420명(소맹선 수군을 1척당 30명으 로 산정) 정도로 감축되었다가 임진왜란 이후로는 삼척포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폐지되었다. 강원도 연해지역의 수군과 관련된 유적으로는 삼척의 오화리산성을 비롯하여 강릉의 방내리토성을 포함한 그 주변유적과 영진항, 안인포 일대, 강릉 석교리토성과 사천진, 양양의 대포영성과 광정진성터, 삼척의 삼척포 진성터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조선초기 수군만호가 배치되어 있었던 속초포가 있고, 기타 명확하지는 않지만 고려시대에 선병도 부서와 관련된 유적이 있을 것으로 여겨지나 현재는 그 위치나 유적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속초 포는 현재의 속초항 일대로 여겨지나 일대가 모두 개발되어 그 흔적을 찾기 어렵다. 기록에 나오는 쌍성호 浦 鎭이 이것을 말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쌍성호는 현재 속초시에 있는 청초호를 말하는데 아마 어느 시기엔가 바다와 연접한 潟湖인 청초호를 병선 정박지로 사용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영동지역에는 명주(강릉)의 寧平戍 등 9개의 戍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戍는 일종의 소규모 감시초소를 말하며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바다를 감시하기 위한 海防의 일환으로 연해지대를 따라 설치한 것이었으나 이것이 고려시대 수군에 의해 운용된 것인지 아니면 일반 陸守軍에 의 해 운용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또 『關東誌』에 의하면 강릉의 連谷津, 梧耳津, 注文津에는 모두 斥候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있고, 󰡔만기요람󰡕(軍政編 四 海防 東海)에도 삼척의 藏吾里浦(근덕면 장호리) 가 동해 방면의 선박이 정박하는 곳이고 斥堠가 있다고 하였고, 平海의 仇珍浦ㆍ正明浦ㆍ厚里浦에 역시 척후 가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水軍 척후인지 陸守軍 척후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이러한 동해안의 수군내지는 海防遺蹟은 현재까지 별도로 연구된 바도 없고, 고고학적 조사도 미흡하다. 향후 더 많은 고증적인 연구와 조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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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9.11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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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1986.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It is very important for a navigator on bridge to know the maneuverability of his ship sufficiently at sea. Generally, the data of a turning circle test have long been used to study and evaluate the maneuverability of a ship. But referring only the data of the turning circle test method, he can not evaluate his ship's maneuvering characteristics sufficiently. So nowaday the test method added Z test to turning circle test for more detail references is considered to be desirable. In this paper, the authors performed PAL test and Z test together in order to study the maneuverability of M. S.Pusan 403, training ship of the National Fisheries University of Pusan. According to the results of PAL test, the rudder effect in port rudder angle of the M. S. Pusan 403 was found to be more effective than that in starboard one, because her changing amounts of angular velocity, turning radius and tangent speed in port rudder angles were found to be larger than those of them in starboard rudder one in unsymmetry. The relation between her drift angle(.8) and rudder angle (0) was found to be changing with .8=0.640 in direct proportion. As it appeared that her calculated K'-values were smaller than the standard K'-values of different kinds of ships in accordance with her Z test, her turning ability was found to be lower. The running distance of a turn in her 10˚ Z test was about 8.3 times her own length and was found not to be exceeded the standard maneuvering distance, therefore she was considered to have good maneuverabilities synthetica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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